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탱이와의 휴전 협정
어릴 적 겪은 판자촌 생활(70)
안희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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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과 큰아버지댁은 한 동안 양봉을 했었다. 하다가 수입이 별볼일 없어서 그만두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큰아버지댁에 갔을 때 큰아버지가 우리보다 더 많은 벌을 키우는 상황이었기에 날아다니는 벌들의 모습이 더 생동감있게 여겨졌고 그런 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여간 정신없이 움직이는 벌들은 아무리 보아도 부지런했다.

그런데 간혹 땅바닥에 떨어진 채 죽어있는 벌들을 볼 수 있었다. 큰집 누나들의 설명에 의하면 왕탱이 짓이라고 한다. 왕탱이는 커다란 벌인데 꿀벌처럼 많지는 않아도 자주 볼 수 있는 벌이었다. 덩치가 상당히 컸는데 기존에 보던 말벌보다도 훨씬 컸으니 그야말로 벌들 세계에서는 거인에 해당했다. 그 왕탱이가 꿀벌을 물어 죽인다는 것이다.

나는 왕텡이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왕텡이가 잔뜩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다는 점과 날아다니는 속도가 무척 굼뜨다는 점 때문이었다. 소 여물을 저어주는 커다랗고 긴 나무 주걱을 들고 있다가 날아가는 왕텡이에게 휘두르는 몇 차례만에 큰 주걱에 맞아 떨어지곤 하는 왕텡이였다.

나는 떨어진 왕탱이의 머리를 몸통에서 분리했다. 그리고 가슴팍에다 머리를 붙었다. 잘려나간 부위에서 흘러나온 끈끈한 액체 때문에 옷에 붙은 채로 꽤 오랫동안 매달려 있었는데 커다란 왕탱이의 머리가 장식물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그 머리를 들어 누나들 머리에나 옷 속에 집어넣으면 기겁을 하곤 했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누나들이 산에 올라가서 무언가(그게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나들 중 한명이 부촉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약을 바르느니 치료를 하느니 난리였다. 사연을 알고 보니 산 속에서 왕탱이 한 마리에게 쏘인 것이었다. 침의 위력이 너무 강해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다행히 누나는 다음날 괜찮아졌다. 왕탱이에게 쏘인 부분은 여전히 부어있는 상태였고 통증도 있었지만 활동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는 나와 왕탱이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나는 더 이상 소 주걱을 든 채 왕탱이를 사냥하여 꿀벌의 복수를 해주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다행히 한번도 쏘이지 않았지만 왕탱이의 침이 그토록 위력적인 줄 내 어찌 알았겠는가?

그렇다고 왕탱이를 무서워해서 왕탱이 날개 소리만 들어도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나이인데 그깟 왕텡이 한 두 마리에 줄행랑을 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나의 태도에 기가 죽었는지 왕탱이도 내게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다른 왕탱이들의 복수를 한다고 덤벼들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도 왕탱이와 나와의 휴전 협정은 이어져오고 있다.

사실 어른이 된 후로는 왕탱이를 본 적이 없다.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멸종을 한 것인지 서울이기에 살 수 없어 산속에만 거하는지 알 수 없지만 배지처럼 달고 다니던 왕탱이의 머리에 대한 추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왕탱이와의 휴전 협정이 깨진다 해도 그 머리를 가슴팍에 붙이는 행동은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생각만큼 멋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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