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 30. 14:35 여행,레저

암릿사르

 
암릿사르 여행-작지만 강한 시크교사회 2006/07/16 03:36추천1스크랩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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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잡주 암릿사르 위치)

네루 가문의 세명을, 암캐(bitch)와 아이들 둘을 황금사원으로 끌고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리고 처단할 수 있다면. 그 결과에 대해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인도 펀잡주 암릿사르에서 2006년 7월 4일 만난 50대 시크교도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그는 기자에게 인디라 간디(전 총리)가 시크교의 본산인 황금사원을 군홧발로 짓밟은 걸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2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원한이 사무치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절대 용서못한다. 그리고 라지브 간디가 많은 시크를 죽였다는 것을 반드시 써달라고 주문했다.

50대 초반인 그는 암릿사르에서 대학을 나와, 은행에 다녔고, 10여년전부터 개인 사업을 하는 평범한 시크교도. 뉴델리에서 지인의 소개를 받고 가서 만났다. 맥주 한 잔에 취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데, 발언이 과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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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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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한 네루 가족 3명은 소냐 간디 국민회의당 대표, 그의 외아들인 라훌 간디 하원의원(1970년생), 그의 딸인 프리얀카(1972년생)다. 이들은 1984년 황금사원에 군병력을 보내 분리주의 무장세력을 쓸어낸 인디라 간디의 후손들이다. 소냐 간디 대표는 큰 며느리이고, 라훌과 프리얀카는 외손자들이다.

암릿사르는 인도 북부, 파키스탄과의 접경지대에 자리잡은 펀잡주의 인구 100만명인 중소도시다. 델리에서 기차를 타고 5시간 20분 거리. 전세계 2300만명의 시크교도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시내 한복판에 시크교의 최대 성소인 황금사원이 있기 때문이다.

번잡한 시장 거리통을, 바퀴가 셋인 오토릭샤에 몸을 싣고 지나간다. 잠시 뒤 그 끝에 흰색의 가로로 긴 건물이 불쑥 나타났다. 황금 사원일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진에서 본 금빛 휘황한 황금사원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밖으로는 흰색의 3, 4층 높이 건물이 가로로 길게 뻗어있었다.

황금사원에는 그런데 안내원이 보이질 않는다. 타지 마할 등 어느 관광지를 찾아가도 흔한 게 가이드이다.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공인 가이드, 사설 가이드 등 해서 그렇다. 그런데 이곳에는 한 명도 없어 오히려 난감해진다. 정문 오른쪽의 안내소를 찾아갔다. 안내 센터 책임자인 구르바칸 싱씨는 1인 관광객에게는 별도의 관광 가이드를 붙여줄 수 없다고 한다. 대신 설명을 해주겠다며 안내책자를 꺼낸다.

싱씨는 시크교의 교리와 역사에 대해 길게 설명을 할 태세다. 그래서 말을 자르고 들어가 궁금한 걸 물어봤다. 1984년 푸른 별 작전의 흔적이 어디에 남아있나? 그랬더니 대뜸 기자냐는 말이 돌아온다. 귀신같이 남의 직업을 알아맞춘다는 느낌과 함께, 기자 생활 20년하면서 말과 행동에서 기자 티가 많이 나는 모양이라는 생각도 든다.

blue_star_akal_takht.jpg아칼_탈트.JPG

(아칼 탁트의 블루 스타 작전 직후 모습과, 요즘)

싱씨는 당시 분리주의세력의 무장 농성했던 사원내 아칼 탁트는 완전히 복구됐다고 했다. 아칼 탁트는 시크교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는 5층짜리 건물로, 당시 인도군의 진압작전으로 크게 손상됐다. 그는 이어 당시 탱크 5대가 사원내부 구역으로 진입했다. 대리석으로 만든 계단을 파손했다. 총탄 자국과 핏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핏자국은 당시 피가 대리석에 스며들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14살인 그의 아들을 따라 핏자국을 보러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사원은 북문이 정문이고, 동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었다.

사원의 정문 앞에서 신발을 벗어 맡겼다. 입구에 놓인 플라스틱 통에 수북히 쌓인 두건더미에서 하나를 꺼내 집어 들었다. 시크교는 머리칼을 드러내는 걸 금기로 한다. 그래서 머리에 터번을 쓰고 머리칼을 가려야한다. 황금사원 입구 바닥의 폭 1의 물이 흐르는 곳을 지나간다. 정화의식인 듯하다.

