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운동화 - <살며 생각하며> 피천득 선생과 목욕 2006/02/08 02:48 추천 0 스크랩 0
<살며 생각하며> 피천득 선생과 목욕
김성구 / ‘샘터’ 발행인
날이 추워지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나 뜨끈뜨끈한 아랫목만 생각나는 게 아닙니다. 얼었던 온몸을 눈 녹듯 풀리게 만드는 곳, 요즘처럼 요란한 시설을 갖춘 사우나가 아닌 남탕과 여탕 사이에 큰 구멍이 뚫려 있어서 서로 대화(?)도 가능한, 열 평 남짓한 동네목욕탕이 그리워집니다. 옛날이 생각납니다.
오래된 기억 하나. 뜨거운 탕 목욕을 좋아하는 아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집안 막내인데다가 키도 유독 작은 저를, 어르신들은 자주 앞장 세워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싫다는 것을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긴 덕분에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자의반타의반(?)으로 여탕에 출입했습니다. 특히 친할머니는 수건을 두어 번 겹쳐 껍질이 벗겨지도록 제 작은 몸 구석구석 때 밀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여탕을 ‘졸업’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유치원 동창이고 초등학교 짝인 경해를 그만 목욕탕에서 조우하게 된 것입니다. 그 날도 할머니는 저와 한바탕 씨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탕을 사이에 두고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저와, 탕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바짝 약이 올라서 그러셨는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쫓아다니는 할머니 사이로 평소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사실 얼굴만 본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순간 탕 속에 빠져 죽고만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날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얼마나 흠씬 매를 두들겨 맞았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다만 경해와는 그 이후로 등하교 때에나 수업시간에 어떻게든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목욕탕 얘기를 꺼낸 것은 지금 지구촌 어디에 있을 경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8년 전 돌아가신 친할머니 때문입니다. 절 그렇게 아끼신 당신을 저는 무척 싫어했습니다. 목욕탕에서뿐 아니라 시장에서 콩나물 한 줌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시는 할머니가 구차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걷고는 했지요.
그런 기억들이, 지금에 와서는 너무 안타깝고 죄스러운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고 더 닦아 주고 싶어 하시던 그런 할머니가 계셨다는 것은 귀한 축복이고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다만 그러한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았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제 뒤늦게 할머니와의 추억앨범을 들춰보며 아쉬움을 달래보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할머니의 여윈 등에 비누칠을 해드렸더라면 하는 회한은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기억 하나. 첫눈이 오면 40년째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인 피천득(皮千得) 선생님과 아버지. 열세 살 때부터 아버지 손에 이끌려 피 선생님께 새배 드리러 갔습니다. 30년이 넘었네요. 이젠 제 아들놈까지 이어지니 3대에 걸친 인연이라고 봐야지요. 두 해 전까지만 해도 올해 연세가 95세인 피 선생님을 모시고 한 달에 한 번씩 목욕탕에 가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선생님께선 “천국이 따로 없어. 임금이라도 이런 호강은 누리지 못했을 거야”라며 좋아하셨지요.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그토록 좋아하시는 일인데도 솔직히 모시고 가는 저의 심정은 즐겁고 편안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힘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부축하고 목욕탕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특히 미끄러운 바닥을 걸을 때에는 등짝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습니다. 목욕물이 너무 뜨거울세라 사전에 주인한테 미리 ‘부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얼추 목욕을 끝내시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말리실 때에야 비로소 전 후딱 냉탕에 몸을 집어넣습니다. 비누칠은커녕 땀도 제대로 닦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서 목욕가기 전에 집에서 미리 목욕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지금도 연세에 비해 피 선생님은 건강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때처럼 동네 목욕탕에 모시고 갈 정도로 기력이 좋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전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모시지 못했던 것을….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피 선생님께서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 봅니다. 그래도 굳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마도 남모르는 저만의 ‘고해성사’ 의식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리 해야만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은 이기심에서 비롯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얄팍한 마음 씀씀이와는 상관없이,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와는 달리 피 선생님의 경우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선생님께서 아직 건재하시고 이 겨울 잘 지내시고 좋아하시는 새봄이 오면 다시 ‘천국’ 같은 목욕탕에 모시고 갈 ‘기회’가 있으니까요.
