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베니스, 나의 마지막 여행지 2006/09/20 21:45 | 추천0스크랩0 |
원문출처 : 이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 |
어쩌면 이 여행기는 같은 자리를 몇차례 맴돌다가 미로에 갇히고 마는 글이 되지 않을까. 1. 물 물이 길을 만들었다. 베니스를 처음 봤을 때, 세상에 이런 곳이 있나 싶었다. 곤돌라가 누비는 좁은 수로마다 너무 로맨틱해서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낭만이 장밋빛 등불을 달고 동동 떠다녔다. 하지만 베니스 방문이 네번째였던 그날 오후는 달랐다.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바다를 향해 뻗은 손에서 힘이 빠지며 서서히 고개를 떨구고 죽은 작곡가 아센바흐의 자취를 좇아 온 여행이기 때문이었을까. 가끔씩 내리는 비에 베니스는 음울하게 젖어 있었다. 숙소로 가는 길, 짙은 녹색의 바다는 이제 막 응고된 푸딩 같았다. 배는 푸딩을 으깨듯 힘겹게 물 위를 지났다. 베니스에 쉬러 왔던 아센바흐는 비굴하거나 불친절한 베니스 사람들에 질릴 때쯤 열네살 폴란드 소년 타치오를 발견한다. 가족과 함께 휴가를 즐기러 온 타치오는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타치오를 찾지 못해 베니스의 좁은 골목에서 쪼그리고 앉아 울먹이는 꿈을 꾸던 아센바흐는 잠에서 깨어 식은땀을 흘린다. 그의 땀은 검은색이다. 젊음을 의식한 초로의 신사가 머리를 검게 염색했기 때문이다. 신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종종 바다를 바라보지만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되지 못한다. 빈 하늘을 어지럽게 떠도는, 새. 2. 새 새들의 세상이었다. 베니스의 명소인 산 마르코 광장은 언제 가도 비둘기 천지였다. 도시 전체로 번져가는 전염병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아센바흐가 가로지르던 광장을 거닐 때, 노천카페의 악단이 영화 ‘모 베터 블루스’의 테마곡을 멋지게 연주했다. 비둘기들이 힘차게 공기를 가르며 관악기가 쏟아내는 음표 사이를 저공비행할 때마다,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도 치솟아올랐다. 새의 날갯짓과 어린이의 웃음소리와 브라스 밴드의 음악. 그리고 저 멀리 바다에 떠 있는 곤돌라 위의 연인들. 이보다 더 낭만적인 풍경이 있을까. 그러나 춤을 추는 사람 모두가 즐겁진 않은 법. 광장 구석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노인은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마다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손 어깨 머리 등 어디나 앉는 새들은 이악스러웠다. 1 유로짜리 모이를 산 관광객이 봉지를 채 펼치지도 전에 달려들었다. 받은 팁만큼 음악을 뽑아낸 브라스 밴드는 악기를 내려놓았고, 잠깐의 낭만을 선사한 곤돌라 사공은 웃돈을 요구했다. 그리고 흐려진 노안(老眼)에, 아이들은 유난스러웠다. 아센바흐는 신발 끄는 소리와 긴 그림자를 남기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베니스를 떠나려 했다. 소리와 그림자 외에,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깊을수록 고독한, 섬. 3. 섬 섬은 한적했다. 남북으로 좁고 긴 베니스 리도섬은 아센바흐가 묵었던 곳이다. 그가 투숙했던 ‘호텔 데 뱅’(Hotel Des Bains)으로 갔다. 이곳의 레스토랑과 카페와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타치오와 수차례 마주치면서도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다. 삐걱거리는 나무 복도를 지나 1층 카페로 들어가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함께 나온 초콜렛 입힌 딸기를 보니, 딸기 하나를 먹고도 냅킨으로 깔끔하게 닦아냈던 아센바흐가 떠올랐다. 손꼽히는 휴양지 리도섬은 여기서 열리는 베니스 영화제 기간에만 방문해서였는지, 썰렁한 분위기가 익숙지 않았다. 비 뿌리는 해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센바흐가 타치오를 무망하게 바라보던 바닷가에는 파란색 간이 의자들이 접혀진 채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것들이 있다. 늦은 오후, 우산도 없이 모래사장을 걸었다. 물이 땅에 남긴 흔적 위에 다시 인간의 흔적을 보태는 것은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아무리 곧게 걸으려 애써도, 돌아보면 발자국은 늘 어지럽다.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살아온 독일인 아센바흐는 삶의 마지막 여행에서 어린 소년에게 매혹되어 극심한 혼란을 경험한다. 모래가 기억하는 비. 삶이 추억하는 여행. 여행이 가치있다면, 그건 끊임없이 움직이는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가 나면 모래는 곧 비를 잊는다. 