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 25. 17:37 살아가는 이야기
자신의 거울을 먼저 닦아야
작성자 | : | 기자재선 | |
제목 | : | 자신의 거울을 먼저 닦아야- 베이징의 M에게 | 조회수 : 216 |
M, 베이징에 잘 도착했는가. 여기서 갖고 갈 책이 많아서 짐 챙기는 데 고생했다고 전해 들었네. 거기서도 짐을 풀어놓고 정리하는 데 애를 먹지나 않았는지 …. 자네가 모처럼 전화를 해서 당분간 여기를 떠난다고 그랬을 때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더군. 이즈막 우리 또래의 기자 중에 새로운 일을 찾아 언론계를 떠나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 얼마 전엔 한 친구가 부동산 컨설팅 회사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직전엔 또 한 친구가 대기업 홍보파트로 전직했지. 탁월한 취재 감각으로 기자 사회에서 크게 인정받는 친구들이었으나, 난 아쉬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네. 나이 40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안정된 직장에서 돈을 더 많이 받으며 일을 하고 싶다는 그들의 솔직한 소망에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었지. 언론계, 특히 신문 동네의 미래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는데, 환한 동네에서 밝은 앞날을 설계해보겠다는 이들을 어찌 막을 수가 있겠는가. 자네 전화를 받았을 때도 일순 그러한 낭패감에 젖었네. 어디로 간다는 것일까. 내 복잡한 심사를 드러내지 않고 한껏 축하를 해줘야지. 내가 이렇게 마음먹고 있는데, 자네는 평소보다 낮은 음색으로 베이징 특파원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하더군. 하, 안심의 한숨소리에 앞서 웃음이 비어져 나왔네. 특파원으로 가는 것을 떠벌이지 않고 담담하게 전하고 싶어 하는 자네의 마음씀씀이가 낮은 목소리를 통해 전해져 왔기 때문이지. 무슨 일이든 말을 앞세우지 않고 조용조용히 처리해내는 자네다운 ‘통지’였다고나 할까. M, 자네는 내가 한 신문사의 수습 딱지를 떼고 기자로서 걸음마를 시작할 때, 한 기수 후배 수습기자로 들어왔지. 뭔가 죽이 맞았던 자네와 나는 업무가 끝나면 몇몇 선배들과 어울려 매일 저녁 음주 순례를 했고, 당시에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던 노래방이라는 데에 들러 가무를 즐기기도 했지. 자네와 어깨를 겯고 20대 중반의 청춘을 지낸 것을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아름다웠으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던 시절이었어. 기자로서의 앞날을 좀 더 풍성하게 꾸며야 한다고 서로 다짐했던 것이 암암히 떠오르네. 어쩌다가 내가 다른 신문사로 옮겨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됐어도 내 곁엔 늘 자네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 그랬는데…, 이렇게 세월이 지나니 전화조차 드문드문 주고받는 사이가 돼 버렸으이. 우리가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언론 환경은 참으로 많이 변했군. 인터넷을 통해 의사소통을 쉽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기존 언론매체, 그 중에 특히 신문의 위상이 현저히 약화했지. 소수의 메이저 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경영문제에 있어서 생존 그 자체에 허덕이고, 직원들의 급여 지급조차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지. 그 사이에 외환위기가 와서 우리 사회에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 닥친 것도 신문의 경영 위기를 부채질했어. 자네와 내가 신문기자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솔직히 돈 걱정을 하지 않았지. 메이저, 마이너매체를 막론하고 초년병이든 중견 기자건 간에 대기업의 비슷한 연배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았다고 기억하네. 이제 그런 시절은 아, 옛날이여, 가 돼버렸군. 대부분의 기자들이 가족을 꾸리고 있는 경우엔 허리띠를 졸라매며 자식들 교육비를 걱정해야 처지가 됐어. 아니 중견기자들 중엔 갈수록 늘어나는 빚 때문에 생계 자체를 걱정하는 이도 많지. M, 내가 지금 고개를 떨구는 것은 사실 이런 암담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네. 기자들의 군색한 처지를 안다면, 많은 국민들이 고소해할 것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이네. 현직 기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와 애정을 백분율로 따져보면 어떨까. 메이저 신문들이 그토록 공격을 해대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 보다 높지 않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네. 일부 언론학자들은 이런 상황은 기자들이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데 소홀히 했기 때문에 자초한 것이라고, 다소 과격한(?) 주장을 내놓고 계시지. 높은 자리의 심판관처럼 누가 쉽게 재단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나로서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이. 동료 기자들이 이뤄놓은 혁혁한 공로를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네. 나의 자격지심이 보다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야. 나를 포함해 기자란 직종에 종사해 온 이들이 공동체의 파수꾼이라는 미명 아래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의무는 팽개쳐왔던 것이 아닐까. 시민사회 일원으로서의 자격이 모둠살이의 기본 질서를 지키는 데 있는 것이라면, 적지 않은 기자들이 결격에 해당한다고 나는 보네. 