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다시 시작하다
새소리보다 먼저 경운기, 트랙터 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날이 밝아오고 길이 보이기 시작하면 바로 일을 시작한다. 바야흐로 들판이 분주하다. 일찍 밭을 만든 곳에는 벌써 감자가 비닐 속에 묻혀 있다. 마음이 급해져서 오늘은 우리 밭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꼭두새벽부터 서둘렀다.

세 다랑이 모두 2000평 농사를 새로 시작한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안주는 농사라 둘이서는 엄두도 못 낼 평수지만 옆에 같이 짓는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힘을 낸다. 모두 어울려 며칠 전부터 각자의 밭을 돌아가며 쇠똥거름을 내고 미생물로 발효된 퇴비를 냈다. 오늘은 한 사람은 트랙터로 밭을 갈고 새로 귀농한 젊은 서울새댁과 나는 줄을 띄운다. 그 발자국을 따라 한 사람은 관리기로 두둑을 만들고, 남은 두 친구는 비닐을 덮고 날리지 않게 삽으로 흙을 떠얹는다.

서로서로 일을 나누어서 하니 정말 일하는 것도 같고 사는 것도 같다. 가끔씩 밭두둑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막걸리도 한잔 나누며 고단함을 잊는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줄 띄우는 일이 즐겁기만 하다. 뒤로 걸으며 두둑을 만드는 관리기가 똑바로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작업인데 모 줄을 두 개씩 잡고 양쪽 끝에 서서 3자, 한치, 두치, 세치, 네치 눈금이 파인 막대기 자를 이용한다. 해마다 사용하는 도구라 낡아서 줄이 가끔씩 끊어지면 다시 동여매기도 한다. 정교하게 눈금을 표시한 막대자에는 가늘게 홈을 파놓았다. 두 줄을 한꺼번에 하는데 그 간격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90도 각도를 유지하여 선이 그어지도록 한다. 각도가 흐트러지면 간격이 좁아지거나 넓어져서 두둑이 비뚤어지고 나중에 수확할 때도 손수레가 지나갈 때나 걸어다닐 때 번거롭다.

밭이 길어서 말소리는 들리지도 않아 모든 게 손짓으로 눈치로 호흡을 맞춘다. 줄을 탱탱하게 잡아당겨 띄워놓고 줄 위를 곡예사처럼 사뿐사뿐 걸어서 발자국을 남긴다. 패션쇼에 멋진 옷을 입고 워킹하는 모델처럼 걸으면 된다. 둘이서 한 줄을 걸어 나와 잠시 만나 인사하고 뒤돌아 가면서 다른 줄을 밟고 나가면 한번에 두 줄이 생긴다. 오래 전부터 이런 방법을 썼단다. 더 편리하게 더 많은 양을 해내려고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을까 짐작이 된다. 빠르고 많이 해낼 수 있는 기계의 힘과 기계가 따라오지 못하는 정교함을 가진 사람의 손이 하나가 되어 봄 들판에 우렁찬 협주곡을 연주한다. 병풍처럼 서 있는 박달산이 푸르러지면 따뜻한 비닐 속에 심어놓은 감자가 토실토실 여물어가겠지.

여자들은 얼른 일을 마치고 한 집에 모여 식사를 공동으로 준비한다. 언니는 채소를 씻고 나는 찌개를 끓이고, 새댁은 상을 차린다. 누구의 작업 지시도 없이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서 한다. 별다른 반찬 없어도 된장찌개 한 냄비를 앞에 놓고 맛난 식사를 한다. 아이들 키우는 얘기도 하고 마을의 이웃집 얘기도 하다 보면 시간은 짧기만 하다.

남자들은 농기계를 정돈해 놓고 내일 작업할 일들을 의논한다. 선배 농부는 초보농부들에게 스스로 몸으로 겪으며 농사일을 배우라고 말한다. 며칠 내내 밤늦게까지 밭 만들고 감자를 자르면서 주경야경 하던 차라 피곤들 할텐데 내색하나 없이 자기 일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달려나와 손을 맞잡는다.

둘이서 일을 마치고 늦은 저녁 손수레를 밀고 논길을 걷다가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밀레의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할 거야 그치?” 남편이 말한다. 이렇게 마음 모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농사를 짓는데 올 가을에는 우리도 넉넉한 수확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농사짓는 사람과 농산물을 사먹는 사람들이 모두 넉넉한 마음으로 추수감사제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감자와 고추를 기다리는 소비자들을 모두 불러서 수확의 기쁨을 같이 나누고 소비자에게로 가는 귀한 감자 박스마다 감자이력서를 넣어서 어느 집에서나 사랑받는 감자가 되면 얼마나 기쁠까. 그저 사람이 먹을 귀한 농산물들이 천하고 값싸게 버려지고 내팽개쳐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포근포근한 뽀얀 감자 분처럼 가슴 따뜻한 농부의 일기를 모든 농부님들이 계속 적어나갔으면 좋겠다.

이제 감자가 공기돌처럼 커지면 지천에 찔레꽃 향기가 진동하겠지. 작년에 받은 찔레꽃 선물을 올해는 내가 먼저 선물해야지.

유연숙 / 농부·충북 괴산, ‘시골에 사는 즐거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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