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 27. 16:23 명상의자리
조선시대의 선비와 오늘의 한국
조선시대의 선비와 오늘의 한국
金 泰 吉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서울大學校 名譽敎授
Ⅰ. 선비에 대한 관심
역사적 현실은 대체로 그런 것이지만, 오늘의 우리 현실은 그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유난히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의 실체(實 )가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눈앞에 나타나는 표면상의 현상들은 대체로 밝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데 반하여, 그들 현상 배후에는 어려운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어서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 내가 받는 인상이다.
과학적 기술의 발달 덕분에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깊게 들여다보는 식자들 가운데는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내다보는 견해를 내비치는 사람도 흔히 있다.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다고 전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며, 사람에 따라서 강조하고 싶은 점이 다를 것이다. 요컨대, 식자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미래를 불안한 것으로 느끼게 하는 문제점이 여러 가지여서 그 핵심을 한 가지로 지적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 아닐까 한다. 다만 그 여러 가지 문제점의 공분모(公分母)에 해당하는 것을 굳이 이름을 붙혀서 말해야 한다면, '정신적 가치의 빈곤'을 거론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신적 가치의 빈곤' 이라는 말의 의미가 모호하다면, '가치관의 혼돈' 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무수한 종류의 가치있는 것들(the valuable)과 만나게 된다. 이 가치있는 것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에는 크고 작은 구별이 있다. 무수한 종류의 가치있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원하는 바이지만, 실제로는 그 가운데서 일부밖에 가질 수 없는 것이 삶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 욕망의 대상들 가운데서 그 일부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버릴 수 밖에 없는 선택의 기로에 자주 서게 된다. 삶의 과정 전체를 선택의 기로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거니와, 한 개인을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삶은 그에게 주어진 여건(與件)의 제약 속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가치가 실현되도록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항상 큰 가치를 취하고 적은 가치를 버리도록 힘써야 한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슬기로운 판단에 가깝도록 행동한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실현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미시적 관점에서 가치의 크고 적음을 세밀하게 계산하는 일은 아무래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시적 관점에서 적은 가치의 세계를 버리고 큰 가치의 세계를 얻도록 하는 가치영역(價値領域)의 선택에 그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슬기롭고 값진 삶을 실현하기에 별다른 지장은 없을 것이다. 예컨대, 용돈의 제한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일정한 액수의 돈을 가지고 영화 한 편을 보는 것과 맥주 몇 잔을 마시는 것과 어느 쪽이 나을까 하고 망서릴 때, 영화 관람과 맥주 마시기의 가치를 세밀하게 계산하여 비교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기본 생활의 안정을 얻은 사람이 다소 여유 있는 돈을 가지고 유흥을 위하여 소비할까 또는 독서와 예술 감상을 위하여 소비할가를 놓고 망서릴 때, 후자의 길을 선택함이 더 큰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임을 알 수는 있다. 유흥이 속하는 향락(享樂)의 가치와 독서와 예술 감상으로 얻을 수 있는 교양(敎養)의 가치를 거시적으로 비교하여 후자가 더 크다는 것은 직관으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락보다는 교양을 택하는 거시적 관점에서의 선택만으로도 우리가 슬기롭고 값진 삶을 영위함에 큰 바탕을 얻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필자가 앞에서 식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문제들의 공분모(公分母)에 해당하는 것을 '가치관의 혼란'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그 '가치관의 혼란'이란 가치 선택의 기로에서 큰 가치를 버리고 적은 가치를 취하는 오류를 지칭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신적 가치의 세계는 물질적 가치의 세계보다 우위(優位)에 자리매김해야 하고, 내면적 가치는 외면적 가치보다 우위에 자리매김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천적 행동에 있어서 그 반대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그릇된 가치의 선택이며, 이 그릇된 선택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돈이나 권력 또는 관능적 쾌락을 인격이나 생명 또는 사상보다도 더욱 값지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실천적 행동의 세계에서는 돈이나 권력 또는 향략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처럼 집요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그로 인하여 정경유착, 부패, 각종 범죄, 부실공사 등 온갖 비리가 생기고 사회 질서도 문란해진다. 식자들은 이러한 현상들을 '도덕성의 타락'이라고 규탄하기도 하고, '정신적 가치의 빈곤'이라고 개탄하기도 한다.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는 사람들은 노년층에 많고, 그들 가운데는 조선조 시대를 '좋았던 세상'이라고 찬미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물론 한국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조선조 시대가 안고 있던 여러 문제점을 기억하고 있으며, 조선조 500년을 '태평성세'라고 부르기에는 파란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거듭된 침공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국가를 지켜왔으며 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한 층 높은 단계로 발전시킨 조상들의 업적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어느정도 설득력을 가졌다.
조선조가 500여 년 동안 사직(社稷)을 지키고 문화를 꽃피움에 있어서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의 강직한 정신력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대외적으로 또는 대내적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난국을 극복함에 앞장서서 버팀목의 구실을 한 것은 선비 계층이었다고 그들은 회고한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선비정신의 결핍'을 못내 아쉬워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들의 의견은 단편적이며 즉흥적인 단계를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선비'의 개념에 대한 이해조차 사람에 따라서 다소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국어대사전}의 풀이가 엉성한 것만 보아도 '선비'의 개념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비'라는 말이 '先輩(선배)'라는 한자어에서 변화한 것인지, 또는 우리나라에 한문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있었던 순수한 우리말인지, 그것은 이 자리에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조선조 시대의 버팀목 구실을 했다고 칭송을 받기도 하는 유학도(儒學徒)로서의 선비이다. 한자로 말하면 儒(선비 유) 자에 해당하기도 하고 士(선비사) 자에 해당하기도 하는 그 '선비'의 개념을 정리하고자 함이 우리들의 당면 과제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선비'는 넓은 의미로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 즉 유생(儒生)을 지칭한다. 그러나 모든 유생들이 칭송의 대상이 된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그 가운데서 특히 조선조를 '좋았던 세상'으로 회고하도록 만드는 데 주역 구실을 한 일부의 탁월한 유학지사(儒學之士)로서의 '선비'들이 우리들의 관심의 대상이다. 그 탁월한 유학지사로서의 선비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았는지 그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여기서 우리들의 관심사이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념적이요 추상적인 논의 보다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탁월한 선비들의 구체적 처세의 모습을 우선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그 다음에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찾아보는 순서를 밟는 접근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조 시대의 대표적 선비들을 누구누구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Ⅱ. 조선조의 대표적 선비들
조선조의 대표적 선비의 한 사람으로서 우선 황희(黃喜, 1363∼1452)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공민왕때 대과(大科)에 급제한 그는 고려조가 망하자 절개를 지키고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해 있다가 후일에 조선조의 벼슬길에서 크게 영달하였다. 이 점으로 볼 때 끝까지 이군불사(二君不事)를 고집한 정몽주(鄭夢周)나 길재(吉再)에 비하면 절개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조 건국을 전적으로 부당한 거사였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으며, 황희가 조선조에 벼슬하여 일신의 영달을 도모한 적이 없으므로, 그 점이 결정적 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황희는 본래 인품이 매우 관후하면서도 강직하기도 하여, 양년대군의 폐출 문제로 직간을 하여 좌천도 당하고 귀양살이도 하였다. 그는 고관의 자리를 두루 거쳤으나 청렴결백하기 그지 없어 청백리(淸白吏)의 귀감으로 알려졌다. 그는 국가의 대사를 다룰 때는 엄정하고 단호했지만, 사사로운 일에는 지나칠 정도로 너그러웠다고 전해진다. 황희는 개인의 안락이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평생을 산 선비의 한 사람이다.
중종 때의 문신 조광조(趙光祖)도 조선조의 대표적 선비의 한 사람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조정암은 퇴계(退溪)가 근세 도학(道學)의 선구자로서 존경한 김굉필(金宏弼)의 수제자로서 과거나 보기 위하여 공부하는 태도를 버리고 몸소 군자의 도(道)를 실천하고자 힘쓴 비범한 선비였다. 그가 김굉필의 문하에 있었을 때의 일화로서 정암(靜庵)의 인품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있다. 김굉필에게 꿩이 생겨서 어머니에게 보내드리고자 볕에 말리던 차에 고양이가 그것을 먹어버렸다. 크게 화가 난 김굉필은 꿩을 지키던 계집아이를 몹시 꾸짖었다. 이 때 정암은 "어버이를 봉양하려는 정성이 지극함은 좋으나, 군자는 말과 기운을 잘 살펴야 하는 줄 압니다"라고 바른말을 했던 것이다. 이 말은 듣고 스승은 제자의 손을 잡고 "네가 나의 스승이요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두 선비의 인품이 모두 비범함을 암시하는 사제간의 대화가 아닌가 한다.
