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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상정책과 개성상인

ogfriend 2006. 10. 3. 13:44
억상정책과 개성상인
오창규기자  chang@munhwa.com
조선 초(14세기말) 1인당 국민소득은 대략 1달러였다. 1910년 조선이 망할 당시도 1달러였다. 500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한 것이다.이는 경제학자들의 계산이다.

왜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했을까. 조선의 ‘억상정책’ 때문이다. 위화도회군과 함께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1000년을 지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연구해올 것을 주문했다. 정도전은 연구작품으로 ‘억상정책’ ‘억불정책’ ‘숭유정책’ 을 올렸다.

“상공업이 발달할 경우 거부들이 사병을 거느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정권은 언제든지 위태로워집니다. 상인의 아들인 왕건이 정권을 장악한 것을 보십시오. 모든 자본의 가치를 화폐가 아닌 토지로 평가되는 사회를 만드십시오. 또 불교보다는 줄을 확실히 세울 수 있는 유교를 중시하십시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과 삼강오륜(三綱五倫)은 당시 유행어였다. 심지어 평민들은 옷에 물감을 들여 입는 것이 사실상 금지됐다. 후에 서양인들이 우리를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 부르게 됐다. 한국인 특유의 ‘신바람문화’ 도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당시 지구촌 최고 부촌(富村)중 하나였던 개성의 비극은 참담했다. 고려는 상업의 발달로 송나라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였다. 고려의 대표적인 항구 벽란도에는 사라센인 등 각국에서 온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개성은 정치적 탄압과 억상정책으로 가장 가난한 도시로 전락했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태조는 백년에 한하여 개성선비들이 과거 보는 것을 금했다. 개성선비들은 아들과 손자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평민이 되고, 학업을 닦지 아니하고 장사로 생업을 삼았다. 삼백년 쯤 지나 드디어 개성에는 사대부들의 이름까지 없어졌다. 경성의 사대부들 또한 그 곳에 가서 사는 이가 없었다.”

개성인들이 탄압을 받은 것은 고려 왕조의 본거지이면서 조선건국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개성사람들은 70년이 지난 성종 이후에야 공식적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에 진출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로부터 400년 이상이 흐른 뒤 고종 6년(1869년)에 이르러서야 길이 열렸다.

개성 사대부들은 가장 천대받던 ‘보부상’ , 즉 장돌뱅이의 길을 택했다. 중국 주나라에게 멸망한 상나라 유신들이나 2000년 동안 유랑민으로 살아온 유대인이 보부상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600년 이상이 지난 오늘. 지금도 억상정책의 잔영은 우리 정서속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기업인치고 수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특히 최근에는 양극화 해소라는 유행어와 함께 ‘국민정서법’ 이라는 매서운 회초리까지 감내해야 한다. 특히 국민정서는 세습경영에 대해 못마땅해한다.

유럽의 가족경영문화와 대조적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200대 상장기업 중 주식의 반수 이상이 다른 투자자에게 분산되어 있는 기업의 수가 7개에 불과하다. 독일도 소유와 경영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기업은 은행을 포함, 20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유대인들은 철저히 가족경영을 고수하기로 유명하다.

자신이 부자가 될 수 없다고 부자를 미워하는 것은 자신이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유명한 화가를 바보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국부를 와 고용을 창출하는 경제인에 대한 존경 없이는 선진국도 없다. 19세기말 유길준 선생은 “전쟁은 난시의 상업이지만 상업은 평시의 전쟁” 이라고 말했다. 상업의 전쟁터에서 싸우는 기업인은 오늘의 이순신 장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