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산책하는 기분
이동진 조회6759 추천12

그 시계에는 비닐 봉지가 씌워져 있었다.

가와사키시(市)로 가기 위해 택시에 올라타기 직전,

시계상점 진열대 옆에 서 있던 시계를 봤다.

길쭉한 금속 지지대 위에

둥글게 자리잡고 있는

그 스탠드형 시계의 바늘은 멈춰져 있었다.

고장이 났다고 시계에

비닐 봉지를 씌워두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짐승의 시간-가와사키

도쿄 인근 가와사키시의 게이힌 운하는

소나티네의 주인공인 야쿠자 중간 보스 무라카와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면에서 등장했다.

그는 채무자를 기중기에 달아

물 속에 집어넣는 고문을 했다.

채무자가 익사하자

그는 죽었나보군. 뒷처리 부탁해라는 냉혹한 말을

부하들에게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활동 무대인 도쿄에 있을 때

무라카와는 정해진 시간 안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바쁜 사람이었다.

직접 확인한 케이힌 운하는

그 장면의 냉기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었다.

쓰레기로 뒤덮인 모래밭과 검은 물을 지닌

운하 주위는 공장 지대였다.

해만 지면 폭주족 출몰로 살벌해진다며

택시 운전사는 일몰 전 떠나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까지 했다.

하지만 황혼은 모든 추(醜)를 가리는

비단 베일 같은 것이었다.

운하 산책로를 배회하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근처 공항 활주로를 막 벗어난 비행기가

급선회하며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노을에 채색되자 검은 물도

윤기 있는 점도로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이제 밤은 폭주족 오토바이의 거친 소음조차

어둠 속에 묻어버릴 것이다.

도둑 고양이 한 마리가 풀숲을 달렸다.

밤이 되면 모든 고양이가 검은색이다.

◆인간의 시간-이시가키

이시가키섬 공항에서 손목시계를 잃어버렸다.

일본 열도 최남단 오키나와현 중에서도

한참 남쪽에 놓여 있는 이 작은 섬을 여행하며

처음엔 수시로 사람들에게 시간을 물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확인하지 않았다.

도쿄에서 정신없이 흘렀던 시간과 달리

이시가키섬에선 시간이

물처럼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고 평화로운 그 섬에서의 일정은

취재라기보다 산책에 가까웠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slow는 네 개의 철자로 되어 있다.

life도 그렇다.

speed는 다섯개의 철자로 되어 있다.

death도 그렇다.

평화로운 모든 것은 느리다.

잔혹한 무라카와도

이시가키에서는 어린아이 같았다.

조직 내 갈등으로 섬에 내려온 뒤

할 일이 없어진 무라카와는

부하들과 어울려 해변에서

스모를 하고 불꽃놀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무라카와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아카이시 해변은 섬 북동쪽 끝에 있었다.

지금은 소 방목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그곳의

산길을 지나 바닷가에 도달했다.

그곳엔 덩치 큰 검은 소떼가

모래밭을 차지하고 있었다.

낯선 자를 발견하자

휴식을 즐기던 소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달려들 듯 노려봤다.

약간의 두려움을 누르고 바닷가를 거닐었다.

소 배설물로 가득한 해변을

조심조심 걷다보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기대했던 것이

생명의 찌꺼기 따윈 아니었으니까.

무라카와가 자신이 파놓은 모래 함정에

부하들이 빠지는 것을 보고

키득거리던 지점을 지나 해변을 빠져나오다

무심코 뒤를 돌아다봤다.

침입자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소들이

그제서야 하나둘 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갑자기 너무나 미안해졌다.

방해한 것도 위협한 것도

실은 그들이 아니었다.

누군가 잠시 들른 휴식 공간이

다른 이에겐 삶의 터전이라는 것.

여행자는 종종 옅은 죄책감의 삯으로 환상을 소비한다.

연이어 방문한 섬 북쪽

카비라 해변의 옥빛 바다는

맑다 못해 투명에 가까웠다.

화사한 햇빛과 싱그런 바람은

바다의 푸른색 마디마디를 올올이 풀어내

마치 엷푸른 눈이

거대한 저수지에 내린 듯한 풍경을 빚었다.

넘실대는 물은 가끔씩 찰랑이며

기분좋게 모래 위로 넘쳐

나그네의 마음을 적셨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절경 중 하나라는 말 그대로였다.

턱에 찼던 일상의 직선으로 치닫는 시간 대신

오키나와의 둥글게 일렁이는 시간은

어디서나 부드럽게 흘러 넘쳤다.

서둘러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소나티네에서 낚시꾼을 가장한 킬러는

이 해변에서 원반던지기를 하던

무라카와 조직원들을 급습했다.

