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향기 따라 주막을 찾아 다닌지 어언 여러해, 마침내 내 맘에 드는 술집 한 곳을 찾아내었다. 수많은 술집 중에 자기 맘에 드는 술집을 찾아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철따라 술집을 전전하며 방랑아닌 방랑을 해야만 했던 나이기에 내 맘에 드는 술집을 찾아낸 순간,오랜 생활 타향살이하다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 곳은 도시 변두리지만 상당히 번화한 곳이였으며, 밤이되면 휘황찬란한 네온불이 반짝거리는 유흥가와 먹거리가 밀집한 곳이였다. 차로에서 백오십보 정도 걸어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는 길목엔 음식점과 카페,술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고,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냄새와 열기는 시장기 든 애주가들에겐 술생각이 절로들게 만든다.
드디어, 주막에 도착하니 문 앞은 온통 대나무 잎사귀로 치장해 놓았으며, 통나무 주막간판에는 "대나무숲" 이라는 옛글로 운치있게 새겨져 문 옆 한켠에 우뚝 서있다. 주막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서자, 홍안의 동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반갑게 나를 맞이하였다. 곳곳에 옛날식 고전등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사방은 모두 대나무 줄기와 잎사귀로 둘러져 있으며, 옛 선인들의 때묻은 고가구며, 기구, 연장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시금털털한 동동주 냄새가 예민한 내 코를 자극하고,언제 틀어놨는지 은은한 가야금산조 소리가 주막안에 울려 퍼졌다. 낯설은 여행지에서 쉴 곳을 찾아낸 안도감 같은걸 느끼면서 통나무 긴의자에 살며시 걸터 앉았다.술집 손님이면 으례 그렇듯, 누가 술접대를 할 것인지 주방 쪽으로 넌지시 시선을 돌려보았다.
이윽고, 중년 여인 한사람이 내게로 다가와 술과 안주를 시키는데,연노랑색 바탕에 나비들이 너울너울 춤추는 수 놓은 한복이 참으로 곱게 느껴졌으며, 가까이 올 때마다 여인의 살속에서 풍기는 백합꽃 향기같은 그윽한 향내는, 조용하고 정숙한 중년 여인의 자태와 잘 어울린 것 같았다.그녀가 살며시 따라주는 술잔속에 나의 마음은 달아 오르고,취기가 더 할수록 그녀에게 내미는 나의 술잔은 그녀를 취하게 만들고 만다. 둘 다 흥취가 최고조에 이르면 중앙 한가운데 비어둔 공간으로 나가, 온몸으로 휘저으며 춤을 추었다."얼시구 좋다. 에헤라 좋구나", 가야금산조 소리는 커져만 가고, 지칠대로 지친 술좌석은 새벽녘까지 갈 때가 한동안 계속 되었다.
술집을 찾아 나무대문을 열자마자, 동자녀석은 하던 일 그만두고 잽싸게 달려나와 전축위의 판들을 거둬내고 내가 좋아하는 가야금과 대금연주 판들을 올려놓는다. 손님은 왕이라던데 정말 왕이 된 기분이었다. 계산대 뒤에 걸어진 안동 하회탈은 계산하는 손님들을 보고 웃고 있는데, 기실, 이 술집을 찾은지 얼마 안되어 내가 여주인에게 선물한 것이다. 얼마후에 시 한 수를 지어 술좌석 옆 벽에 붙여 두었는데, 찾아오는 손님들이 말하기를 "꽤 재미 있으신 분이 지으셨나보다"하니, 과히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이러하기를 이여년 어느날, 휘영청 달도 밝은데 여느때와 같이 터벅터벅 걸어 술집에 당도하니 문은 굳게 닫혀있고 게시문도 없는지라, 할 수 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퍼득 떠오르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 가는데, 집식구들 한테 미안한 마음이 내가슴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나만 즐기자고 가정을 소홀히한 내 죄책감이 그날따라 나의 가슴을 짓누르고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술집 찾는 것을 그만두자" 하고 다짐을 하였건만, 그녀에 대한 미련을 쉽게 그만 둘 수 없었다.
몇 개월 뒤 술집을 찾아가 보니, 그 옛날 대나무숲 우거진 주막은 온데간데 없고 현대식 카페만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소식을 물어 보았으나 알 수가 없고, 지난 몇 년간의 행적들이 주마등같이 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세월 속에 묻혀버린 아련한 추억이지만, 요즘도 가끔 그녀가 생각날 때가 있다.
- 竹 林 之 樂 -
술향기를 따라 주막을 찾아 어언 여러 해
죽림칠현 머무른 곳 대나무숲 당도하니
청풍명월 아래 선남선녀 거닐구나
가까이 가서 보니 홍안동자 양귀비네
어느샌가 나도 몰래 당황제가 되었구나
홍안동자 시중들고 양귀비가 술 따르니
신선놀음 따로 없네 죽림 속에 낙이 있다
일배일배 부일배 ( 一杯 一杯 復一杯 )
이두일배 아일배 ( 李杜 一杯 我一杯 )
☞ 이 시는 "술향기 따라 주막을 찾아"라는 글 속에 그 내용이 들어 있다. 그 당시에는 내가 꼭 당황제가 된 기분이었으며 완전히 술독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 귀절의"마시게나마시게나 많이들 마시게나, 이태백이여 두보여, 나도 한잔 들찌니! " 는 이태백의 싯귀 일부를 차용한 것이다. 이 시를 술집 벽에 붙여 놓고, 술집을 찾는 이의기분을 재미있게 했던 추억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