한국기자협회에서 오랫동안 사무업무를 봐 온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하더군. “ 기자들을 대상으로 행사를 치를 때마다 녹초가 되곤 해. 어쩌면 그렇게 질서를 지키지 않고, 시간 약속을 예사로 어기는 지, 기자 1명 데리고 다니는 것이 돼지 100마리 몰고 다니는 것보다 힘들다는 우스개 소리를 매번 실감한다니까. ” 언론환경이 변했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기자들의 예외 의식이라는 것이야. 매사에 나만은 좀 편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의식을 알량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지. 기자들이 교통법규를 위반하고도 벌과금 딱지를 빼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해대는 모습을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꼴불견으로 여기겠는가. 어디서든 좀 특별한 대접을 받고 그것을 은근히 으스대는 습관이 나를 포함한 일부 한국 기자들에겐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듯 하이. 물론 어느 집단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자들도 전문적인 영역에서 업무상 누리게 되는 혜택이 있을 수밖에 없지. 일반 국민들이 그것까지 나무라는 것은 아닐 거야. 예를 들어 야구담당 기자가 따로 마련된 기자석에서 취재를 하는 것을 특혜라고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지. 그런데 취재 목적이 아닌 일반 관람 때도 기자들은 주최 측에 편의 제공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게 사실이잖은가. 스포츠를 예로 들었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야. 아마 다른 유력자들이 그런 요구를 했다는 게 드러나면 기자들은 그것을 기사거리로 삼고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지 않을까. 코미디 소재가 될만한 모순적인 모습이 아닌가. 폭탄주를 먹는 우리 사회의 관습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내놓고 기자들끼리는 그날 당장 폭탄주를 먹는 것도 웃지 못 할 소극(笑劇)이지. 공직자들의 접대, 내기 골프에 그토록 추상같이 호령을 해 놓고, 자신들은 같은 행태를 벌인다면 국민들이 무어라고 할까. 그것을 동료들에게 무용담처럼 떠벌이고 다니는 일부 기자들의 모습은 …. 일상의 작은 모순은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큰 차원의 모순도 쉽게 용납하게 된다고 생각하네. 유력 언론사 사주가 거액의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브로커 역할을 했을 때, 그런 사주를 옹호하는 기자들이 있지 않았는가. 그것은 지주에 충성을 다하는 마름의 모습이지 공동체를 지키는 파수꾼의 태도는 아니지 않나 싶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요즘 우리 기자들은 소속 회사의 파당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지나치게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야. 한국기자협회가 최근 전국의 기자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결과에서 개인적으로 눈여겨본 게 있어. 기자들 중에 30%이상이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로 꼽았던 한 유력 신문을 꼽았는데, 그 신문에 대한 기자들의 신뢰도는 4%수준에 그쳤다는 것이지. 나는 이것을 기자들이 언론동네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반드시 크고 힘 있는 것만이 선(善)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여기네. 기자란 족속은 스스로 권세를 누리기보다는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고 소수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서 보람을 찾는 존재가 아니겠나.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갈수록 척박해지는 언론 동네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도 그마나 드높은 자존심을 가지고 버텨내지 않을까 싶네. 그러기 위해선 남들에게 엄격한 것 이상으로 자신의 언행에 엄격해야 하겠지.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알량한 예외의식을 버릴 때 공동체를 위한 파수꾼으로서의 자격을 새롭게 얻고, 스스로의 자부심과 이웃들의 애정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M, 멀리 베이징에 있는 자네에게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늘어놓은 듯싶으이. 그러나 자네는 한국 기자의 대표로 거기 나가 있는 것이니 중국인들과 우리 교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기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쓸모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네. 북간도 용정 출신의 시인 윤동주는 시작품 <참회록>에서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했네. 일제하의 엄혹한 시절과 지금의 언론 환경을 빗대는 것은 언론종사자의 과장된 비명이겠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선 남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야 한다는 것이네. 자네를 대상으로 편지를 썼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임을 자네도 잘 알겠지? 부디 건강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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