모래밭에 놓인 배 앞에 앉아 있느라

적의 눈에 띄지 않았던 무라카와는 살았지만 부하는 사살됐다.

영화에서처럼 곳곳에 작은 폐선들이 놓여 있는 해변을

단체 노년 관광객들이 몰려와 설레며 걸었다.

소나티네 중 후반부 총격 장면들은

오키나와라는 지역의 비현실적일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 때문에

역설적으로 폭력성이 더 도드라진다.

낙원을 앙망하는 눈길만이 있을 뿐,

이 땅에 낙원 자체는 없다.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듯한 오키나와는

2차대전 당시 일본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소나티네는 결국 생의 허무를 그대로 드러내는

강력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복수를 마친 무라카와가 머리에 총을 쏘는 모습으로

영화와 삶 자체를 맺는 마지막 장면은

섬 동쪽 카라봉 근처 한적한 산길에서 찍었다.

한국인은 처음 본다는 택시 기사 가즈오에게 명함을 줬더니

朝鮮日報 글귀를 보고 북한에서 왔냐며 놀랐다.

가즈오와 함께 한참 헤매다

라스트신 촬영 장소를 간신히 찾아냈다.

옆에 사탕수수밭이 펼쳐진 그 곳은

거칠고 좁은 비포장도로였다.

무라카와가 차 안에서 생을 마친 그 자리에 택시를 세웠다.

길의 곧게 뻗은 구간이 끝나고

에스(S)자로 휜 부분이 막 시작되려는 지점이었다.

차에서 내렸다.

흙길엔 죽음 같은 정적이 서려 있었다.

가끔 바람이 불어오면

사탕수수가 흔들리는 것을 신호로

섬 전체가 통째로 흔들렸다.

무라카와는 세류(世流)를 타고 흐르기보다는

끊어지기를 택한 남자였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순 없지만

끊을 수는 있다.

길 위에 오래 서서 머무르자

택시에 남아 있던 가즈오가 이상한 듯 내다봤다.

모든 것이 신기루 같은 여정에서,

머무르는 행위는

시간과 공간을 잠시라도 양손에 함께 쥐어볼 수 있는

주문(呪文) 같은 것이었다.

◆◆◆

공항에 가기 전 이시가키의 어느 식당에 들어서니

손님들이 끼워둔 명함 극장표 사진 메모로

가득한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의 추억을 가져오는 것은 익숙한 일이지만,

여정의 흔적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명함을 꺼내 압정으로 벽에 꽂았다.

가끔씩 넘실거렸던 오키나와의 시간은

그 순간 내 기억 속에서 멈추며

영원히 고정됐다.

나는 이 시간을 잊을지언정

흘려보내거나 뒤흔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계가 멈췄다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닐 봉지를 씌운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람이 시간을 재지 않고

시간이 사람을 재는 이 추레한 문명 속에서.

----

'소나티네'의 마지막 장면을 찍은 카라봉 인근 산길입니다. 저 택시가 서 있는 곳에서 무라카와는 자신의 차를 세우고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지요.

이시가키 초등학교입니다. 참 다니고 싶은 학교 모습이죠? ^^

떠나기 전에 들렀던 식당입니다. 벽에 빼곡한 메모와 사진 그리고 명함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식당에만 갔겠어요? ^^ 그 전날 저녁 이시가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술집으로 한 잔 하러 갔지요. 바로 이곳입니다.

이건 내부 장면입니다. 참푸르라는 오키나와 전통 요리를 안주로 곁들어 따끈한 정종 잔을 기울였지요.

이시가키섬도 멋있었지만,사실 여행지로만 따지면 인근에 있는 다케토미섬이 훨씬 더 인상적이더군요. 300여명이 모여사는 이 섬은 정말 손바닥만했습니다. 단층 주택들 사이에 기껏 2층을 올린 몇몇 건물들 뿐,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 있는 이 전망대가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더군요.

그 전망대에서 아래로 찍은 사진입니다.


다케토미 섬에서는 위에서 보시는 우마차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돌담길을 누비는 게 가장 멋진 관광거리입니다. 저는 자전거를 빌려 탔는데, 개인적으로 참 기분좋은 오후였어요.

다케토미 섬엔 사실 더 높은 전망대가 하나 더 있었어요. 그런데 붕괴 위험 때문에 철조망이 쳐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냥 되돌아서면기자라고 할 수 없죠. 그래서 그냥 철조망을 넘어 전망대 꼭대기까지 몰래 올라갔어요. ^^;; 그랬더니 멀리 바다가 보이고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이런 풍경이 펼쳐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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