그리고 삶은 끝내 웅덩이를 이루며 고인다. 흐린 하늘이 더욱 어두워졌다. 열정도 권태도 모두 집어삼키고서 시간의 웅덩이에서 영겁회귀하는, 밤. 4. 밤 밤이 서린다. 베니스의 굽은 골목길마다. 베니스를 떠나기 전날 밤 12시, 충동적으로 거리에 나섰다. 밤의 농도는 촉각으로 다가왔다. 아센바흐의 타치오에 대한 매혹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동성애적인 그 감정은 이성의 신봉자였던 그가 투항하게 된 열정의 상징일 수도 있고, 예술가인 그가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표상일 수도 있다. 베니스 골목길은 좁고 어두웠다. 운하를 만나면 길이 끊어지기도 했다. 낮에도 헤매기 일쑤인 베니스에서 밤의 골목길은 미로 그 자체였다. 이 골목길들을 헤매면서 아센바흐는 타치오를 몰래 따라다니기만 한다. 그리곤 길게 탄식한다. 그가 타치오를 미행하던 작은 운하길, 디에트로 라 페니체를 찾아 헤맬 때, 후미진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가 예기치 않은 광경과 마주쳤다. 운하에 맞닿은 기둥에 기대선 채 격렬한 ‘행위’에 탐닉하던 남녀는 낯선 자가 나타나자 고개를 숙인 채 얼어붙었다. 더 당황한 행인은 왔던 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다. 밤은 차가웠다. 그러나 적어도 밤은 겪어내고 견뎌내야 하는 시간은 아니었다. 자정을 넘긴 디에트로 라 페니체에서, 어둠은 안온했다. 타치오가 건넜던 작은 다리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운하엔 가로등 불빛이 잉크처럼 번지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를 목도하고도 베니스를 떠나지 못했던 아센바흐는 결국 노년의 초입,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을 흘리며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는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버나드 쇼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일을 용서받는 청년기는 아무 것도 스스로 용서하지 않으며, 스스로 모든 일을 용서하는 노년기는 아무 것도 용서받지 못한다. 열여덟편 영화의 궤적을 좇았던 긴 여행은 베니스의 폐곡선 같은 미로 속에서 마지막 장을 맞았다. 길은 모두 세계의 끝으로 통한다고 믿었지만, 어떤 길은 그 안에서 꼬리를 물고 맴돌았다. 이젠 정말 여행을 끝낼 때가 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과연 여정도 끝이 날까. 저 멀리서 누군가 가방을 끌며 뒤늦게 숙소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달렸지만, 무거운 가방 소리였다. 아무도 오지 않는 다리에 서서 메마른 눈동자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금 눈 앞에서 검게 빛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물. --- 리알토 다리에서 내려 찍은 대운하의 풍경입니다. 베니스,하면 제일 먼저 저는 이 가면들이 떠올라요. 화려하면서 그로테스크한 묘한 느낌이랄까요. 리알토 다리 근처의 재래시장 과일가게입니다. 베니스엔 이런 레스토랑이 많죠. 길과 식당이 구분되지 않는 광경입니다. 열두시가 넘은 베니스의 밤거리입니다. 예전 베니스에 처음 갔을 때, 무라노 섬에 들러서 꽃병 두개를 샀어요. 그걸 여행 내내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느라정말 무지 힘들었습죠.-.- 색깔이 정말 예술이죠? 호텔 데 뱅의 1층 카페입니다. 에스프레소 옆 초콜렛을 입힌 딸기 보이시죠? 리도섬의 바닷가입니다. 막 비가 그치자 일하시는 분이 의자들을 부지런히 펴고 있었죠. 뒤에 보이는 게 호텔 데 뱅입니다. 뒤에 보이는 다리가 탄식의 다리입니다. 죄수들이 장차 맞게 될 고문과 죽음을 예견하고 길게 탄식하며 건너는 다리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지요. 그 밑을 곤돌라가 유유히 지나고 있습니다. 산 마르코 광장을 뒤덮은 비둘기떼 속에서 남매인 듯한 두 아이가 너무나 천진한 웃음으로 즐거워하고 있더군요. 곤돌라는꽤 긴 장거리 이동에도활용됐어요. 아센바흐도지금보시는 이곳에서 곤돌라를 이용했죠. 리도섬의 주택가입니다. 리도섬은 베니스와 달라서, 자동차들이 운행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소독약이 살포되는 것을 보고 아센바흐가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캐묻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하는 곳이죠. 이 부분은 영화 속에서 꼭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삽입되어 있었어요. 자정이 넘은 베니스의 이런 어두운 골목길을 헤매고 있자니, 정말 기분이 묘해지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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