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 22. 16:14 명상의자리
나는 어떤가면을 쓰고..
나는 어떤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나?
주영헌 2006-03-14
필자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나는 지금 몇 개의 가면을 쓰며 살아가고 있나?
가면을 쓰지 않고 맨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 같은 모습, 꾸밈없는 진솔한 마음으로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내 스스로 너무 부정적인 가치관이나 사고에 억매여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너무 밝게만 바라보는 것도 인생을 바로 사는 방법은 아니라 여기기에 오늘의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이 글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사람에게 가면은 필요한 것인가?”
사람에게 가면은 필요한 것인가?
사람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한 가지는 ‘성선설’, 또 한 가지는 ‘성악설’이다. 만약 성선설이 맞다 한다면 사람은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 사람의 근본은 선하기에 ‘악’이라는 가면을 벋어 버린다면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기에, 가면이란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성악설이 맞다 한다면 사람은 ‘선’이라는 가면을 써야만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성선설이 맞는지 성악설이 맞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필자의 생각엔 사람을 ‘악’과 ‘선’으로 나누려는 이분법적인 생각 자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한사람도 가면을 쓸 때가 있고 악한 사람도 가면을 쓸 때가 있기 때문에 ‘선’하거나 ‘악’하기에 가면을 쓴다는 이유는 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선과 악 때문에 가면이 필요하다는 접근은 가면을 쓰는 이유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심오한 접근보다는 평범한, 쉬운 접근이 가면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가면을 쓰는 가장 평범한 이유,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라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거나 과장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함이다. 가면이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사람에게 가면은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필요하다"가 맞을 것이다.
사람에게 가면의 필요한 이유, 결국 자신의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함이다. 감춘다는 것은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심을 들어 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심을 드러냄으로 인해 자신이 손쉽게 파악되고, 그것으로 피해를 보거나 또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가면을 이용하는 방법
사람이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 가면을 제대로 이용해야 할 것이다. ‘제대로’이용한다는 것, ‘악어의 눈물’처럼 누군가를 기만하거나 속이기 위한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럴 필요가 있을 때가 있지만, 기만을 기만을 낳고 속임은 속임을 낳는법, 결국은 내가 뿌린 씨앗대로 열매를 얻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가면을 악함에 이용하기 보다, 선함쪽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가면을 ‘제대로’이용하는 것일 것이다.
가면을 제대로 이용하는 첫 번째 가면. ‘화냄을 드러내지 않는 가면’
화는 화를 낳는다. 화난 모습을 보면 나도 화가 나고 그것을 보는 누군가도 화가 난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화를 낼 때 화를 화로 되받아 친다면 상황은 더욱더 나빠질 것이다. 이럴땐 가능한 화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만약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거나 화를 내는 사람이 자신의 상관이라면, 가면을 쓰고서라도 그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거나,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벋어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두 번째 가면. “웃는 가면”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고 했다. 그만큼 웃는 얼굴은 상대방을 공격을 약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또한 웃는 모습은 상대방과 나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단 그 웃음이 비웃음으로 보지지 말아야 하며, 상황에 맞는 웃음이어야 한다.
나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만날 때 마다 반가운 웃음으로 인사를 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놈 웃긴 놈 아냐’ 당연히 이런 속마음을 지닐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반복되고 꾸준해 진다면, 그 사람은 조금은 경계를 풀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내게 마음을 열 수도 있다. 물론 희망사항이지만, 이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과 내가 적이라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세 번째 가면. “친절한 가면”
사람들에게 친절해 보여 내가 손해 볼 것은 없다. 친절하다는 모습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쉽게 열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있다면 나는 더욱더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한다. 그 이유 친절한 모습을 보임으로 내가 받는 공격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회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한 조직에 A라는 사람과 B, C, D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중에 A가 나를 계속 공격한다. 이럴 때 나는 B,C,D에게 친절하게 해 주었다. 그러면 B,C,D는 내 편이 되어 A의 공격이 무엇일 지라도 그 공격이 온당하지 못하며, 만약 온당하다고 하더라도 A를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것이 친절의 가면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가면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면
사람은 진실 된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만약 나 혼자 외톨이 섬에서 혼자 산다면,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진실된 모습(나체)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만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모인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는 진실만으로 오늘을 열어 갈 수 없다. 결국은 어떻게 하든지 가면이라는 것을 만들어 써야만 한다. 만약 가면을 써야만 한다면, 가능한 좋은 가면을 쓰자.
친절한 가면, 웃음의 가면 등등이 좋은 가면들이다. 비록 자신의 본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할지라도 좋은 가면을 쓰고 생활하자. 만약 이 가면을 쓰고 하루하루 살다 보면, 자신의 본 모습까지 웃음 짖고 친절해질지 누가 알겠는가? 마인드 컨트롤 이라는 것이 있듯이, 어느 순간 자신의 자아가 가면을 흡수하여 친절하게, 웃는 모습으로 바뀔지 모른다.