정암 조광조는 과거에 급제한 뒤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빠른 속도로 승진하여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수찬(修撰), 부제학 등 '맑고 깨끗한 벼슬자리'에 올랐다. 이 자리는 모두 임금을 가까이서 모실 기회가 많은 직책을 가진 자리였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여섯 살 연상인 정암을 처음 본 중종(中宗)은 풍모와 학식이 출중한 정암을 좋아하게 되었다.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고 믿은 정암은 중종을 보필하여 덕치(德治)가 지배하는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대망을 품게 되었다. 한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개혁에 반대하는 수구세력의 반발과 모함이 심했고 중종에게 본래 현군(賢君)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까닭에, 정암이 계획한 태평성세는 한갓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젊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그 것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조선조의 대표적 선비로서 손꼽는 데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퇴계가 성리학의 대가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퇴계의 위대한 점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그의 학문 이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실천생활에 있어서도 남이 따르기 어려운 많은 행적을 남겼다. 정암(靜庵)이 그랬듯이, 퇴계도 어려서부터 {소학}(小學)을 익혔고, 어렵고 고상한 이론보다도 오히려 일상적인 몸가짐으로서의 실천을 더욱 중요시한 전형적 '선비'의 한 사람이다. 퇴계에 관해서는 특히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퇴계가 젊어서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는 길에 수행한 종아이가 남의 밭에서 따온 콩을 놓고 밥을 지어서 올렸다. 퇴계는 그 밥을 먹지 않음으로써 종아이의 버릇을 고쳤다. 퇴계가 서울에 살고 있었을 때,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울타리 넘어로 뻗어서 가을이 되면 알밤이 선생댁 마당으로 떨어졌다. 선생은 집 어린이들이 그것을 주워서 먹을까 걱정이 되어, 손수 주워서 이웃집으로 던졌다. 퇴계가 48세 때 단양 군수로 있다가 풍기 군수로 전근하게 되어 그곳을 떠날 때, 관인들이 아전들의 밭에서 수확한 삼다발을 걸머지고 왔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관례를 따라서 떠나는 수령에게 드리는 물건이라고 하였다. 퇴계는 호되게 관인을 꾸짓고 그것을 물리쳤다. 풍기 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도 서석 이외의 다른 짐은 없었다고 한다.
퇴계는 장남에게 보낸 편지에 "빈궁은 선비의 상사(常事)라 또 무엇을 개의하랴. 너의 아비는 평생 이로써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라고 적어서 가난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고 타일은 적이 있었다. 퇴계가 객지인 서울에 있었을 때 장남은 부친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많은 일용품을 구해서 보내드렸다. 퇴계는 어떻게 해서 그 많은 물건을 구득했는지 의심스럽다며, 오히려 못마땅하다는 뜻을 전했다.
퇴계는 34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여러 명예로운 직책에 오르기도 했으나, 부귀의 길은 그가 진정 원한 길이 아니었다. 그는 주위 사정에 밀려서 관직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그 길보다는 학문과 구도(求道)의 길이 자신을 위한 본연의 길임을 거듭 확인하였다. "부귀는 뜬 연기와 같고 명예는 나르는 파리와 같다"는 깨달음을 그는 평생 안고 살았다. 권세에 아부하는 따위는 퇴계에게는 있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조의 선비요 석학이다. 율곡은 남달리 총명한 천품을 타고 났으며, 현모(賢母) 신사임당의 보살핌 밑에서 다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말을 배우면서 곧 한자(漢字)를 익혔고, 8세 때 벌서 우리나라 문학사에 남는 한시를 지었다. 그러나 5세 때 당한 모친의 별세로 큰 타격을 받고,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한때 정신적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그가 19세 되던 해 봄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참선하는 도장을 찾은 것은 그러한 시련의 단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자신을 위한 참된 길이 아니라고 느낀 율곡은 금강산을 뒤로 하고, 강릉의 외가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새로운 각오로 유학에 정진한 지 1년 뒤인 21세 때 국가의 정책을 논하는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의 영예를 얻었다. 그 뒤에도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여 번번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모두 합치면 아홉 번이나 장원으로 급제하여 천재임을 입증하였다.
율곡은 단순한 천재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현실을 걱정한 위대한 사상가였다. 개혁의 큰뜻을 품고 그는 벼슬길에 올라 정치에 관여하였다. 명나라에 가는 사신의 서장관(書狀官), 청주 목사,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일도 있으나, 임금에게 간쟁(諫諍)하는 직책을 맡는 사간원(司諫院)에서 오래 동안 일을 하였다. 그는 사간원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관의 직을 전후 아홉 번이나 맡을 정도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다. 탁월한 경륜가이기도 한 율곡은 <동호문답>(東湖問答)과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글을 지어서 시무(時務)에 관하여 군왕이 취해야 할 태도를 밝혔다. 40세가 되던 해에는 {성학집요}(聖學輯要)라는 책자를 저술하여 군왕의 도를 근복적으로 체계를 세워서 서술하였다. 별세하기 1년 전이었던 48세 때에는 다시 <시무육조>를 지어서 당면한 정치 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미구에 외침(外侵)의 환란이 다가올 것을 예견하고 10만 대군을 양성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유성룡(柳成龍)등 여러 문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율곡은 호조, 이조, 형조, 병조 등 여러 부서의 판서직을 역임하면서 나라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임종을 수일 앞둔 위중한 몸으로 좌우의 부축을 받고 일이나 앉아, 국방의 임무를 띠고 일선으로 떠나게 된 서익(徐益)에게 육조 방략(六條方略)을 가르쳐주었을 정도의 애국자였다.
율곡은 벼슬자리를 기피하고 조용히 숨어살기를 좋아한 그런 선비는 아니다. 그는 고관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여러 요직을 두루 맡았다. 그러나 그가 관직에 오른 것은 그 자리를 탐내서가 아니라 경륜을 살려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당장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후세를 일깨울 만한 불후에 저술을 남기는 편이 학자의 본분이라고 밑은 퇴계와는 대조적으로, 율곡은 경세 제민(經世濟民)의 경륜을 실천함으로써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태평하게 함이 학자의 급선무라고 믿었던 것이다.
율곡은 고관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몸차림이 간소하고 처신이 겸손하였다. 그는 언행의 표리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유리알처럼 투명한 마음가짐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도 율곡은 참을성 있게 그들을 대했으며, 밤이 깊어서 저녁 식사가 늦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위정자는 민심의 동향을 파악해야 하고 민심의 동향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야 한다는 것이 율곡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율곡에게는 가난한 친척이 많았다. 친척들의 궁핍을 외면하기 어려운 것이 당시의 인심이었으며, 율곡은 가난한 친척들을 성심껏 돌보았다. 그리하여 집에 양식이 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듣고 재녕(載寧) 군수인 친구 최립(崔 )이 율곡에게 쌀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율곡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군수가 보낸 쌀은 최립 개인의 것이 아니라 관가의 물건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관 대작의 자리를 두루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집에는 아무 재산도 거의 없었다. 수의(壽衣)의 준비조차 없어서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것을 마련해야 했을 정도로 가난하였다. 그 당시가 탐관오리들이 세도를 부리며 재물을 긁어모았던 부패의 시대였음을 생각할 때, 율곡의 청렴결백이 성현의 경지에 가까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율곡은 앞뒤가 꽉 막힌 골샌님은 결코 아니었다. 천성이 활달하게 트인 그는 정감이 풍부하고 풍류도 아는 멋있는 선비였다. 그가 멋있는 남자였음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시인이기도 한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득남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을 때, 곱게 단장한 기생들도 불렀다. 근엄하고 강직한 성품의 우계(宇溪) 성혼(成渾)이 "오늘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닌가?"하고 정철에게 물었다. 이 때 옆에 있던 율곡이 웃으며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음이 또한 도(道)라" 하고 대신 대답하였다. 이 멋있는 한마디에 성혼도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율곡이 풍류를 알면서도 끝내 검은 물에 검어지지 않은 선비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유지(柳枝)에 관한 일화가 있다. 유지는 본래 양반의 가정에 태어났으나 집안이 몰락하여 기생이 된 여자였다. 재색을 겸비한 유지는 율곡을 깊이 사모하였고, 율곡도 유지를 귀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로서의 몸가짐을 허물어뜨린 적은 없었다. 유지로서는 율곡의 그러한 태도에 아쉬움을 느꼈고, 어느 날 전송을 하고 돌아가다 말고 발길을 돌려서 밤중에 율곡의 숙소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의 당혹스러운 심정을 율곡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문을 닫자 하니 인정을 상할 것이요, 같이 자자 하니 의리를 해칠 것이다.
