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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富 동시에 가질순 없다" 進士이상 벼슬 멀리해 | | | |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불에 타버리고 주춧돌만이 남았다 | | |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는 것이 ‘성경’ 말씀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부자가 존경받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경주의 최 부자집은 부자면서도 존경을 받은 집안으로 조선팔도에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집이었던 최 부자 집은 12대 동안 계속해서 만석군을 지낸 집안으로 유명하다. 만석군이라 하면 일년 수입이 쌀로 만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급의 부자이다. 12대는 대략 300년의 기간에 해당한다. 1600년대 초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부를 유지했다. 어떻게 관리를 했길래 자그만치 300년 동안이나 만석군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최 부자 집의 종손 최염(崔炎·68)씨 증언과 이런 저런 취재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이 집 특유의 경륜과 철학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최 부자 집의 철학 가운데 첫째는 ‘흉년에 땅을 사지 않는다’ 였다. 흉년이 들면 수 천명씩 굶어 죽는 시대였다. 흉년이야말로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흰죽 논’까지 등장했다. 다급하니까 흰죽 한 그릇 얻어먹고 그 대가로 팔게된 논을 말한다. 그러나 최 부자 집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런 금기는 또 있었다.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석양 무렵이 되면 장날 물건들은 값이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다른 부자집들은 오전에는 절대 물건을 사지 않고 파장 무렵까지 인내하면서 ‘떨이’ 물건을 기다렸다. 최씨 집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항상 오전에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은 제일 질이 좋은 물건을 최 부자 집에 먼저 가지고 왔다. 이 집은 물건값을 깎지 않는다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철학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였다. 돈이라는 것은 가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시점을 지나면 돈이 돈을 벌게된다. 멈추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최씨들은 만석에서 과감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이상은 내 돈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은 소작료 할인이었다. 다른 부자집들이 소작료를 수확량의 70% 정도 받았다면, 최 부자는 40% 선에서 멈췄다. 소작료가 저렴하니까 경주 일대의 소작인들이 앞다퉈 최부자 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팠지만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쳤다.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나도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였다. 최 부자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000석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썼다. 그 다음 1000석은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 최부자집 사랑채는 1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부자집이라고 소문나니까 과객들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독특한 쌀 뒤주가 있었다고 한다. 두손이 겨우 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든 뒤주였는데, 과객이면 누구든지 이 쌀 뒤주에 두 손을 넣어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한 뒤주였다. 다음 목적지까지 갈 때 소요되는 여행경비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입구를 좁게 한 이유는 지나치게 많은 양은 가져가지 말라는 암시였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던 과객들은 정보 전달자 역을 했다. 후한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조선팔도에 최 부자집의 인심을 소문내고 다녔다. ‘적선지가(積善之家)’란 평판은 사회적 혼란기에도 이 집을 무사할 수 있게 만든 비결이었다. 동학 이후에 경상도 일대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부자집을 터는 활빈당이 유행했다. 다른 부자집들은 대부분 털렸지만 최 부자집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집의 평판을 활빈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최부자 집의 창고.‘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는 가훈처럼,이곳에 쌓인 곡식들은 최씨 일가만을 위해 쓰이지는 않았다. | | |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도 있었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를 살펴보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울산이고 북으로는 포항까지 아우른다. 주변이 굶어죽는데 나 혼자 만석군으로 잘먹고 잘사는 것은 부자 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를 보면 만석꾼 최 부자집은 경주만 의식한게 아니었다. 사방 백리의 범위를 의식하고 살았던 집안이었다. 1년동안 사용하는 3000석 가운데 나머지 1000석은 여기에 들어갔다. 최 부자집의 철학 가운데 특이한 것은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말라’이다. 최 부자집은 9대 진사를 지냈다. 진사는 초시 합격자의 신분이다. 이를테면 양반신분증의 획득인 셈이다. 그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집안의 철칙이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속담이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돈 있으면 권력도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 집안은 돈만 잡고 권력은 포기했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감옥이 가깝다고 여겼던 탓이다. 벼슬이 높을수록 당쟁에 휘말릴 확률은 높아지고, 한번 휘말리면 집구석 절단 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벼슬의 끝, 그러니까 권력의 종착점이 어디인가를 꿰뚫어 본 데서 나온 통찰력의 산물이 ‘진사 이상 하지 말라’이다.
남자들은 그렇다치고 이 집의 여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 마님이 가지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 의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백동 숟가락의 태극 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 7대 조모는 삼베 치마를 하도 오래 기워입어 이곳저곳을 기워야 했는데, 3말의 물이 들어가는 ‘서말치 솥’에 이 치마 하나만 집어넣어도 솥이 꽉 찰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너무 많이 기워서 물에 옷을 집어넣으면 옷이 불어나 솥 단지가 꽉 찼다는 말이다. 이 집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모두가 영남의 일류 양반집이었다. 본인들은 진사급이었지만, 만석군이다 보니 사돈이 된 집안들은 명문 집안이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치마양반’이다. 로마 천년의 유지 비결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면, 신라 천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경주 최 부자집의 유지 비결도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의 1000년 문명을 지탱한 노하우였던 것이다. 趙龍憲·(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경주 최부자집은 교동 69번지에 있다. 뒤로는 내물왕 무덤을 비롯한 왕릉들이 있고, 그 옆에는 계림이다. 집 바로 옆에는 경주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좀 더 왼쪽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살던 집터인 재매정이 있다. 원래 이 집터는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있던 터라고 전해진다. 설총이 태어난 집인 것이다. 현재 이 집의 소유자는 영남대학교 재단이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崔浚)이 해방 직후 모든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영남대학의 전신)을 설립할 때 이 집도 기부했기 때문이다. 최준의 손자이자 종손인 최염씨는 가끔 이 집을 들른다. 그는 사업을 하다가 은퇴하여 지금은 경기도 수지에 거주하고 있지만, 고택 관리는 아직도 종손이 하도록 되어 있다. 이 집터에서 풍수상 중요한 핵심은 안산(案山:집앞에 보이는 산)이다. ‘이중안산(二重案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말발굽형의 디귿자 형태의 도당산 뒤에 경주 남산의 세 봉우리가 겹쳐져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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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gfri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