늘 후회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고 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 자신의 미약함을 깨달아 겸손을 취하라는 경구이지, 그것을 변명 삼아 같은 잘못을 거듭해도 좋다는 면죄부가 아닐 것입니다. 아니, 남의 말 할 것이 없겠습니다. 스승과 선배와 후배에게, 부모님과 형제와 자식에게, 친구와 지인들에게, 나는 늘 내 편한 생각으로 그들의 이해만을 구하지는 않았는지, 문득 부끄러운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나무는 조용히 있으려 하지만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려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孝而親不待)
이런 가슴 뭉클한 옛 글을, 꼭 부모님을 모시는 일이 아니어도, 우리는 세태에 맞게 요즈음 말로 풀어서 사용합니다. “있을 때 잘해!” 맞습니다. 어제 일 핑계 대지 말고, 오늘 이 자리에서 지극한 마음을 다해야 내일 후회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힘찬 기분으로 이 글을 맺자면, 지금 무엇이든, 누구든 ‘있다’는 것은 아직 좋은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문화일보 200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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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지나 큰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보니 온 세상이 하얗습니다. 강아지 만큼이나 행복했습니다. 문득 "기적은 바로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에 있다"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 지금 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났구나!'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대학로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 오전 일찍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첫 만남이고 뵙고 싶었던 분이라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같이 일어나 정성껏 기도일기를 쓰고 곱게 화장을 했습니다. 궂은 날씨지만 치마에 구두를 신었습니다. 미끄러운 길 위에서 구두 신은 몸은 예고 없이 수시로 휘청휘청거렸습니다. 한발한발 조심 또 조심하며 걸었습나다.
전 겨울이 무섭습니다. 빙판길을 걷다가 엉덩방이를 찍는 건 예사이고, 종종 발에 힘이 풀려 발목을 삐기도 합니다. 한번 삐면 이게 습관이 되서 또 삡니다. 별 수 없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야 하지요. 전 이제 주사 맞는 것 보다 침 맞는게 마음이 더 편합니다.
어제는 명동성당에서 가톨릭합창단 정기연습이 있는 날. 연습이 끝나고 신부님께서 맥주 한잔 사주셔서 근처 호프집에서 하얀 밤을 배불리 채웠습니다. 따뜻한 잔을 기울이느라 밤 11시가 되어서야 귀가하게 됐습니다. 그새 내린 눈으로 길은 더 미끄러웠습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길 미끄러우니까 조심하라시며. 네, 하고 무심히 끊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 버스로 갈아탔습니다. 조금만 더 조심히 걸으면 무사히 집에 들어갈 수 있다, 발에 힘을 주고 마지막 각오(?)를 다졌습니다. 버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는데, 저 멀리 정류장에서 아버지가 서 계십니다. 한손에는 제 운동화가 들려 있습니다. 구두 신고 나간 딸이 혹시나 미끌어질까봐, 추운 밤에 아버지는 그렇게 서 계셨습니다.
여자에게 아버지는 최초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전 무척이나 미워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는 술을 엄청 많이 드셨습니다. 술 드시고 들어오신 날은 어김없이 온 집안이 전쟁입니다. 엄마와의 잦은 싸움에 전 '분노'라는 감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철 없을 땐 엄마에게 이혼하라는 말도 서슴없이 했습니다. 무능력해 보이는 아버지가 한심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아버지의 일기장을 훔쳐 본 일이 있었습니다. 언니가 장애 판정을 받고 한창 치료를 받으러 여기저기 다니면서, 부모님께서 점점 포기해 갈 때 즈음의 일기였던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일기 속에서 저는 아버지의 눈물을 읽었습니다. 그후 제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대신 '연민'이란 감정이 들어섰습니다. 오죽하셨을까, 어린 저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맨손으로 다 큰 딸의 운동화를 들고 버스정류장에 서 계신 아버지를 보고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제 운명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어느새 아버지는 저와 키가 비슷해져 계십니다.
그리고 늦은 고백을, 더 늦기 전에 합니다.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 당신의 딸인게 자랑스럽습니다, 정순화
<살며 생각하며> 피천득 선생과 목욕
김성구 / ‘샘터’ 발행인
날이 추워지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나 뜨끈뜨끈한 아랫목만 생각나는 게 아닙니다. 얼었던 온몸을 눈 녹듯 풀리게 만드는 곳, 요즘처럼 요란한 시설을 갖춘 사우나가 아닌 남탕과 여탕 사이에 큰 구멍이 뚫려 있어서 서로 대화(?)도 가능한, 열 평 남짓한 동네목욕탕이 그리워집니다. 옛날이 생각납니다.