황희와 조광조 그리고 이황과 이이는 각각 개성(個性)을 달리하는 선비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수신(修身)과 제가(濟家) 그리고 치국(治國) 등 인륜(人倫)의 문제로부터 출발했으며 주로 유학의 경전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 그들은 기회가 적절하면 관직에 나아가서 국왕을 보필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이 학자의 도리라고 믿었다. 그런 뜻에서 그들은 모두 정통적 유학지사(儒學之士)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조의 선비들 가운데는 그들과 색채가 다른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 한 예로서 우리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화담(1489∼1546)은 어려서부터 자연 현상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인륜 즉 인간관계 또는 선악의 문제를 주된 관심사로 삼은 것과는 달리, 화담은 어릴 때부터 자연현상에 대하여 사색하는 버릇이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나물을 캐러 들에 나갔을 때, 봄철에 땅의 기운이 높아짐을 따라서 종달새가 점차 높게 날아오른다는 것을 발견하고 땅기운과 종달새의 비상(飛上)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골돌히 생각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리고 부채를 부치면 바람이 생기는 까닭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따진 사색을 시로 표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테면 자연철학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독창적 사상가였다는 점에 서화담의 특색이 있다.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과 탐구가 화담을 자연과학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아직 실험적 방법으로 사물의 현상과 변화의 원인을 탐구하는 서구의 과학적 연구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이전이어서 화담은 계절의 변화, 삶과 죽음 등의 자연 현상을 음(陰)과 양(陽)의 교체 또는 기(氣)의 집산이라는 유학적 개념을 통하여 구명했던 까닭에, 그도 역시 유학자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일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원리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등의 유고를 남겼고 또 여러 제자를 양성한 화담은 사후에 우의정의 벼슬을 추증받기도 했으나, 한평생을 초야에 뭍혀서 보낸 색다른 조선조 거유(巨儒)의 한 사람이다.
{우리의 선비는 이렇게 살았다}의 저자 최근덕(崔根德)은 그 책 제2장에서 조선조의 대표적 신비 29명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그들 선비 각자의 특색을 "정암 조광조의 이상과 현실", "율곡의 나라 걱정 세상 걱정"등으로 표현한 가운데, 화담에 관해서는 "화담 서경덕의 청빈과 풍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화담의 가장 큰 특색을 청빈(淸貧)과 풍류(風流)라고 짚은 것이다.
조선조 시대의 대표적 선비로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 대다수가 청빈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화담의 청빈을 부각시킨 것은 그의 가난함이 다른 선비들의 가난함보다도 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화담은 본래 매우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 지방에서 양반 행세를 하는 가문이었으나 남의 토지를 빌려서 소작농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토관직(土官職)에 해당하는 하위의 공직을 맡은 적이 있으나, 봉록은 거의 없는 말단직이었다. 소년시설의 경덕이 변변한 스승의 지도도 받지 못하고 거의 독학으로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애쓴 정황을 상상할 수 있다.
극빈의 처지에 놓이면 호구지책을 위해서도 벼슬길을 엿보는 것이 양반의 일반적 심리라 하겠으나, 화담은 끝내 관직을 외면하였다. 그의 학덕(學德)이 알려져서 31세 되던 해에 조광조에 의하여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된 적도 있다. 120명 추천된 젊은이들 가운데 수석(首席)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하니, 화담이 마음만 먹으면 벼슬도 하고 가난도 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그러나 그는 하려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다른 선비들의 청빈은 청백리(淸白吏)로서의 청빈이었으나, 화담의 경우는 백수(白首)로서의 가난이었던 것이다.
화담은 천성이 자연을 사랑하는 자유인이었다. 그에게는 '청빈'이라는 말보다도 '안빈난도'(安貧樂道)가 더욱 어울린다. 그는 아름다운 산수를 만나면 곧 그곳에 동화하여 속세의 시름을 잊었다. 남과 다투어야 하는 부귀의 길보다는 아무도 가로막는 이 없는 산수와 달과 바람을 벗삼아 가며 시정(詩情)속에 잠기는 편이 그로서는 훨씬 멋있고 뜻있는 삶이었다. 대부분의 조선조 선비들이 풍류를 즐긴 가운데서도 특히 화담의 풍류를 대서(大書)로 특필한 최근덕의 뜻에 공감을 느끼는 까닭이다.
명기 황진이(黃眞伊)와의 연문에 관한 전설도 화담의 풍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돈도 지위도 없는 초라한 선비였을 화담에게 재색과 학예(學藝)를 겸비한 황진이가 그토록 강하게 끌렸다면, 필시 화담에게 그만한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화담의 그 매력의 근원을 화담의 멋과 풍류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퇴계나 율곡과 같은 조선조의 전형적 선비들과 색채를 달리한 선비를 한 사람 더 거론하기로 한다면, 아마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연암이 특히 우리의 조목을 끄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가 서빈들의 계급적 기반인 양반(兩班)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적 태도를 보였으며, 비록 소설의 형식을 빌리기는 했으나 선비다운 선비가 지켜야 할 참모습에 대한 견해를 간접적으로나마 제시한 바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양반전}의 큰줄거리를 짧게 요약한다면, 양반 즉, 사족(士族)에 대한 대담한 '비판과 공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양반들의 생활에 대한 부분적인 비판이라기보다도 그들이 금조옥과(金條玉科)처럼 신봉하고 있는 생활철학 전체에 대한 비판이다. 연암은 서민이나 천민 계급의 출신이 아니요, 서족 출신도 아니다. 비록 집안이 매우 가난하기는 했으나, 그의 가문에는 선대에 부마(駙馬)가 두 사람 있었고, 그의 조상들은 대를 이어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의 집안에는 박세채(朴世彩)(1632∼1695)와 박필주(朴弼周, 1665∼1748) 등 저명한 유학자들이 있었고, 연암 자신도 어려서부터 유학 공부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사회에 대하여 투철한 부정적 시각을 가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연암은 {양반전}에서 글잃기만 좋아하고 생활력이 전혀 없는 정선고을 어느 양반 한 사람의 모습을 희화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한 사람의 양반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양반'으로 불리는 사람들 전체의 생활태도를 비난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연암은 허례와 허식에 사로잡혀 있는 양반들의 일상생활을 꼬집었으며, 생산적인 노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글줄이나 읽은 것을 밑천으로 삼고 높은 지위를 누리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행패를 질타하였다.
양반에 대한 연암의 공격은 그의 2기 소설 {호질}(虎叱)에서도 계속된다. 연암은 이 소설에서 대왕(大王) 호랑이의 입을 빌어서 양반들의 이론적 기반인 유학(儒學) 사상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대체 음양(陰陽)이란 무엇인가. 낮과 밤을 말하는 것이고,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 것인데,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천지의 원리를 깨달은 척한단 말이야.……오행(五行)이나 육기(六氣)라는 것은 입김과 같은 거야. 불면 꺼져 없어져 버려.…… 그들이 충효(忠孝)라고 해서 들이마시고 있는 물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공자와 맹자가 만들어 놓은 실로 해괴하기 짝이없는 것인데, 애당초 공자나 맹자는 벼슬을 하지 못해서 불만이 대단했던 야심가야.…… 나중에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충효를 외치며 인류를 비굴한 노예로 묶어놓고, 거기에서 이득을 보고 자신들의 부귀와 영화를 보려 한 단 말이야.……"
호랑이의 입을 빌어서 유학 사상을 비판한 것이므로 자연히 그 수준이 낮고 내용이 거칠 수밖에 없지만, 연암은 술주정을 빙자하여 바른말을 하는 수법으로 유학의 주요 개념을 꼬집고 있다. 요컨대, 연암은 유학자들이 만고의 진리를 간직한 보고처럼 숭상하는 성리학 내지 유교의 가르침의 취약한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비판의 근저에는 그렇듯한 언어의 성찬(盛饌)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생산적인 학문이 더 중요하다는 실학자(實學者)로서의 시각이 깔려 있음을 본다.
