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토요일에도 내려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세세한 말은 없었지만 내려가서 병원에 계신 할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리겠다는 뜻이다. 대학 졸업반인 막내는 제대를 하고 복학을 했다.
서울에서 제 형과 자취를 한다. 제 형이 취직공부를 위해 새벽같이 도서관으로 달려가면 점심도시락 준비는 물론 집안 청소며 세탁까지도 도맡아 한다. 그뿐이 아니다. 시장 보고 슈퍼마켓을 다니는 일, 공과금 관리까지 모두가 동생의 몫이다. 제 형의 말이다.
군대 가기 전만 해도 막내티를 내더니 군대생활 3년을 마치고 오더니 사람이 달라져도 확 달라졌다. 이런 것을 보면서 군대생활 3년이 완전히 헛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일거수 일투족이 제법 어른스럽다. 매사에 침착하고 꼼꼼한 이런 성격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귀여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아버지는 주위 사람들이 손자가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는 말을 대단히 좋아하신다. 그런 말을 듣는 손자도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막내가 전화를 할 때마다 할아버지의 안부를 빼놓지 않는 것을 봐도 막내의 가슴속을 차지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비중을 알 수 있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막내 마중을 나갔다. 오후 1시가 훨씬 넘어서야 버스가 들어왔다. 버스에서 내린 막내는 씩씩하고 건강하게 보였다. 아직까지도 군대물이 다 빠지지 않았는지 대답도 우렁차고 시원스럽다.
배가 고플 테니 어디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가자고 했다. 막내는 멀리 갈 게 아니라 이 부근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얼른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가자고 한다. 아마 할아버지께서 많이 기다리실 것이라는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막내 손자를 보자 아버지께서는 환한 얼굴을 하신다. 불편하신 몸을 일으켜 손자의 손을 잡고는 밥은 거르지 않고 잘 먹느냐고, 공부는 열심히 하느냐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취직을 할 수 있다고, 취직을 잘해야 장가를 잘 갈 수 있다고 지난 주 토요일에 했던 말씀을 녹음기처럼 또 되풀이하신다.
수없이 듣던 이야기다. 그러나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고 막내는 잘도 장단을 맞춘다. 밥도 꼬박꼬박 잘 먹고 매일 새벽까지 공부를 한다고 할아버지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말한다. 막내는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는지 꿰뚫고 있는 눈치다.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이 할애비는 가난하게 태어나서 삼시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해 키도 작고 학교 문턱도 구경을 못해서 까막눈이고 배운 것이 없어 평생 땅만 파고 살았다고, 손자에게 수도 없이 들려줬던 이야기를 또 한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춰 준다.
할아버지께서는 고생을 하셨지만 정말 훌륭하시다고, 보라고 아버지, 작은아버지들, 고모들 모두 대학까지 잘 가르쳐 주셔서 좋은 직장 잡아 오늘 날 고생하지 않고 다 잘 살지 않느냐고, 그러니 할아버지는 성공한 케이스라고 치켜세워 드린다. 아버지는 그건 그렇단다. 동네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며 은근히 좋아하신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손자의 상봉 제1막이 끝난다.
아버지를 모시고 막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막내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는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양말을 벗기고 옷을 벗긴다. 막내와, 아버지를 부축해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김이 벽에 걸린 거울을 뿌옇게 흐려놓고 욕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손자는 할아버지를 욕조에 앉히고 능숙한 솜씨로 머리를 감겨 드린다.
때수건으로 팔과 다리의 때를 밀고 등을 미는 동안 나는 샤워기를 들고 막내의 손을 따라다니며 아버지의 몸에 물을 뿌렸다.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머리를 감겨 드리며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니 머리를 숙이라고, 칫솔질을 할 때는 혓바닥을 꼼꼼히 닦아야 한다고 어른이 아이에게 이르듯이 말한다. 손자의 말에 고분고분하는 할아버지가 아이스럽다.
1년 전, 아버지께서 다리가 골절되어서 한동안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동네 목욕탕에 가시겠다고 나섰을 때, 그런 몸으로 목욕탕에 가신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며 난감해한 일이 있다. 목욕탕에 모시고 가기는 가야겠는데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궁리를 하고 있는데 마침 막내가 외출을 하고 들어왔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할아버지 모시고 목욕탕에 함께 갈 생각 없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모시고 갔다 오겠다는 말에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그때가 제대를 하고 복학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군대 갔다 온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아버지를 모시고 막내와 함께 간 동네 목욕탕은 남탕이 2층에 있었다. 손자는 목욕탕 입구에서부터 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2층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뒤에서 아버지의 엉덩이를 받쳐주면서 막내가 그렇게 대견스럽고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를 등에 업어본 적이 없다.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변명하지만 생각해보면 왜 없었겠는가? 해마다 돌아오는 어버이날도 있었고, 아버지의 생신도 있었고, 일생에 한 번뿐인 회갑 잔칫날도 있었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기회가 없었다는 군색한 변명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다.
목욕탕 안에 들어서자 막내는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를 둥근 플라스틱 깔판 의자에 앉혀드리고는 온몸에 물을 끼얹은 다음 때를 밀기 시작했다. 나는 한쪽에서 샤워를 하다 말고 이 광경을 보았다. 할아버지의 등을 밀고 있는 손자와 손자에게 등을 맡기고 있는 할아버지.
그것은 때를 미는 모습이 아니고 핏줄과 핏줄이 맞닿아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가 말하면 손자가 듣고, 손자가 여쭈면 할아버지가 대답하고…. 이 광경은 지금까지 내가 본 그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도 슬며시 막내의 뒤에 앉았다. 그러고는 막내의 등을 부드럽게 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등을 맡기고, 손자는 그 아버지에게 등을 맡기고…. 또 돌아앉아서 할아버지는 손자의 등을 밀고, 손자는 그 아버지의 등을 밀고…. 3대가 그려내고 있는 풍경은 이 세상 어느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보다도 더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정성수 /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