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들이 사라진 호주의 산으로
2006/07/25 20:42
이동진 조회7755 추천10

소녀들이 사라졌다.

하늘과 땅 사이.

희박한 대기 속으로.

아무 흔적도 없이.

1900년 2월14일의 오후.

행잉록이란 산에 소풍 갔던 길이었다.

호주의 아득한 산과 들판 그리고 고택(古宅).

그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행잉록의 소풍엔 마력 같은 게 있었다.

신비만 남겨두고 설명은 거세한 영화.

실종의 모티브가 그 영화의 전부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강력히 사로잡혔다.

다 보고나니 꼭 촬영지에 가고 싶었다.

기회는 십수년만에 찾아왔다.

호주를 생각하니 그 영화가 떠올랐다.

지도를 샅샅이 뒤졌다.

여러 차례 전화도 걸고 이메일도 썼다.

어서 신비의 공간에 발을 딛고 싶었다.

◆◆◆

호주 남쪽 해안 도시 애들레이드.

공항에서 예약해둔 차에 올랐다.

첫 목적지는 마틴데일 홀.

애들레이드 북쪽 160㎞ 지점에 있었다.

잔뜩 흐렸다.

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도시를 벗어나자 폭우까지 쏟아졌다.

거센 바람이 비를 포말로 갈아 날렸다.

뿌연 세상속 구비구비 끝없이 이어진 길.

현실감이 사라졌다.

달릴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것 같았다.

차를 몰던 토니가 씩 웃었다.

으스스하죠?

그렇긴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이건 몽환적인 세계로 가는 여정이니까.

극중 학교로 나온 마틴데일 홀에 닿았다.

2층 석조 건물이 솟구치듯 나타났다.

반경 5㎞ 안에 인가라곤 없었다.

여학생들이 유폐되듯 기숙했던 곳.

여기서 교육은 억압의 동의어였다.

현관에 매달린 종을 흔들었다.

집 관리인 트레이시가 웃으며 맞았다.

영국 귀부인 같은 온화한 미소였다.

그녀가 친절한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전화로 문의했더니 자기 일처럼 도왔다.

외진 그곳으로 갈 차를 수소문해줬다.

그리곤 3번이나 차편을 바꿔 알려줬다.

그때마다 요금은 좀더 저렴해졌다.

대저택은 우아했다.

그리고 왠지 스산했다.

홀을 가로질러 정면의 계단을 올랐다.

하필 모두 열세개.

영화 속 모습 그대로 인상적이었다.

2층에서 아래층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마틴데일 홀은 1880년에 건립됐다.

호기롭게 지은 사람은 스물한살 청년.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직후였다.

그러나 왕자 같은 생활은 딱 10년이었다.

서른을 넘기자마자 사치로 파산했다.

흔히 서구의 고택들은 관람객만 받는다.

그러나 이곳은 운영방식이 독특했다.

옛 모습 그대로인 방에서 묵을 수 있었다.

객실은 모두 10개.

예약한대로 화이트룸으로 갔다.

이 영화 첫 장면을 찍은 곳.

바로 극중 주인공 미란다의 방이었다.

높은 천장과 빛바랜 벽지.

라디에이터 외엔 모두 낡은 고가구였다.

세월을 느끼는 감각은 후각이었다.

1층에 틀어놓은 음악이 갑자기 멈췄다.

어느새 비도 그쳤다.

열린 창문으로 긴 그림자가 넘어왔다.

천장에서 전등이 목 매듯 달려 흔들렸다.

늦은 오후였고 기이한 정적이었다.

아래에서 징이 울렸다.

적막 속 징소리는 원을 그리며 퍼졌다.

그리곤 벽에 부딪쳐 허물어졌다.

저녁이 준비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트레이시가 요리한 저녁을 먹었다.

부부인 수지와 스티븐 그리고 나.

손님은 딱 셋이었다.

부부는 자상한 얼굴로 말을 붙여왔다.

그러면서 그들끼리는 종종 쏘아붙였다.

영락없이 오래 산 부부의 모습이었다.

식사는 훌륭했다.

대화도 즐거웠다.

하지만 말은 가끔씩 끊어졌다.

그러면 침묵이 바로 목덜미를 눌렀다.

일을 마친 트레이시는 바깥 별채로 갔다.

스티븐 부부가 피곤하다며 일어섰다.

혼자 남아 커피를 마셨다.

잔에 담긴 그늘이 목구멍으로 흘러갔다.

넓은 실내엔 조명이 거의 없었다.

계단 위 작은 전등 하나가 고작이었다.

어둡지 않은 침묵은 감미롭다.

수다스런 어둠은 즐겁다.

허나 침묵과 손잡은 어둠은 전혀 달랐다.

그림자처럼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발자국 소리가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복도에 걸린 초상화들이 눈을 굴렸다.

옥상으로 향하는 좁은 계단을 올랐다.

미란다의 친구 사라가 최후를 맞은 곳.

칠흑 속 계단 끝을 손으로 더듬었다.

차가운 자물쇠가 만져졌다.

사라는 함께 실종되지 못해 절망했다.

증발하지 못한 그녀는 추락을 택했다.

닫힌 세계 저 너머에서.

침실로 돌아와 누웠다.

낡은 나무 문은 닫히지 않았다.

대신 내내 삐걱대며 세월을 여닫았다.

날이 밝으면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아침 해가 다시 떠오르긴 할까.

잠들지 않고도 수십차례 꿈을 꿨다.