{호질}에 등장하는 북곽(北郭) 선생은 학문이 깊고 덕이 높은 학자로서 온 고장의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그의 이름은 전국에 뻗혀 공맹의 제자간에 날리고 유림에 빛나는" 인물이었다. {호질}에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은 '동리자'(東里子)라는 과부다. 동리자는 재색을 겸비한 매력적인 여자였을 분 아니라, 뭇 남자들의 유혹과 청혼의 손길을 단호하게 물리친 열녀로서 칭송이 자자한 요조숙녀였다. 동리자는 북곽선생과 함께 고장의 태양이요 자랑거리였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왔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 학덕이 높은 군자요 절개가 궅은 요조숙녀일 뿐, 속을 알고 보면 그들은 가증스러운 위선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호질}을 저술한 연암의 동기였다. 겉으로 고매한 인격을 가장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이른바 '선비'들 가운데 표리가 부동한 위선자가 많다는 것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그 폭로의 구체적 내용은 북곽선생이 추잡한 여성 관계를 남몰래 가졌다는 것인데, 그 추행(醜行)의 상대를 요조숙녀로 알려진 명문 출신의 과부로 설정한 것은 양반 계급을 싸잡아서 비난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5형제의 개구쟁이 아들을 두었을 뿐 아니라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있던 동리자의 집으로 북곽선생이 남몰래 침입한다는 것은 내외의 예법이 엄했던 그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북곽선생의 외도 상대를 명문대가의 여성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불륜의 현장을 5형제 개구쟁이 아이들에게 발각된 북곽선생은 담을 뛰어넘어서 산속으로 다라났다. 그는 산중에서 큰 범을 만나게 되었고, 바위처럼 거대한 범 앞에서 무릅을 꿇고 그는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범은 북곽선생의 사죄(謝罪)를 가로막고 큰 소리로 꾸짓었다.
"이놈! 천하의 악당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선비놈은 듣거라!……네놈은 덕을 자랑하고 학문을 자랑하며 백성을 속이고 천하를 속여 오는 놈이다.……겉으로는 결백과 미덕을 자랑하며, 속으로는 어떠한 죄악도 서슴없이 해치우는 놈들이 너희들이 아닌가.……너희들은 너희 동족을 속이고 지배해 왔다.……
여기서 연암은 호랑이의 입을 빌어서 북곽선생을 질타하고 있거니와, 이 질타는 북곽선생의 외도만을 꾸짖은 것이 아니고, 북곽선생 한 개인만을 꾸짖은 것도 아니다. 위선이 가득찬 '선비답지 못한 선비들'을 한데 묶어서 꾸짓고 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양반전}과 {호질}이 선비 답지 못한 선비들의 비행과 비리(非理)를 폭로하고 비판하기 위한 의도로 저술한 것이라면, 연암의 {허생}(許生)은 참된 선비가 지켜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깔린 저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생}은 연암의 다른 소설들보다도 그 문학적 가치가 한층 돋보이는 수작(秀作)으로 평가되거니와,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 연암의 예술적 동기는 '선비 다운 선비'의 모습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데는 도리어 걸림돌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바꾸어 말하면, 직설적 서술보다도 간접적 허구로써 선비의 길을 밝히는 방법을 택했으므로, 그의 주장은 다분히 암시적이다.
{양반전} 가운데 문벌 없는 부자가 가난한 양반으로부터 '양반'을 돈으로 사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양반 매매를 증명하는 문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본디 양반은 여러 말로 부르노니, 이를테면 글만 읽는 양반은 선비라 하고, 정사(政事)에 관여하는 양반은 대부(大夫)라 하고, 덕이 높은 양반은 군자(君子)라 하느니라" {허생}의 주인공 허생(許生)은 저 문서에서 말한 좁은 의미의 '선비'에 해당한다.
허생은 남산 밑에 있는 초라한 오막살이 초가집에 사는 가난한 선비다. 그는 책읽기로 낮과 밤을 보내되 과거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아내의 바느질품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할 형편이므로 안 주인의 불평과 투정이 날로 심해졌다. 아내의 성화를 견디지 못한 허생은 장사라도 해서 가장으로서의 체면을 세우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장안의 갑부로 알려진 변모(卞某)의 집을 찾아갔다. 장사 밑천을 빌리기 위해서다.
사람을 볼 줄 아는 변 부자는 여러말 하지 않고 거금 만 냥을 선뜻 빌려주었다. 허생은 그 돈을 가지고 당시 기호(畿湖)의 요지였던 안성(安城)으로 갔고, 그곳에서 대추와 밤 그리고 그 밖에 제수에 쓰이는 과일을 있는대로 모두 사모았다. 서양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Thales)가 올리브와 올리브 기름틀을 모두 사 모았다가 적절한 시기에 비싸게 팔아서 큰 돈을 벌었듯이, 허생도 독점한 과일을 비싸게 되팔아서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내다본 것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제례(祭禮)를 중요시한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수 용품만은 안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허생의 예상이 적중하여, 그의 첫번째 장사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허생은 두번째 장사에서도 성공하고 세번째 장사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가지고 그는 제주도와 일본 사이에 있는 어느 섬으로 건너갔다. 그 섬에는 포졸들에게 쫓겨서 도망쳐 온 도적떼가 숨어서 살고 있었다. 1000명에 달하는 도적떼에게 허생은 충분한 돈을 나누어주어서, 그들이 농사를 짓고 양민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그 섬을 떠날 때 은전 오십만 냥을 바다속에 던져버렸다. 필요 이상의 많은 돈은 재앙의 근원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육지로 돌아온 뒤에도 허생은 빈민들에게 많은 돈을 나누어 주었다. 한양에 돌아왔을 때 그에게는 아직도 10만 냥이 넘는 은전이 남아 있엇다. 허생은 그 10만 냥을 기지고 변 부자를 찾아갔다. 변 부자는 그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없다며 극구 사양했지만, 허생은 은전을 남겨두고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남산 밑에 있는 옛날 오막살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그는 다시 책읽기에 몰두하며 두문불출하였다.
변 부자는 수소문 끝에 허생의 집을 찾아왔다. 지나치게 많이 받은 은전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허생은 자기에게는 거액의 돈이 필요하지 않다며 받지 않았고, 다만 기본생활을 위해서 요구되는 양식과 옷을 보태준다면 그것은 받겠다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그 이후로 허생과 변부자는 가까운 친구가 되어 가끔 술자리도 함께하였다.
어느 날 변씨는 허생에게 숨어서 살지 말고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권고한 일이 있다. 그때 허생은 벼슬에 대한 뜻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옛날에도 깨끗한 선비로서 초야에 뭍혀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한다. 그 깨끗한 선비로서 유형원(柳馨遠)과 조성기(趙聖期) 같은 실재 인물을 거명(擧名)하기도 하였다. 변 부자는 또 자신과 사이가 가까운 당시의 권신 이완(李浣)으로 하여금 허생의 초가집을 삼고초려하여 벼슬길로 끌어내도록 시도하기도 했으나, 허생은 도리어 당시의 사대부들을 비난하며 끝까지 사양하였다.
위에서 간추린 {허생}의 개요를 통하여 우리는 연암이 머릿속에 그린 참 선비의 모습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선비다운 선비는 첫째로 글읽기를 좋아하되 과거와 벼슬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는다. 둘째로 선비도 필요할 때는 실업에 종사할 수 있으나 재물에 대한 욕심은 버린다. 셋째로 선비는 저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는 소아적(小我的)태도를 넘어서서 어려움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깊은 배려를 갖는다. 넷째로 선비는 금력 또는 권력 앞에서 비굴하지 않다. 다섯째로 선비는 신의를 지킨다. 여섯째로 선비는 지조(志操)가 강하다.