주영헌(yhjoo@mju.ac.kr)
주영헌 2006-03-14
필자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나는 지금 몇 개의 가면을 쓰며 살아가고 있나?
가면을 쓰지 않고 맨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 같은 모습, 꾸밈없는 진솔한 마음으로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내 스스로 너무 부정적인 가치관이나 사고에 억매여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너무 밝게만 바라보는 것도 인생을 바로 사는 방법은 아니라 여기기에 오늘의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이 글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사람에게 가면은 필요한 것인가?”
사람에게 가면은 필요한 것인가?
사람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한 가지는 ‘성선설’, 또 한 가지는 ‘성악설’이다. 만약 성선설이 맞다 한다면 사람은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 사람의 근본은 선하기에 ‘악’이라는 가면을 벋어 버린다면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기에, 가면이란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성악설이 맞다 한다면 사람은 ‘선’이라는 가면을 써야만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성선설이 맞는지 성악설이 맞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필자의 생각엔 사람을 ‘악’과 ‘선’으로 나누려는 이분법적인 생각 자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한사람도 가면을 쓸 때가 있고 악한 사람도 가면을 쓸 때가 있기 때문에 ‘선’하거나 ‘악’하기에 가면을 쓴다는 이유는 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선과 악 때문에 가면이 필요하다는 접근은 가면을 쓰는 이유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심오한 접근보다는 평범한, 쉬운 접근이 가면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가면을 쓰는 가장 평범한 이유,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라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거나 과장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함이다. 가면이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사람에게 가면은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필요하다"가 맞을 것이다.
사람에게 가면의 필요한 이유, 결국 자신의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함이다. 감춘다는 것은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심을 들어 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심을 드러냄으로 인해 자신이 손쉽게 파악되고, 그것으로 피해를 보거나 또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가면을 이용하는 방법
사람이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 가면을 제대로 이용해야 할 것이다. ‘제대로’이용한다는 것, ‘악어의 눈물’처럼 누군가를 기만하거나 속이기 위한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럴 필요가 있을 때가 있지만, 기만을 기만을 낳고 속임은 속임을 낳는법, 결국은 내가 뿌린 씨앗대로 열매를 얻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가면을 악함에 이용하기 보다, 선함쪽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가면을 ‘제대로’이용하는 것일 것이다.
가면을 제대로 이용하는 첫 번째 가면. ‘화냄을 드러내지 않는 가면’
화는 화를 낳는다. 화난 모습을 보면 나도 화가 나고 그것을 보는 누군가도 화가 난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화를 낼 때 화를 화로 되받아 친다면 상황은 더욱더 나빠질 것이다. 이럴땐 가능한 화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만약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거나 화를 내는 사람이 자신의 상관이라면, 가면을 쓰고서라도 그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거나,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벋어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두 번째 가면. “웃는 가면”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고 했다. 그만큼 웃는 얼굴은 상대방을 공격을 약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또한 웃는 모습은 상대방과 나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단 그 웃음이 비웃음으로 보지지 말아야 하며, 상황에 맞는 웃음이어야 한다.
나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만날 때 마다 반가운 웃음으로 인사를 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놈 웃긴 놈 아냐’ 당연히 이런 속마음을 지닐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반복되고 꾸준해 진다면, 그 사람은 조금은 경계를 풀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내게 마음을 열 수도 있다. 물론 희망사항이지만, 이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과 내가 적이라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세 번째 가면. “친절한 가면”
사람들에게 친절해 보여 내가 손해 볼 것은 없다. 친절하다는 모습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쉽게 열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있다면 나는 더욱더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한다. 그 이유 친절한 모습을 보임으로 내가 받는 공격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회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한 조직에 A라는 사람과 B, C, D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중에 A가 나를 계속 공격한다. 이럴 때 나는 B,C,D에게 친절하게 해 주었다. 그러면 B,C,D는 내 편이 되어 A의 공격이 무엇일 지라도 그 공격이 온당하지 못하며, 만약 온당하다고 하더라도 A를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것이 친절의 가면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가면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면
사람은 진실 된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만약 나 혼자 외톨이 섬에서 혼자 산다면,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진실된 모습(나체)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만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모인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는 진실만으로 오늘을 열어 갈 수 없다. 결국은 어떻게 하든지 가면이라는 것을 만들어 써야만 한다. 만약 가면을 써야만 한다면, 가능한 좋은 가면을 쓰자.
친절한 가면, 웃음의 가면 등등이 좋은 가면들이다. 비록 자신의 본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할지라도 좋은 가면을 쓰고 생활하자. 만약 이 가면을 쓰고 하루하루 살다 보면, 자신의 본 모습까지 웃음 짖고 친절해질지 누가 알겠는가? 마인드 컨트롤 이라는 것이 있듯이, 어느 순간 자신의 자아가 가면을 흡수하여 친절하게, 웃는 모습으로 바뀔지 모른다.
주영헌(yhjoo@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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