일부 비신자의 출입을 금하는 힌두교 사원과는 달리, 시크교는 개방적이다. 시크교는 인도에서 생겨났으나 힌두교의 계급도 부인한다. 우상 숭배도 거부하고 유일신을 믿는다.

황금사원 구역은 사각형의 건물이 외곽을 이루고 있고, 그 안에는 가로 200, 세로 300가 돼 보이는 인공호수가 있었다. 호수의 한 복판에는 지붕 등 사원의 상단이 금 100㎏을 뒤집어쓰고 있는 3층 높이의 하리 만디르(신의 사원이란 뜻)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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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내 바닥의 핏자국)

7월초의 햇볕은 강렬했지만 제1의 성지를 찾는 시크교도의 발길로 사원은 붐볐다. 정문을 들어서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대리석 바닥으로 발을 딛는 순간, 소년이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오렌지색의 점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선혈 처럼 붉은 색의 반점들도 보인다. 대리석에 스며든 핏자국이었다. 누구의 피가 이토록 20년이 넘도록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지. 가슴이 참 아팠다. 사원측은 특별히 1984년 유혈작전의 핏자국이라고 표시하지는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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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 벽면의 총탄 자국들)

호수 주변을 걸어 동쪽 출입구 밖에 접한 회당에 찾아가니 대리석 벽에 총탄 자국이 수십개가 보인다. 기둥의 끝이 날아가기도 했고, 깊이 3㎝는 충분히 될듯한 총탄 흔적이 뚜렷하다. 그 안에서는 뜨거운 햇볕을 피해 순례중 잠시 누워 눈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북문 바로 한 층 위에 자리잡은 시크 역사관. 시크교를 연 초대 구루 나낙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크교의 역사를 인물화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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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교 역사관의'푸른 별 작전'관련 영웅 4명의 초상화. 왼쪽끝이 자르나일 싱, 그 옆이 그를 군사적으로 도왔던 예비역 장성, 그리고 오른쪽 두명이 인디라 간디를 저격한 경호원들이다.)

끝에서 두번째 방에는 인디라 간디를 저격한 두 시크교도 경호원이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샤히드 베안트 싱(1949년~1984년 10월 31일), 샤히드 사완트 싱(1967년~1989년 10월 31일)이라는 사진 설명이 초상화 밑에 붙어있다. 양인의 초상화 옆에는 군의 진압작전으로 크게 훼손된 황금사원내 아칼 탁트 건물의 당시 모습이 그려져있다. 설명은 이랬다. 수천명의 시크교도가 학살됐다. 시크교도는 힘을 모아 저항하기 위해 일어났다. 시크교도 군인들은 그들의 병영을 떠났다. 시크교도는 하지만 머지않아 복수를 했다. 복수를 했다는 말은 인디라 간디 당시 총리를 죽였다는 말이다.

22년전인 1984년 암릿사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당시의 주인공은 자르나일 싱(1947년생)이라는 젊은 시크교 성직자다. 당시 30대 중반인 젊고 똑똑한 이 시크교 성직자는 선명성을 내세우며, 시크교도가 다수 거주하는 펀잡주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곧 펀잡주내 최대의 목소리로 커졌고, 시크교도 국가 독립을 추진했다. 그는 젊은 이들을 선동, 경찰과, 정부 관리, 힌두교 신자, 그리고 자신들에 반대하는 시크교도에 대한 백주 테러를 자행했다. 펀잡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무정부상태로 변해갔다.

인디라 간디 정부는 자르나일 싱에 대해 압박을 시작했고, 포위가 좁혀지는 걸 느낀 자르나일 싱과 추종자들은 황금 사원안으로 들어갔다. 자르나일 싱과, 그를 도운 인도군 예비역 장성 샤벡 싱, 그리고 수백명의 추종자들은 황금 사원내의 5층 건물인 아칼 탁트를 요새화하고 인도정부에 맞섰다. 아칼 탁트는 시크교의 최고위 결정이 내려지는 성스러운 장소. 이때문에 인도군이 무차별 진압에 상당한 부담을 느낄 것이란 판단을 했던 것.

인디라 간디는 결국, 군을 들여보내 무장 소요를 유혈 진압했다. 푸른 별 작전(Operation Blue Star)이었다. 현장을 지휘한 건 시크교도인 쿨딥 싱 브라르 중장이었다. 격렬한 저항에 봉착한 인명 피해가 급증하자 브라르 중장은 전차 투입을 감행했고, 탱크들은 아칼 탁트를 향해 불을 뿜었다. 자르나일 싱은 교전중 사망, 시신으로 발견됐다. 4일간의 작전이 끝난뒤 아칼 탁트는 폐허로 변했다. 이 사건은 시크교도들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안기게 된다. 자신들의 최고 성지가 훼손당했다는 반감에서 였다.