연암 박지원 자신도 그의 소설에서 암시한 선비에 가까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암은 명문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에 접할 기회가 많았으나 과거와 벼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소설의 주인공 허생과 같이 가난한 살림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의 주장을 실천에 옮겨 농사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암은 현실과의 타협을 철저하게 거부한 완벽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50세에 이르러 선공감역(繕工監役)이라는 음관(蔭官)인 미관말직을 받아들였고, 말년에는 안의현감(安義縣監)의 자리에까지 올라같다. 허생처럼 벼슬길을 철저하게 외면하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안의현감의 자리에 5년 동안 머물면서 연암은 경제적 정신적 안정을 얻었고, 고을 수령으로서 정성을 다하여 직분에 충실하였다. 한 해는 흉년이 들어 굶줄이는 백성이 늘어나자, 그는 관아 뜰에 솥을 걸어놓고 죽을 쑤어서 그들에게 베풀었다. 이 때 현감 연암은 죽을 나누어주는 자리를 마련했거니와, 남녀와 장유(長幼)의 구별을 따라서 나누어 앉게 했을 분 아니라, 사족(士族)과 서민의 자리도 따로따로 마련하였다. 젊었을 때 신분사회의 계급적 차별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연암으로서도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타협한 처사라 하겠다.
Ⅲ. 조선조의 선비와 {논어}속의 군자
조선조 선비들의 기본적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양반 가문의 출신이며 유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이다. 양반이 아닌 사람은 설령 사서와 삼경을 읽었더라도 '선비'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비록 양반 가문의 출신이라도 일자 무식이라면 선비 축에 들 수 없었다. 다만 현대의 한국인 식자층에서 칭송의 뜻으로 '선비'를 말할 때, 어떤 사람이 양반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 또는 그가 유학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문벌이나 학식보다도 조선조 시대의 일부 인사들이 보여준 실천적 생활태도와 그들의 덕성(德性)을 염두에 두고 '선비' 또는 '선비정신'에 대하여 일종의 향수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뿐만 아니라 조선조 당시에도 '선비'라는 이름으로 존경을 받은 사람들은 문벌이나 학식보다도 오히려 그들의 남다른 사람됨과 고결한 실천생활이 높이 평가된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조선조의 선비들로 하여금 높은 평가를 받게한 그 덕성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을까?
고병익(高柄翊)은 선비다운 선비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관하여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선비는 첫째로 명분(名分)을 존중해야 하고, 둘째로 지나친 물욕을 자제해야 하며, 셋째로 풍류(風流)를 즐기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명분을 존중한다 함은 유교의 원리와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음에 물욕을 자제한다 함은 재물에 대한 탐욕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풍류를 즐긴다 함은 음악과 문학 또는 서화(書畵) 등에 대하여 일가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조 시대의 선비들은 대체로 유학의 경전(經典)등의 원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윤리의 원칙을 관념적으로 알고 입으로 말하기는 쉬우나 실천행동으로써 그것을 지키기는 어렵다. 겉으로는 군자연(君子然)하면서 속으로는 못된 짓을 한 위선자는 조선조 시대에도 많았다. 연암이 {호질}을 통하여 실랄하게 비판한 것도 그러한 위선자들이었다. 언행이 일치할 때, 비로소 참된 '선비'라고 말할 수 있다. '명분을 존중한다'는 말은 {논어}의 "군자는 말만 앞서고 행동이 따르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구절과 무관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앞 절(節)에서 예시한 조선조의 대표적 선비들 가운데 부(富)를 누린 사람은 없었다. 황희와 이황 그리고 이이 등은 고관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니, 만약 재물에 욕심을 부렸다면 부유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들은 예외없이 청빈(淸貧)의 길을 택하였다. 우리가 앞에서 거론하지 않은 선비들도 세인의 칭송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안빈낙도의 길을 걸었다. 유교의 스승들은 금욕주의를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조선조의 선비들이 금욕의 길을 택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당시의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깨끗하면서 부자 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도 가난 그 자체를 찬양하지는 않았다. 다만 도(道)를 어기고 얻은 부귀를 경계했을 뿐이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 보이는 공자의 다음 말씀은 이 점을 분명히 밝혀준다. "부와 귀는 사람들이 탐내는 바이나, 정도(正道)로써 얻은 것이 아니면 누리지 말아야 한다. 빈과 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나 정도를 어기고 그것을 떠나서는 안된다. 군자가 인(仁)을 버리면 어떻게 명예를 이룰 수 있겠는가?"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것도 좋다. 그러나 가난하면서 도(道)를 즐기고 부유하면서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이 문답으로 보더라도 공자가 부유한 생활 자체를 배격하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다만 그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적극적으로 권장했을 뿐이다.
부(富)에 대한 태도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것은 귀(貴) 즉 관직에 대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조 선비들이 귀를 대한 태도는 부를 대한 태도보다는 비교적 다양한 편이다. 조선조의 선비다운 선비들은 거의 예외없이 부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를 보였으나, 귀에 대해서는 긍정적 태도를 취한 사람들과 부정적 태도를 취한 사람들이 두 갈래도 나뉘어지고 있음을 본다. 유교의 기본정신에 따르면, 선비는 마땅히 국가와 사회에 대하여 적극적 관심을 가져야 하고, 관직에 나아가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실제로도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과거시험을 거쳐서 관직에 오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조선조의 선비들은 대다수가 관직에 대하여 긍정적 태도를 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언제나 반드시 공정하게 운영되지 않았으며, 관직의 승진에도 비리(非理)가 개입하는 사례가 많았으므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청백리(淸白吏)의 길을 벗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선비다운 선비들 가운데는 귀와 직결된 벼슬길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를 취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된 선비는 벼슬길을 멀리해야 한다는 관념까지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참된 선비로서 존경을 받은 조선조의 선비들이 관직에 대하여 취한 태도에는 상당한 개인차가 있었다. 황희와 조광조가 그랬듯이, 학문의 길에서 업적을 남기는 일보다도 국가의 현실을 바로잡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적극적 의욕을 가지고 관직에 임한 선비들도 있었다. 과거와 관직을 전적으로 기피하지는 않았으며 상황이 요구하면 관직의 기회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보다는 학문의 길에서 후세에 남을 업적을 쌓는 편이 자기에게는 더욱 중요하라고 믿으며 초야에 묻히기를 선호한 선비들도 있었다. 퇴계 이황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학문의 길과 치국(治國)의 길이 모두 중요하다는 판단을 따라서 두 마리의 토끼를 추구한 선비들도 있었다. 율곡 이이는 타고난 천재를 살려서 두 가지 길 모두에서 큰 업적을 남긴 선비의 대표적 인물이라 하겠다. 과거와 관직에 대하여 더욱 심하게 부정적 태도를 취한 선비들도 있었다. 자연 속에 묻힌 유유자적한 삶 가운데서 풍류를 즐기고자 벼슬길을 한사코 사양한 서경덕의 길을 따른 사람들도 있었고, 벼슬길은 자칫하면 부정과 부패의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는 경계심에서 사대부(士大夫)의 영화를 외면한 박지원과 같은 길을 걸은 선비들도 있었다.
유교사상은 본래 삶을 사랑하고 현세를 긍정하는 인생관을 바탕으로 삼고 형성되었다. 그리고 "개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을 가진 우리 민족은 현세에서의 즐거움을 소중히 생각하는 낙천적 기질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가난 속에서 즐거움을 갖는 삶의 지혜를 터득할 필요를 안고 살았다. 그리고 가난 속에서도 즐길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선비들은 풍류(風流)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
풍류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마음의 여유이다. 마음만 여우로우면 우리 주위에는 즐거움이 산재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풍토가 아름다우므로 뒷산에도 즐거움이 있고 앞시내에도 즐거움이 있다. 산새의 울음소리도 즐겁고 건너 마을의 살구꽃을 바로보는 것도 즐겁다. 산수와 자연은 옛 선비들을 위한 풍류의 보고(寶庫)였다. 친구와 자연 속에 마주않아서 시를 읊으며 주고 받던 옛 선비들의 여유로움은 풍류 그 자체였다. 동산 언덕 또는 정자나무 아래 홀로 앉아서 거문고를 뜯거나 피리를 부는 것도 풍류요,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 또는 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멋스러운 풍류의 시간이다.
