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아버님의 컨디션이 지난 밤 갑자기 좋지 않다는 전화연락을 토요일 아침에 받고도 토요일 밖에진료받을 시간이 없다는환자들의 예약 때문에 서둘러 서울의 아버님 댁으로 찾아 뵙지 못한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환자들한테 일일이 전화로 양해를 구하여 진료예약을 취소하고 찾아가 뵈었는데 일주일만에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별 도리 없이 환자들의 진료예약을 최대한 앞당겨 토요일 오전 진료를 서둘러마치고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이번 주말을 넘기지 못하실 것 같아서 짐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는 참이었습니다. 외곽순환도로에 진입하여 톨게이트를 지나는순간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우리 큰 아이의 전화번호가 찍혀져 있었습니다. 그는 전 날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올라간 후에 할아버지 집에서 잔 것이었습니다. 불길한 생각에 전화를 받자 큰 아이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하늘이 노래지기 시작하여 자동차를 고속도로의 갓길에 세웠습니다. 환자들한테 욕을 좀 먹더라도 그냥 예약진료를 펑크내고 찾아뵐 것을 그날 아침, 순간 판단을 달리하여 아버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모대학병원 신경외과교수인 형님도 제주도에서 개최된 학회에 참석하느라 아버님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가까이 있었던 둘째도불효를 하게 되었고 아버지와 삼촌들을 대신하여 손자들이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grandfa-sozhu.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133/4633/2/grandfa-sozhu.JPG)
< 2005년 3월 중국 샹하이여행중에서 > 아버님은 금년 88세, 12년 전 경추부 후종인대골화증이라는 그리 흔치 않은 희귀한 병으로 자식이 아버님의 몸에 직접 메스를 대는 대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삶은 보너스라는 아버님의 여유 있는 농담 덕분인지 여든을 넘기신 후에도 성지순례를 가신다는 어머님을 따라 이집트역사기행까지 나섰고 뒤늦게 시작한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공부를 위해 두 차례나 타이페이와 베이징의 고서점가를 순례할 정도로 비교적 건강을 유지하셨던 아버님이셨습니다. ![cairo.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133/4633/2/cairo.JPG)
< 1996년 성지순례길에 카이로에서 >
그러던 중 지난 해 봄 우연히 위출혈로 내시경검사를 하니 뜻밖에도 상당히 진전된 위암의 소견이 나왔습니다. 아버님께서도 내과의사이셨지만 평소 위암을 의심할만한 증상이 없었기에 진단을 한 병원의 의사들도 스스로 의심할 만큼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습니다. 이제 아흔을 몇 년 앞둔 노인한테 위암치료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님께서 증세를 못 느끼는 것이 다행일 뿐이었습니다. ![book-shelf-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133/4633/2/book-shelf-1.JPG)
< 金石子典, 說文解字등을 구입하시기 위해 베이징과 타이페이서점가를 다녀오셨다. > 결국 그 때부터 우리 형제들은 아버님과의 작별인사를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길어야 6개월을 넘기지 못하실 것이라는 의료진들의 판단에 따라 예상되는 상황에 대해 대비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다행히 아버님께서는 위출혈이 위궤양 때문이라고 둘러대는 우리들의 얘기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으셨는데 정말 모르고 계신 것인지 아니면 짐작을 하셨으면서 어머님이 걱정하실까봐 내색을 하시지 않은 것인지 알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난해 봄에는 중국여행을 하시고 싶다고 하셔서 우리 형제들은 의논 끝에 여행 중에 돌아가시게 된다 하더라도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려 함께 모시고 중국여행까지 다녀올 정도였습니다. 그 후 몇 차례의 응급상황이 두 세 달 간격으로 계속 되었습니다. 위출혈이 반복되고 쇼크에 빠져 의식을 잃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연이어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순간 순간 고비를 넘기시고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을 쉽게 회복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완전히 맥박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게 되었으나 의료진들의 표현에 따르면 기적이라 할 정도로 의식을 되찾게 되셨지만 계속되는 출혈을 지켜만 보고는 없다는 판단에 우리 형제들은 위절제수술을 감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일년이란 보너스인생을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vase.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133/4633/2/vase.JPG)
< 한자의 유래와 뜻을 풀이한 것을일부 화병에 직접 그려 도자기를 만드셨다. > 위절제수술 후, 반복되던 위출혈은 없어졌지만 이제는 주말에 찾아 뵐 때마다 몸이 수척해 지시는 것을 느끼게 되어 우리 형제들은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리는 기분으로 주말마다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은퇴하신 후 새로 시작한 고대사공부가 20년 가까이 이어지자 취미수준을 넘어 본격적인 연구생활로 이어져 틈틈이 글로 정리하시고 계셨습니다. 우리 고대사에 별 관심이 없는 우리 형제들은 아버님께서 설명해 주시는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수준이었지만 다행히도 사위는 관심을 가져 주어 장인어른의 연구기록을 정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위는 일찍이 6.25전쟁 때 아버지를 잃어서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자란 탓인지 장인어른을 친아버지와 같이 모셨으며, 아버님도 사위를 친자식처럼 우리 형제들도 서로 처남매부가 아닌 친형제처럼 격의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desk.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133/4633/2/desk.JPG)
그 원고는 지난 7월초에 탈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병상에서도 중단하시지 않았던 독서와 고대사공부를 끝을 맺으신 것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성취감과 함께 무언가 허탈감에 빠지시게 되는 것을 느끼시게 되었습니다. 화장실출입도 힘들어 하실 정도로 급격히 쇠약해지는 것이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위암진단을 받고 6개월을 넘기지 못하신다고 하였지만 또 다시 일년을 보너스로 삶을 연장하신 것이었지만 전과는 달리 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척 수척해시고 급속히 체력이 쇄진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니 더 이상의 보너스인생도 아버님이나 가족들한테는 쓸데없는 욕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jeju.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133/4633/2/jeju.JPG)
< 지난 해 제주도 바닷가에서 >
그리고 토요일 아침 아침잠에서 미처 깨어나지 않으신 듯조용히 떠나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진짜 작별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7월 마지막 토요일 오전진료시간 ...... 저는 앞으로 평생을 두고 후회하는 순간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님 ...... 죄송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할아버지원고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133/4633/2/%C7%D2%BE%C6%B9%F6%C1%F6%BF%F8%B0%ED1.JPG)
![할아버지원고2.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133/4633/2/%C7%D2%BE%C6%B9%F6%C1%F6%BF%F8%B0%ED2.JPG)
![portrait.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133/4633/2/portrai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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