더구나 자르나일 싱은 국민회의당이 정치적인 필요성에 의해 만든 인물이었기에 반() 인디라 간디 정서가 강하게 표출됐다. 인디라 간디의 국민회의당은 당시 펀잡주에서 야당과 시크 지역 정당인 아칼리 달의 연합세력에 밀려 집권에 실패했다. 이렇게 되자 펀잡주에서 재집권을 모색하던중 아칼리 달 내부 분열을 위한 정치공학적 접근을 했다. 즉 아칼리 달내 기존 인물들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로, 젊은 시크교의 성직자인 자르나일 싱을 발굴해 정치적으로 후원했다. 정치 공작은 인디라 간디의 둘째 아들이자 후계자로 떠오르던 산자이 간디가 벌였다. 하지만 자르나일 싱은 인디라 간디의 통제권 밖으로 벗어나 애물덩이가 되었다. 호랑이 새끼인줄 모르고 키웠다가 자칫 물리게 된 것.

6월초의 푸른 별 작전으로부터 다섯달쯤 지난 10월의 마지막 날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도인 경호원 두 명의 저격을 받고 사망한다. 뉴델리의 삽다르정 1번지 자택에서, 바로 옆에 붙은 집무실로 출근하기 위해 걸어가던중이었다. 큰 며느리인 소냐 간디에 의해 앰베세더 승용차로 황급히 AIIMS 병원으로 옮겨진 그의 몸에서는 무려 20발이 넘는 탄알이 나왔다.

피는 피를 부르고, 또 다른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법. 힌두교도 총리가 시크교도의 총탄에 쓰러졌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델리에서는 힌두교도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시크교도가 대상이었다. 델리는 펀잡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시크교도가 살고 있는 지역. 1947년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인도 아()대륙이 쪼개지면서 파키스탄쪽 펀잡에 살던 시크교도들이 상당수 델리로 이주했다.

힌두교도들은 폭도로 변해,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른 시크교도의 집을 약탈하고 살해했다. 딸들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강간당했다. 시크교도는 살아남기 위해 터번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힌두교도처럼 짧게 깍아야 했다. 국민회의당 일부 지도자들이 앞장서 폭도를 선동했고, 경찰 당국도 사실상 방조했다. 광풍이 지난뒤 북인도에서 최대 4000명의 시크교도가 숨졌다고 전해진다.

폭동은 인디라 간디 총리의 큰 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총리직에 오른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50대 암릿사르 사업가가 라지브 간디의 학살 책임론을 주장한 건 이같은 배경에서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흰색과 검은 색으로 명료하지도 않고, 얽히고 꼬여있는 법. 시크교도의 흉탄에 맞아 숨진 어머니의 자리 계승을 위한 총리직 선서 차 라지브 간디가 찾아간 대통령은 시크교도(지아니 자일 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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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재계)

2006년 7월 초의 황금 사원은 평온했다. 순례자들은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신통력이 있다는 호수에 들어가 몸을 적셨고, 그 사이로 길이 30㎝가 넘는 금잉어가 헤엄치고 다녔다. 호수 옆의 성스러운 나무 둑 반자니 베르, 순교자들의 사당 앞에서 절을 했다. 그리고는 사원의 네 모서리에 자원봉사자들이 철제 대접에 가득히 담아놓은 물을 마시는 정화의식을 했다.

순례의 핵심은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금빛 찬란한 3층 건물 하리 만디르에 있는 시크교 성서 구루 그란트 사힙를 참배하는 것. 순례객의 줄을 따라 하리 만디르에 들어가니 1층에는 3인조 남자 밴드가 앉아 노래를 하고 있다. 50대인 두 사람은 키보드를 치며, 역대 구루들의 말씀을 모은 구르 그란트 사힙의 구절을 노래하고, 다른 한 사람은 두 개의 작은 드럼을 두드리고 있다. 그들의 노래는 몇 만평은 되어 보이는 황금사원 곳곳에 스피커를 통해 전해졌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이었다.독립국가를 만들겠다는 시크교도의 의지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는지 모른다. 1984년을 고비로 펀잡내 시크교도의 분리주의 운동은 추진력을 잃었다. 현재 펀잡주의 집권당은 시크지역당인 아칼리 달이 아닌 국민회의당. 현재의 의석 분포는 전체 116석중 국민회의당이 64석, 아칼리 달이 52석을 차지하고 있다. 내년에 주총선이 예정되어 있으나 국민회의당의 재집권이 예상된다. 암린데르 싱 주총리가 인심을 얻고 있고, 펀잡주 암릿사르 출신인 만모한 싱 총리(시크교도)가 연방정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게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현지 주민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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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내에서 담소하는 승려들)