마음의 여유로움은 마음의 따뜻함에서 오고 마음의 따뜻함은 사랑에서 온다. 그러므로 풍류는 사랑의 심정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다. 자연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은 풍류를 위한 또하나의 조건이다. 그러나 풍류의 조건인 사랑은 욕심부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사랑이다. 욕심과 집착이 강하면 마음의 여유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풍류 이야기 가운데는 가끔 기녀와의 어울림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 어울림이 욕심과 집착으로 인하여 마음의 여유로움을 잃고 도리어 추하다는 느낌을 줄 때, 우리는 그것을 풍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경덕과 황진이의 어울림 또는 이이와 유지의 일화를 풍류의 사례로 손꼽는 것은 그들의 일화가 욕심과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까지의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조선조 시대의 '선비'와 {논어}에 나타난 '군자'의 개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조선조의 선비들이 거울로 삼고 지향한 것은 {논어}가 실현이 가능한 목표로서 제시한 '군자'였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논어}에는 바람직한 인간상으로서의 '君子'에 관한 언급이 여러 번 보이거니와, 우리는 그 '군자'의 조건과 조선조 시대의 '선비'의 조건이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논어} 제1편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있어서 먼곳으로부터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다움이 아니겠는가?
이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군자는 첫째로 학문의 길을 정진해야 하고, 둘째로 대인관계가 원만해야 하며, 셋째로 세평(世評)에 구애함이 없이 신념을 따라서 초연하게 살야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과 우선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조선조의 선비들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했던 삶의 지침이기도 하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는 "군자는 덕을 생각하는데 소인은 땅(안주할 곳)을 생각한다(君子懷德, 小人懷土)"는 구절이 있고, 또 "군자는 의로움에 밝은데 소인은 이로움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는 구절도 있다. 그리고 위령공(衛靈公) 편에는 "군자는 도를 걱정하되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君子憂道, 不憂貧)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 구절들은 모두 비슷한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공자의 제자들과 조선조의 선비들이 다같이 항상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었다. 요컨대, 선비는 첫째로 도의(道義)의 원칙을 존중해야 하며 둘째로 물질에 대한 욕망을 자제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근원을 우리는 공자가 제시한 '군자'(君子)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음이 명백하다.
군자(君子)와 풍류(風流)를 직접 연결시켜서 언급한 구절을 {논어}가운데서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다만 술이(述而) 편에 보이는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을 지키며, 인(仁)에 의지하고, 예(藝)에 노닐어야 한다"는 공자의 말씀 가운데 마지막 구절인 '예에 노닐다'(游於藝)를 풍류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여도 반드시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오류에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라 함은 육예(六藝) 즉 예(禮, 예법), 악(樂, 음악), 사(射, 궁술), 어(御, 말다루기), 서(書, 글씨쓰기) 그리고 수(數, 수학)를 가리키는 것이며, '예에 노닌다' 함은 '육예를 즐긴다'로 이해하여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음악과 궁술, 말다루기와 서예는 그 자체가 취미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예(禮)와 수(數)도 그것을 즐기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에게는 풍류를 위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조의 선비들이 '군자'를 바람직한 인간상의 거울로 삼았다는 말을 뒷받침하는 또하나의 사실(史實)이 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선비들이 자신들을 '군자'라 하고 그들에게 맞선 훈구파(勳 派)를 소인배(小人輩)로 몰아세운 이른바 '소인과 군자의 변'(小人·君子之辯)이 그것이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소장학자 조광조가 동지들과 힘을 모아서 정치의 대혁신을 도모했을 때 걸림돌이 된 것이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등을 중심으로 삼은 훈구파였거니와, 이때 사림파는 자신들을 '군자'라고 높인 반면, 훈구파에 속한 사람들을 '소인'이라고 깎아내렸던 것이다. '소인배'의 누명을 쓴 훈구파는 당연히 반격에 나섰으며, 그 결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불린 선비들의 수난이 다시 한번 일어났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역사적 불행이다.
조선조의 선비들이 공자가 제시한 '군자'를 선비의 모범으로 삼고 지향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선비'와 '군자'는 그 어감이 다르다. 조선조 500년의 사직을 지킨 공이 군자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며, 현대의 지식인들 가운데 '선비정신'의 몰락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있으나, '군자정신'의 부활을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화제로 삼는 '선비'와 {논어}에 나타난 '군자'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것은 짚고넘어감이 바람직한 흥미로운 물음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이 물음에 대답할 준비가 없다. 다만 문제를 일단 제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서투른 의견을 기록해 두고자 한다.
'선비'라는 말에 이어서 연상되기 쉬운 식물은 대나무(竹)와 소나무(松) 이고 '군자'라는 말에 이어서 연상되기 쉬운 것은 국화와 연꽃이다. '선비'라는 말은 강직한 사람을 연상케 하고 '군자'라는 말을 관후한 사람을 연상케 한다. 대쪽 같이 강직한 군자는 있을 수 없다거나 온화하고 푸근한 선비는 있을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공자가 바람직한 인간상의 모형으로서 제시한 '국자'의 상(像)과 우리가 찬양하는 조선조 선비들의 일반적 그림사이에 다소간 유형(類型)의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조의 '선비'와 공자의 '군자' 사이의 차이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정치 또는 관직에 대하여 그들이 취한 태도이다. 서술의 편의를 위해서 우선 정치 또는 관직에 대하여 군자가 취해야 할 태도로서 공자가 제시한 처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논어} 태백(泰伯)편을 보면, "나라에 도(道)가 행해지는데, 가난하고 천하다면 부그러운 일이고,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귀를 누린다면 그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나라에 정도(正道)가 살아 있어서 질서가 바르게 섰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하여 가난하고 미천하다면, 그것은 부구러운 일이고, 나라에 정도가 행하여지지 않아서 질서가 문란하데도 벼슬길에 올라서 부귀를 누린다면 그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 인용한 구절에 '군자'라는 주어는 보이지 않으나, 같은 구절 첫머리에 "독실한 신념을 가지고 학문을 좋아하며, 목숨을 걸고 정도(正道)를 지키라"는 말이 있으니, 문장 전체로 볼 때 군자가 취할 태도를 가리킨 것임에 틀림이 없다.
{논어} 공아장(公冶長)편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공자가 남용(南容)의 사람됨을 평하여 '나라가 정도에 의하여 다스려질 경우에는 버림을 받지 않고, 나라가 정도(正道)를 상실했을 경우에는 처형(處刑)을 면할 사람' 이라 말하였다. 그리고 그를 자기의 조카사위로 삼았다."김학주(金學主)는 그의 {論語}에서 이 구절에 대하여 간략한 해설을 붙이고 있다. 공자가 남용을 치세(治世)에서나 난세(亂世)에서나 '그런대로 살 수 있을 인물로 보고'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는 내용의 해설이다. 죽은 형의 딸을 맡아서 기르던 공자가 조카사위 후보를 물색했을 때 처자를 보양하기에 문제가 없는가를 고려하여 신중한 선택을 했다는 이 해설에 필자도 공감을 느낀다. 다만 이 해설은 남용을 조카사위로 삼은 공자의 백부로서의 배려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나라가 정도에 의하여 다스려질 경우에는 버림을 받지 않고, 나라가 정도를 상실했을 경우에는 처형을 면한다"는 구절의 근본정신에 초점을 맞춘 해설은 아니라고 본다. '방유도(邦有道)'와 '방무도(邦無道)'의 대구(對句)는 {논어} 헌문(憲問)편에도 나온다. 여기서는 "나라가 정도에 의하여 다스려지면 국록(國祿)을 받을 것이나, 나라가 정도에 의하여 다스려지지 않을 경우에 국록을 받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한 공자의 말씀이 실려있다. 태백(泰伯)편에 나온 말씀과 그 뜻이 다르지 않다. 공자가 같은 뜻의 말씀을 거듭 했고 또 그것이 같은 책에 거듭 실렸다는 것은, "나라에 도(道)가 살아 있을 때는 마땅히 나아가서 국정에 참여하고, 나라가 도를 잃었을 때는 마땅히 물러서서 신명(身命)을 보전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지론이요 근본정신임을 의미한다고 보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근본정신은 '군자'가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처세의 기본원칙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조의 선비들이 정치 또는 관직에 대하여 가졌던 태도는 {논어}의 군자들의 경우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나라에 정도(正道)가 살아있을 경우에 선비들이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올바른 태도와 군자들이 취해야 한다고 알려졌던 태도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나라에 정도가 살아있을 경우에는 마땋히 벼슬길에 올라서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인 동시에 군자가 항상 명심해야 할 처세의 원칙이었고, 이 점에 대해서는 조선조의 선비들도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라가 정도를 잃었을 경우 즉 난세에 처했을 경우에 조선조의 선비들이 취한 태도는 {논어}의 군자에게 요구된 태도와 크게 다르다. 난세를 당했을 때는 쓸데없이 나서서 공연한 희생을 당하지 말고 차라리 뒤로 물러서서 신명을 보전하라고 공자는 가르쳤으나, 조선조의 선비들은 비록 목숨을 잃고 삼족이 멸문(滅門)의 화를 당할 위험이 있더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이 선비다운 태도라고 믿었던 것이다. '방무도(邦無道)'의 불행한 현실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그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방무도'를 '방유도(邦有道)로 개조하도록 힘쓰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는 적극적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정치 또는 관직에 대한 군자의 태도와 조선조 선비의 태도 가운데 어느편이 더 바람직하냐 하는 문제를 놓고 성급한 단정을 내리기 전에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나라에 도(道)가 있다"느니 "나라에 도가 없다"느니 했을 때, 공자 시대의 중국인들이 처한 현실과 조선조의 우리 조상들이 처한 현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공자가 살았던 고대 중국은 봉건제도 아래 있었고, 제후(諸侯)들의 여러 나라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 여러 제후국은 대개 같은 말을 사용하는 같은 민족의 나라들이었다. 그리고 국민들이 제후국의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크게 어렵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 자신 노(魯)나라에 태어났지만, 제자들을 거느리고 위(衛), 진(陳), 섭(葉)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노나라만이 그의 '나라'는 아니었고 들어가서 머무는 곳이 그의 '나라'(邦)에 해당했다.