좁은 폐곡선 위에서 영원히 맴도는 느낌.

아래층 괘종시계가 무겁게 네 번 울렸다.

◆◆◆

멜번을 벗어나 북쪽으로 달리길 한 시간.

우드엔드 근처에 행잉록이 있었다.

입구의 바위엔 작은 글귀가 새겨졌다.

미스터리를 체험하세요.

호주에서 행잉록의 소풍은 고전이었다.

이 영화가 개봉된 것은 정확히 30년 전.

허나 사람들은 여전히 행잉록을 찾았다.

매점에서 스콘과 라임 주스를 챙겼다.

영화 사진을 곁들인 원작 소설도 샀다.

그렇게 소풍 준비를 마쳤다.

행잉록은 사실 그리 높지 않았다.

해발 711였으니까.

그러나 바위로만 이뤄져 위압적이었다.

이름대로 바위가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온통 세상으로 쏟아질 듯 주저하며.

화산활동이 빚은 조면암이 산을 이뤘다.

암석들은 엉겨붙어 굴과 길을 만들었다.

바위 사이를 누비다보면 곧 길을 잃었다.

주위가 금세 어두워졌다.

빛을 가리기엔 구름 한 점으로 충분하다.

정상에 우뚝 선 바위에 올랐다.

저 멀리 작은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적막은 비명(悲鳴)까지 삼킬 것 같았다.

극중 이곳을 찾은 청년의 외침을 삼켰듯.

그 모든 사건과 세상사의 비밀까지.

침묵은 거기서 가능한 단 하나 일이었다.

산 아래에선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정상엔 아무도 없었다.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바위는 차가웠다.

암석에 누우니 폐 대신 피부가 호흡했다.

산에선 촉각이 시각을 지배했다.

가끔 새가 날았다.

바람이 불면 작은 숲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나 돌은 내내 침묵했다.

돌은 무심했다.

스콘을 먹고 주스를 마셨다.

책도 꺼내 이리저리 들췄다.

할 일은 금방 바닥났다.

소풍은 끝났다.

그렇지만 내려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출구는 다른 곳의 입구이다.

우리는 꿈꾸는 것이 아니라 꿈꾸어진다.

증발의 유혹은 질겼다.

나누고나눈 삶을 대기에흩뜨리고 싶은.

먼저 사라진 소녀들 생각은이젠 없었다.

삶이라는 신비.

무(無)라는 신비.

무엇일까.

어딜까.

그저.

또.

-----

기사에서 언급됐던 마틴데일 홀입니다. 저택 앞 파란 차는 스티브와 수지가 몰고온 차입니다.

마틴데일 홀의 내부입니다. 저녁 무렵 1층에서 찍은사진이죠.

같은장소를 밤 12시에 찍었어요. 사진을 찍고 있는데 괘종시계가 열두번 쳐서 어찌나 놀랬던지. -.-좀 으스스하지 않나요.^^

제가 묵었던 화이트홀이예요. 영화 속에서 미란다가 썼던 방이죠. 이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왼쪽 저 경대 앞에서 머리를 빗으며 이상한 이야기를 하던 미란다의 모습이 금방 떠오르실 듯.

스티븐과 수지 부부가 다음날 떠나기 앞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2층에서 찍었습니다. 다음 행선지를 논의하고 있는 것 같죠?

이건 마틴데일 홀에서 아침 식사를 했던 식당입니다. 저녁 식사를 했던 곳은 다른 데 있었는데, 훨씬 더 크고 고급스러운 식당이었지요.

행잉록에는 산 밑에 박물관이 있었습니다. 예상하시다피시, 그중 한 구석은 '행잉록의 소풍'에 대한 전시물들이 있었지요. 사진에서 보시는 것은 신비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의 미란다의 모습을 표현한 상입니다.

밑에서 올려찍은 행잉록입니다. 위압적이죠?

행잉록을 찾은 어느 커플이 사진을 찍고 있네요.

이건 행잉록에서 주변 마을을 내려찍은 사진입니다. 영화 속에서 보면 소녀들을 찾아나선 앨버트가 쓰러진 어마를 발견한 뒤 다급하게 산 위에서 지금 보시는 마을을 향해 소리쳐 외치는 장면이 나오지요.

행잉록을 찾은 여성들입니다. 오른쪽에 행잉록이라고 쓴 팻말도 있습니다.

시드니의 달링 하버입니다. 항구가 참 예뻤어요. 사진에서 보시는 모노레일이 이곳까지 운행되더군요.

애들레이드 강가의 풍경입니다. 강 위에 떠있는 종이배 모양의 장식이 인상적이죠?

같은 곳을 다리 위에서 찍었어요. 다리 위에 누가 버리고 간 빈 술병까지 있더군요.

애들레이드의 중심가엔 시민들의 사랑을 담뿍 받는 네마리 돼지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타고 놀고, 정말 정신없더군요. 특히나 저 쓰레기통을 뒤지는 돼지가 인상적이었어요. 네마리 모두 따로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틴데일 홀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민타로를 찍었습니다.트레이시에게 인구를 물어보니 "정확히 78명"이라고 하더군요.^^ 사진에서 보시는 곳이 마을의 유일한 호텔입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주변 도로의 풍경을 밤에 찍었어요.

이건 다들 잘 아시는 시드니의 대표적 상징인 하버 브릿지입니다.

이건 시드니의 거리 시장 풍경이죠.

멜버른에서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높은 페더레이션 광장입니다. 호주는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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