하지만 시크교도는 약화되지 않았다. 이들은 작지만 강하다. 한 예가 황금사원의 역사관이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중 참혹한 장면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후손들에 전달하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자꾸들었다. 어디서도 그런 참혹한 그림들은 본 적이 없었다. 목이 잘리고 교수형을 받은 모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큰 칼을 정수리로 받고 가슴까지 몸이 두동강나고,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 삶겨지고, 칼날이 달린 톱니바퀴에 몸이 들어가기 직전이고. 최근세의 순교자 10명의 끔찍한 사망 직후 얼굴 사진은 정면으로 바로 보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시크교 500년 역사는 종교 박해와 외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들의 신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무굴제국의 창건과 비슷한 시절 구루 나낙에 의해 1507년 만들어진 시크교는 이후 1708년까지 10명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구루를 계속 배출했다. 하지만 이중 2명이 순교하고, 마지막 구루는 4명의 자식을 모두 전쟁터에서 일을 정도로 감당하기 힘든 도전에 부딪혔다. 5대 구루인 아르준 뎁(1563~1606년)은 시크교도 사회의 첫 순교자. 시크교 성서를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는 시크교 세력이 급속도로 확산되는데 위협을 느낀 무굴 황제 제항기르에 의해 체포해 혹독한 고문 끝에 숨졌다.

6대 구루인 하르 고빈드(1595~1644년)는 처음으로 시크교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어야했던 인물. 무굴제국과 모두 4차례 전쟁을 벌였고, 인도 중부 도시 괄리오르의 성에 1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시크교를 전사 집단화했다. 몸에 두 개의 칼을 항상 차고 다니는 시크교의 전통도 만들었다.

9대 구루 텍 바하두르(1621~1675년)은 무굴의 아우랑젭 황제에 의해 델리에 끌려가 무굴황성인 랄킬라(붉은 성) 앞에서 순교했다. 지금도 랄킬라 앞에 가면 순교지의 표지가 남아있다. 구루 텍 바하두르가 목이 잘린 직접적인 계기는 카슈미르 지방의 힌두교도인 판딧들 때문이었다. 판딧들은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요구하는 아우랑젭 황제의 시한부 통첩에 봉착한 뒤 인근 펀잡의 구루 텍 바하두르를 찾아왔다. 구루 텍 바하두르는 이들의 도움을 요청받고 이렇게 말했다. 나를 개종시킬 수 있으면, 카슈미르의 힌두교도들도 개종할 것이라고 아우랑젭에게 전하시요라고. 그는 이후 델리에 끌려간뒤 아우랑젭 황제 앞에서 개종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했고, 참수당했다.

시크교의 지막이자 10대 구루인 고빈드 싱(1666~1708년)은 무굴황제 아우랑젭과의 전투에서 네 아들을 모두 잃었다. 고빈드 싱은 자신이후에는 더이상 구루가 없을 것이라고 선언, 그 자신 마지막 구루가 됐다.

구루가 없는 시대의 시크교도 역사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프간 왕의 침공을 받아 1761년 황금사원이 대파되는 참극을 겪었다. 시크교 역사의 정점은 1799년 란짓 싱이란 불세출의 인물이 등장, 북인도를 아우르는 첫 시크왕국을 세우면서다. 라호르를 중심으로 펀잡주는 물론이고 북으로는 카슈미르,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접경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평화지대를 호령했다. 란짓 싱은 황금 100㎏를 희사, 황금사원을 금으로 장식했다. 황금사원이란 속칭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영국군의 침략을 받아 두 차례의 전쟁 끝에 펀잡은 1849년 영국의 수중에 떨어진다.

이런 역사속에서 시크교도들은 강한 군사조직으로 대응한다. 영국식민지 시절에는 다수가 군문에 들어갔다. 이들은 1857년 세포이 반란 당시 반란군 토벌에 앞세워졌다. 당시 영국군 소속 인도군인 세포이들은 벵갈출신이었고, 이들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는 건 힌두교도가 시크교도라고 판단한 것이다. 세포이들이 델리를 점령, 무굴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자파르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투쟁을 벌였을 때 시크교도들이 델리 탈환전에 대거 투입됐다.