그러나 조선조의 선비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민족의 나라는 '조선(朝鮮)' 하나밖에 없었다. 나라에 도(道)가 있건 없건 그들이 살 수 있는 나라는 조선 하나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선비들의 처지에서는 조선나라에 도가 없으면 조선을 도가 있는 나라로 개혁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마땅했고, 조선 아닌 다른 나라로 옮겨가서 치국(治國)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공자 시대의 유학도의 경우는 '나라'를 선택할 수 있었으므로, 그들이 머물고 있는 나라가 무도(無道)의 나라라고 보았을 때, 그 무도를 유도(有道)로 고치기 위하여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필자는 앞에서 인용한 {논어} 태백(泰伯)편 제13절의 앞부분에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그 앞부분에서 공자는 "독실한 신념으로 학문을 좋아하며, 목숨을 걸고 옳은길(善道)을 지켜라.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것이며(危邦不入),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말 것이다(亂邦不居)……"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라'의 사정이 고대의 중국과 크게 달랐으므로 조선조의 선비들이 '군자'에 관한 공자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지키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조의 많은 선비들이 나라를 바로잡으려다가 혹은 처형을 당하고 혹은 유배형을 당했다. 조선조 선비들의 이 선비 정신을 구한말에도 계속 이어졌고, 수많은 지사들이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에 임하였다. 안창호 선생의 생애가 그것이고,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순국(殉國)이 그것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여러 망명 지사들의 생애를 일관한 것 역시 선비 정신이었다. 국민의 대다수가 참여한 기미년 삼일운동 역시 조선조의 선비 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볼 때, 조선조의 선비들이 {논어}에 보이는 '군자'의 길을 다소 벗어난 것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불의(不義)의 무리는 대개 강한 힘을 가졌다. 강력한 불의의 무리와 싸우자면 항상 긴장해야 하고 신경에 날을 세워야 한다. 황희와 이황 그리고 이이와 같이 부드럽고 관후한 인상을 주는 선비들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선비'라는 말이 날카롭고 강직한 인품을 연상케 하는 것은 대부분의 조선조 선비들이 불의와 맞서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조선조의 선비들 가운데 만사에 초연한 대인(大人)의 풍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강직함이 지나쳐서 편협하고 심지어 옹졸하기까지 하여 이설(異說)을 용납하지 않은 폐단이 있었음은 옥의 티라 할 것이다. 이러한 편협은 주자학(朱子學) 이외에는 모든 학설이나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한 조선조의 국교(國敎) 이념 속에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불교는 물론이요 노장사상과 양명학(陽明學)까지 이단으로서 배척한 획일주의는 조선조의 선비들을 좁은 울타리 속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학을 학설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거역할 수 없는 종교로서 받아들인 조선조의 경직성을 조선조 500여 년을 이끌어 온 양반들의 정수(精髓)에 해당하는 선비들을 좁은 울타리 속에 가두었고, 그것은 조선조에 일어난 여러 가지 역사적 불행으로 이어졌다. 조선조의 유림(儒林)이 훈구파(勳 派), 절의파(節義派), 사림파(士林派), 청담파(淸談派) 등으로 분열하여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의 사화(士禍)가 일어났고, 그 불행을 막지 못한 책임이 선비들에게는 없다고 보기 어렵다. 선조(宣祖) 때의 동서 분당(分黨)을 계기로 삼고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의 당파로 나뉘어져 340년간 계속한 사색당쟁(四色黨爭)을 막지 못한 책임이 선비들에게는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서족을 차별하여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許筠)으로 하여금 혁명을 기도하다 형륙을 당하게 한 불상사에 대하여 선비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보기 어려우며, {동의보감}을 저술한 명의 허준(許浚)을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켰을 때 서족 출신에게 당상관이 당치않다고 상소한 사람들 가운데 선비는 들어있지 않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조선조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선비들의 사생활을 위하여 크게 기여한 것이 그들의 풍류였다. 만약 그들에게 풍류가 없었더라면 선비들의 생활은 자못 삭막했을 것이다. 풍류가 있었기에 그들은 때때로 긴장을 풀고 여백을 즐기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조 선비들에게 경직성에 연유하는 한계 또는 몇가지 결점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찬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첫째로 그들의 경직성이 개개인의 힘으로써는 극복하기 어려운 시대적 문제상황의 제약에서 왔다고 보기 때문이고, 둘째로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며, 셋째로 현대에 우리 한국이 처한 문제상황에서, 오늘의 한국 지식인들이 조선조의 선비들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Ⅳ. 조선조의 선비와 현대 한국의 지식사회
조선조의 선비들이 생활의 신조로 삼았고 선비다운 선비들의 대부분이 실천에 옮겼던 것으로 알려진 삶의 원칙을 우리는 대략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1)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도리(道理)가 있다. 그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정성을 다한다.
(2) 사사로운 이익보다도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한다.
(3)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도 부귀를 누릴 수 있다면, 굳이 그것을 희피할 까닭은 없으나, 현실적으로 불의(不義)를 범하지 않고 부귀를 누리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러므로 지난친 물욕과 권세욕을 자제하고 깨끗하게 살기를 도모한다.
(4)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서 싸운다.
(5) 자연 또는 예술을 즐기는 풍류(風流)로써 마음의 여유를 갖도록 노력한다.
조선조의 선비들 대다수가 위에서 열거한 삶의 신조를 충실하게 실천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퇴계와 율곡 같은 큰 선비들은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원칙을 모두 실천했다 하여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며, 다섯 가지 원칙들 가운데 적어도 네 가지 정도를 실천한 선비들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리고 그러한 선비들의 깨끗하고 꼿꼿한 정신이 조선조 500여 년을 지탱한 버팀목 구실을 했다고 보는 것이 그들에 대한 우리들의 소박한 평가이다.
