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의 조사를 위한 아홉시간의 산행
이름임세권
날짜2006/05/08 09:45:38조회236

왕보는 내가 간다면 함께 가겠다고 했다. 왕린산은 좀 화가 나 있었다. 우리보고 오후 6시에는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며 그 이후는 차를 가지고 돌아갈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러기로 약속을 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길은 바위돌은 좀 있어도 짚차가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였다. 갈수록 운전기사가 야속하게 생각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조금 가니 말을 탄 카사크족 유목민 하나가 양떼를 몰고 내려오는 것을 만났다. 왕보가 카사크말로 유적지를 설명하니 안다고 했다. 얼마나 가면 되느냐고 물으니 걸어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왕보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아서 다시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저 사람들은 말을 타고 다니기 때문에 걸어서 가는 것은 시간계산이 전혀 서지 않는다고 하고 저 사람이 두 시간이라고 하면 실제로는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어떻게 현지인의 말을 그렇게 믿지 못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왕보는 카사크족은 어릴 때부터 다리로 걷지 않으며 몇십미터를 가도 말을 탄다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카사크족은 무릅관절이 매우 약하며 걸어서 간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걷는 시간은 아예 머릿속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들어보니 그것도 이해가 갔다.

아무튼 우리는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가는 중간 중간 유목민들이 세워놓은 작은 집들이 뛰엄뛰엄 보였고 산 등성이 위에 올라서니 오래된 돌무덤인 쿠르간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쿠르간에는 석인상이 있었는데 역시 모두 동향을 하고 있었다. 한 쿠르간 앞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어떤 소년하나가 말을 타고 다가 왔다. 안녕! 하고 인사를 하니 웃으면서 왜 왔느냐고 했다. 왕보가 대답을 하였으나 그 소년은 우리가 지쳐있는 것이 좀 안되어 보였는지 물을 마시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물이 있느냐고 하니 없지만 떠오면 된다고 했다. 이 근처에 샘이 있는가고 물으니 멀리 산밑을 손으로 가리킨다. 아득히 먼 산 밑에 숲이 보였고 그 숲에 물이 있단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으면서 됐다고 하고 좀더 앉아 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소년이 다시 나타났다. 소년의 손에는 물이 가득 든 물병이 들려 있었다. 내 생각에 10킬로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산 밑까지 소년은 단숨에 달려가 물을 떠 온 것이다. 도대체 유목민들의 하루 행동반경은 얼마나 되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소년을 보니 유목민족들은 말위에서 살다가 말 위에서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스크바까지 단숨에 쳐들어간 징키스칸이 생각났다. 이런 사람들에게 시베리아의 서쪽끝에서 동쪽끝까지의 엄청난 거리는 실제로 그리 먼 거리가 아닐지도 몰랐다.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까지 전파되었을 청동기문화도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타고 앞서가는 왕보교수. 앞에 걷는 사람이 물을 떠다준 소년

오른쪽은 석인상과 방형 쿠르간.


30분의 조사를 위한 아홉시간의 산행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네시간 반이 지나서 우리는 타터커시쿼나스 암각화 유적의 안내판을 볼 수 있었다. 안내판 뒤로 바위들이 가득 쌓여있는 산봉우리가 보였다. 암각화 소개책자를 보면 이 곳에는 바퀴 셋 달린 마차그림과 많은 동물 인물암각화들의 사진이 있어서 비교적 기대가 컸던 유적이었다. 그러나 안내판 앞에서 나는 다시 절망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갑자기 왕보가 암각화를 찾는 일은 포기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지금 시간이 4시인데 왕린산이 돌아오라고 정한 6시까지는 지금 바로 내려가도 불가능하다. 만일 암각화를 찾는다고 왔다갔다 하다보면 한 시간은 훌쩍 지날 것이며 사진 몇장 찍으면 한 시간 반 이상은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요즘 해가 늦게 진다고 해도 어두워진 후 산을 내려갈 수 밖에 없다. 만일 왕린산이 걱정이 되어 군대에 신고라도 한다면 우리 모두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질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천신만고 끝에 암각화 유적에 도착했는데 암각화를 보지말고 그냥 내려가자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나는 30분만 허락해주면 나혼자 암각화를 찾아보겠다고 하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작은 카메라 하나만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바위 사이를 여기저기 헤메어도 암각화다운 큰 암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 밑에 앉아서 쉬고 있는 왕보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화를 낼 여가도 없었다.


이곳 저곳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니 여기 저기 인물상과 동물상들이 새겨진 작은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사진 몇장 찍고나니 벌써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산을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멀리 건너편에 흰 눈이 쌓인 빙산이 보였다. 빙산을 현지인들은 무스토크라고 불렀다. 무스는 얼음, 토크는 산을 뜻한다고 했다. 암각화가 있는 산봉의 서쪽으로 바로 밑에 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면 바로 카자흐스탄이라고 한다.

산을 내려가니 날은 아직 밝았으나 시계는 이미 8시였다. 왕린산이 지키라고 했던 여섯시에서 두시간이 더 지나 있었다. 차는 그가 말한대로 가고 없었다. 왕보는 차는 다시 올것이니 걱정말라고 했다. 풀밭에 지친몸을 누이고 얼마를 있었을까 멀리 차가 오는 것이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왕린산은 왕보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왕보는 실제 현장상황을 이야기하고 이해시키려 하고 있었고 왕린산은 오전부터 하던 얘기를 반복해서 하면서 큰 소리로 화를 냈다. 둘이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이 들었고 차가 빈관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이 유적의 대표적인 그림들을 나는 찾지 못했다. 겨우 이런 작은 그림들만 몇 장 찍고는 내려올 수밖에 없어 지금도 아쉬움이 크다.


적석 쿠르간 뒤로 멀리 눈 덮인 빙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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