영국식민지 인도군에 입대한 시크교도의 수는 이후 계속 늘어났다. 1차대전이 시작된 다음해인 1915년에 3만5000명이었고, 1차대전이 끝날 때쯤에는 10만명을 넘어섰다. 인도의 대표적인 무장독립투쟁가인 수바쉬 찬드라 보스(1897~1945년)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된 인도군을 모아 독립군(INA)을 조직, 미얀마를 지나 인도를 향해 진격했을 때 병력 2만명중 3분의 1이 시크교도였다.

시크교도는 전사적인 전통은 현 인도군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으나, 시크교도 출신 숫자는 인도 전 병력의 10%까지를 차지한다는 게 통설이다. 인도 전체 인구의 2%미만인 시크가 군의 10%를 차지한다는 건 엄청난 비중. 인도가 1947년 독립한 뒤 군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후진국형 쿠데타를 경험하지 않은 건, 시크교도가 군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시크교도는 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해, 탱크를 앞세우고 뉴델리의 권력을 장악해도 국가를 통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 현재의 육군 참모총장도 시크교도인 J.J.싱 장군(1945년생)이다. 그는 시크교도 출신으로는 2005년 처음으로 육군의 최고위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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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J 싱 장군)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시크왕국을 세운 마하라자 란짓 싱의 후손인 M.S.사르카리아씨()는 군 입대를 선호하는 시크교도 사회의 분위기와 관련, 지금 동네에 나가도 2시간이면 100명의 군 입대 희망자를 모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열흘을 주면 1 만 명은 쉽게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농촌의 경우 75%이상이 아들은 군에 보낸다면서 시크교도의 용기를 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도의 강한 부대로 유명한 시크 연대는 1984년 푸른별 작전이후 크게 흔들렸다. 황금사원 유혈진압 소식을 접한 시크연대 소속 병력들이 일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황금사원에 군병력이 진입한 2일 후 파키스탄 접경 강가나가르에 주둔중이던 시크연대 9대대 장병 수 백명이 한때 무장 소요를 일으켰다. 비하르주() 주둔 시크 연대 소속 병력 1461명의 병영 이탈은 가장 큰 반란이었다. 이들은 무장한 채 암릿사르를 향해 이동하다가 비하르에서 UP주로 넘어가는 접경 도시 바라나시 인근에서 저지에 부딪히자 포격전까지 벌이는 전투를 치렀다. 진압군과 반란군 양측에서 35명이 사망했다. 이후 인도 정부는 시크교도의 군내 비중을 낮추기 위해 기존에는 병력을 선발하지 않는 지역에서도 골고루 모병하기 시작했다.

시크교도는 한편 인도에서는 부자의 대명사이다. 델리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건 시크교도들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인도내 시크교도의 삶의 공간인 펀잡주는 인도내 가장 소득이 높은 지역이다. 인도내 밀 생산량의 22%, 쌀 생산량의 10%를 생산하는 곡창지대이기도 하다. 다수의 시크교도가 이민을 떠나, 영국의 버밍햄과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에 강력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이들이 송금하는 돈은 펀잡주 시크교도의 지갑을 두툼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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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함속 돈과 금붙이)

실제로 황금 사원의 지붕에 금을 입히기 위한 목적으로 기부를 받고 있는 함에 들어가 있는 돈에는 고액이 많았다. 미화 100달러 짜리 아멕스 발행 여행자 수표, 금 반지, 금 팔찌, 그리고 100루피(약 2500원) 등 인도 고액화폐도 수북했다.

시크교도는 힌두교도가 압도적인 인구 11억명속의 섬주민이나 다름없다. 소수로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때때로 반복되는 유혈의 역사. 하지만 시크교도들은 독립적이고 무릎꿇지 않는 강인함으로 버티고 있었다. 작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는 시크교도 사회, 참으로 존경받을 만한 커뮤니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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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시크교도. 아이의 짧은 머리 스타일이 변화의 바람을 느끼게 한다)

사족: 분리주의 운동이 급커브를 그리는 한편, 머리칼과 수염을 깍지않는다는 시크교의 문화에도 서서히 변화가 오고 있다. 터번은 시크교도를 알아볼 수 있는 단적인 표식. 이 속에 가려진 머리칼은 자르지 않는 것이나, 암릿사르에서 만난 부동산업자 라진데르 싱(1967년생)은 6살난 아들의 머리를 힌두나 무슬림처럼 짧게 깍아놓았다. 그는 아이도 머리모양을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도 터번을 쓰고 있지만 머리는 깎았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깍는다고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싫어한다고 했다.

/암릿사르(인도 펀잡주)=최준석 조선일보 특파원 jscho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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