위에서 열거한 다섯 가지 원칙은 조선조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사회를 지탱하기에 큰 힘이 될 것이며, 그러한 덕성(德性)을 갖춘 사람들은 어떠한 시대의 어떠한 사회에서나 행복에 가까운 삶을 누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조선조의 우리 선비들이 가졌던 생활철학은 현대를 사는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도 소중한 교훈을 간직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 가운데는 나의 이 믿음에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 나의 믿음은 한갓 시대착오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믿음은 단순한 느낌이나 직관(直觀)에 근거를 둔 맹목적 고집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오랜 체험과 거듭된 사색의 결과로서 얻은 신념이다. 그 체험과 사색의 과정을 중언부언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요점만을 말한다면, 소유 또는 향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생활태도 내지 가치관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파괴와 개인의 불행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으며, 그 대안의 하나로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옛날 우리 선비들의 생활태도 내지 생활철학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뭐니뭐니 해도 돈과 향락이 최고라는 생각이 꽉들어찬 가치풍토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생활인에게 그 가치풍토와 조화되기 어려운 옛날 선비들의 생활태도를 권고한다는 것은 무모함에 가가울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옛날 선비들과 가장 가가운 거리에 위치한다고 생각되는 오늘의 지식인들에게 우선 가치관의 전환을 권고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 일반 생활인에게 호소하는 편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봉건적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생긴 조선조 선비들의 후예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산업사회 또는 정보사회로 일컬어지는 오늘의 한국에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다만 현대의 한국인 가운데서 조선조 선비들과 처지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찾는다면 '지식인 계층'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는 단어도 그 뜻이 다양하게 사용되므로, '선비'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서의 '지식인'의 범위를 어느 정도 밝혀두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선비에 비길 수 있는 지식인의 필수조건으로서 우선 높은 교육수준을 손꼽아야 할 것이다. 비록 대학을 졸업했다 하더라도 머릿속에 들은 것이 적은 사람은 교육수준이 높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며, 공교육의 혜택은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독학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된 사람은 교육수준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선비에 비길 수 있는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둘째 조건으로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을 손꼽아야 할 것이다. 백과사전을 암기할 정도로 아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오로지 자기자신 내지 가족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지식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선비에 비길 수 있는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셋째 조건으로서 수준 높은 교육을 통하여 얻은 지식 또는 사상을 살려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일하는 실천을 손꼽아야 할 것이다. 비록 국가와 사회에 대하여 관심은 있다 하더라도 그 관심을 마음속에만 가두어두고 아무런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가 말하는 지식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조 500여 년을 지킴에 있어서 그 시대의 선비들이 크게 공헌한 바 있다고 본 우리는 오늘의 한국을 위하여 옛날의 선비들이 한 것과 비슷한 구실을 하는 계층이 떠오르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한 구실을 할 수 있는 계층을 한 가지로만 국한해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조선조의 '선비'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지식인'으로 불리는 계층일 것이라고 우리는 보았다.
그리고 그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조건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와 같은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뚜렷한 계층을 형성하고 존재 한다기보다는, 우리가 갈망하는 오늘의 지식인들이 갖추기를 희망하는 조건들을 생각해보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람들이 국가 또는 사회를 위하여 수행해야 할 직분은 그들의 직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국가와 사회를 지키는 일에서 주역을 맡아야 할 사람들을 직업을 따라서 논한다면, 학자와 교육자, 언론인과 종교인,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 법관과 변호사 그리고 의사 등을 손꼽아야 할 것이다. 정부기관이나 기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정책 또는 경영의 원칙을 결정하는 부서를 맡은 사람들은 여기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며, 일정한 직업을 떠나서라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상가가 있다면, 그들도 포함시켜야 마땅할 것이다. 조선조 시대에는 '선비'라면 은연중에 남성을 염두에 두었으나, 오늘의 '지식인'을 말할 때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오늘의 한국 지식인들에게 조선조의 선비들을 본받아서 유교적 덕목을 지켜가며 도학자처럼 처신하기를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지식인들에게 오늘의 사회규범을 지키는 모범적 시민의 앞줄에 서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오늘의 한국 지식인들이 옛날 조선조의 선비들처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능력이 탁월하여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고도 풍요롭게 살 수 있다면, 지식인이라고 해서 그길을 굳이 기피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돈에 대한 욕심이 지나친 것은 지식인으로서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학자가 학문의 연구를 뒤로하고 돈벌이에 유리한 잡문쓰기나 대중강연 따위에 힘을 쏟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소설가가 문학성을 배반하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미술가가 돈벌이에 역점을 두고 작품을 만드는 것은 지식인 답지 않은 처신이라할 것이다. 옛날의 선비들이 그랬듯이 오늘의 지식인들도 국가와 정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할 것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매력에 이끌려서 정치권력에 접근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횡포를 부리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흔히 있는 일이다. 권력층의 횡포를 보고도 일신의 안일을 위하여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그 권력에 아부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횡포를 자행하는 권력 앞에서 굴하지 않고 비판적 자세로 일관하는 용기는 오늘의 지식인들에게 요구되는 미덕 가운데서 특히 중요한 것에 속한다. 풍류(風流)를 즐기는 문제는 사생활의 범주에 속하므로 윤리의 중심문제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에게 풍류를 즐기는 마음의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 또는 어떠한 취미를 즐기느냐 하는 문제는 그 사회의 문화풍토에 직결되므로 결코 지엽적 문제가 아니다.
당위(當爲) 즉 '마땅히 그래야 할 모습'과 실제(實際) 즉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이에는 언제나 상당한 거리가 있다. 오늘의 한국 지식인들의 마땅히 그래야 할 이상적 모습과 그들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이에는 얼마나 먼 거리가 있을까? 오늘의 한국 지식인들이 실제로 보여주고 있는 생활태도의 실상(實相)을 면밀하게 밝혀주는 자료가 없는 까닭에, 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들의 일상적 체험과 대중매체의 보도를 근거로 삼고 개략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우리들의 일상적 관찰에 따르면, 오늘의 한국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생활태도는 한국사회가 그들에게 바라고 있는 생활태도에 크게 못 미친다는 인상이 강하다. 조선조의 선비들과 일제 시대의 지식인들이 궁핍한 가운데서도 지사(志士)로서 자처하며 나라와 겨레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과는 달리, 오늘의 한국 지식인들은 자신들 개인과 가정의 문제에 관심을 국한하는 소시민(小市民)의 기풍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오늘의 한국에도 나라와 겨레의 문제로 노심초사하는 지사풍의 지식인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총인구에 비하여 극히 적은 일부에 불과하며, 이 시대를 좌지우지하는 대중매체는 연예인과 운동선수들의 동정을 부각시키고 정치인들의 활동을 대서특필하기에 바쁜 가닭에 소수의 지사풍 지식인들의 존재는 그늘에 가려서 그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 간혹 지사풍의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대중매체의 각광을 받기도 하나, 많은 경우에 그들은 화려한 말솜씨로 순박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似而非)에 가깝다.
현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권력 또는 금력 앞에서 굴하지 않는 의연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 약자 앞에서 오만하지 않고 강자 앞에서 비굴하지 않은 것이 옛날 선비들의 특히 존경스러운 점이었고, 이 점은 오늘의 지식인들도 마땅히 본받아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지식인들 가운데는 권력의 강자를 대할 때 당당한 자세를 허물고 지나치게 자세를 낮추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능력과 소질에 따라서는 지금까지 맡아온 자리를 떠나서 새로운 일터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원칙으로 말하면, 각자는 오래동안 맡아온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자신과 사회를 위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교수나 언론인들이 장관의 자리나 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를 제의받고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하는 사례를 흔히 본다. 그들이 새로 들어간 자리에서 별로 업적을 내지 못한 선례가 많은 데도 권력의 자리를 고사하는 지식인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러한 변신을 공연히 못마땅 하게 비난하는 것도 속좁은 소견이라 하겠으나, 그 본인 자신을 위해서도 그의 본업을 지켜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낄 경우가 흔히 있다.
조선조 시대의 선비들이 가졌던 장점을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장점의 하나는 그들의 높은 지식수준이고, 그 또하나는 그들의 높은 도덕성이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그 당시로서는 학문을 가장 많이 배우고 닦은 사람들이며, 그들이 공부한 내용이 주로 수신(修身)과 제가(齊家) 그리고 치국(治國)에 관한 것이었으며,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서 특히 인격이 고매한 사람들을 '선비 다운 선비'라고 규정했으므로, 그들은 당연히 도덕성이 높았다. 한편 현대의 지식인은 '지식인'의 정의에 따라서 응당 지식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 학문에서 윤리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은 편이므로, 도덕성도 옛날의 선비들과 비등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현대의 '지식인'이라는 말 가운데 '도덕성이 높다'는 함축은 들어있지 않으나, 사람들은 그들에게 대체로 높은 도덕성을 기대한다. 지식인들 가운데는 그 기대를 배반하는 경우가 많으나, 전체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도덕성이 어느 정도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자나 예술가 또는 종교인 가운데 비행을 범했다는 비난을 받는 사람들이 간혹 보도되기도 하나, 높은 도덕성을 기대하는 까닭에 일반사람들보다는 심한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다.
현대 지식인들 가운데 시민사회의 규범을 파렴치하게 어기는 무법자는 비교적 적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인들에게는 체면의식이 강한 까닭에, 음주운전, 절도행각, 사기와 횡령 따위의 비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적은 편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데는 비교적 인색하다. 예컨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이나 공원 길 위에 떨어진 종이쪽이나 비닐주머니를 줍는 일 따위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지식인들이 많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적 비리를 목격했을 때 또는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발벗고 나서서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방관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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