오래된 기억 하나. 뜨거운 탕 목욕을 좋아하는 아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집안 막내인데다가 키도 유독 작은 저를, 어르신들은 자주 앞장 세워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싫다는 것을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긴 덕분에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자의반타의반(?)으로 여탕에 출입했습니다. 특히 친할머니는 수건을 두어 번 겹쳐 껍질이 벗겨지도록 제 작은 몸 구석구석 때 밀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여탕을 ‘졸업’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유치원 동창이고 초등학교 짝인 경해를 그만 목욕탕에서 조우하게 된 것입니다. 그 날도 할머니는 저와 한바탕 씨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탕을 사이에 두고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저와, 탕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바짝 약이 올라서 그러셨는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쫓아다니는 할머니 사이로 평소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사실 얼굴만 본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순간 탕 속에 빠져 죽고만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날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얼마나 흠씬 매를 두들겨 맞았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다만 경해와는 그 이후로 등하교 때에나 수업시간에 어떻게든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목욕탕 얘기를 꺼낸 것은 지금 지구촌 어디에 있을 경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8년 전 돌아가신 친할머니 때문입니다. 절 그렇게 아끼신 당신을 저는 무척 싫어했습니다. 목욕탕에서뿐 아니라 시장에서 콩나물 한 줌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시는 할머니가 구차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걷고는 했지요.
그런 기억들이, 지금에 와서는 너무 안타깝고 죄스러운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고 더 닦아 주고 싶어 하시던 그런 할머니가 계셨다는 것은 귀한 축복이고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다만 그러한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았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제 뒤늦게 할머니와의 추억앨범을 들춰보며 아쉬움을 달래보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할머니의 여윈 등에 비누칠을 해드렸더라면 하는 회한은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기억 하나. 첫눈이 오면 40년째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인 피천득(皮千得) 선생님과 아버지. 열세 살 때부터 아버지 손에 이끌려 피 선생님께 새배 드리러 갔습니다. 30년이 넘었네요. 이젠 제 아들놈까지 이어지니 3대에 걸친 인연이라고 봐야지요. 두 해 전까지만 해도 올해 연세가 95세인 피 선생님을 모시고 한 달에 한 번씩 목욕탕에 가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선생님께선 “천국이 따로 없어. 임금이라도 이런 호강은 누리지 못했을 거야”라며 좋아하셨지요.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그토록 좋아하시는 일인데도 솔직히 모시고 가는 저의 심정은 즐겁고 편안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힘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부축하고 목욕탕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특히 미끄러운 바닥을 걸을 때에는 등짝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습니다. 목욕물이 너무 뜨거울세라 사전에 주인한테 미리 ‘부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얼추 목욕을 끝내시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말리실 때에야 비로소 전 후딱 냉탕에 몸을 집어넣습니다. 비누칠은커녕 땀도 제대로 닦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서 목욕가기 전에 집에서 미리 목욕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지금도 연세에 비해 피 선생님은 건강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때처럼 동네 목욕탕에 모시고 갈 정도로 기력이 좋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전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모시지 못했던 것을….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피 선생님께서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 봅니다. 그래도 굳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마도 남모르는 저만의 ‘고해성사’ 의식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리 해야만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은 이기심에서 비롯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얄팍한 마음 씀씀이와는 상관없이,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와는 달리 피 선생님의 경우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선생님께서 아직 건재하시고 이 겨울 잘 지내시고 좋아하시는 새봄이 오면 다시 ‘천국’ 같은 목욕탕에 모시고 갈 ‘기회’가 있으니까요.
늘 후회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고 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 자신의 미약함을 깨달아 겸손을 취하라는 경구이지, 그것을 변명 삼아 같은 잘못을 거듭해도 좋다는 면죄부가 아닐 것입니다. 아니, 남의 말 할 것이 없겠습니다. 스승과 선배와 후배에게, 부모님과 형제와 자식에게, 친구와 지인들에게, 나는 늘 내 편한 생각으로 그들의 이해만을 구하지는 않았는지, 문득 부끄러운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나무는 조용히 있으려 하지만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려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孝而親不待)
이런 가슴 뭉클한 옛 글을, 꼭 부모님을 모시는 일이 아니어도, 우리는 세태에 맞게 요즈음 말로 풀어서 사용합니다. “있을 때 잘해!” 맞습니다. 어제 일 핑계 대지 말고, 오늘 이 자리에서 지극한 마음을 다해야 내일 후회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힘찬 기분으로 이 글을 맺자면, 지금 무엇이든, 누구든 ‘있다’는 것은 아직 좋은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문화일보 200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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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지나 큰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보니 온 세상이 하얗습니다. 강아지 만큼이나 행복했습니다. 문득 "기적은 바로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에 있다"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 지금 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났구나!'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대학로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 오전 일찍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첫 만남이고 뵙고 싶었던 분이라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같이 일어나 정성껏 기도일기를 쓰고 곱게 화장을 했습니다. 궂은 날씨지만 치마에 구두를 신었습니다. 미끄러운 길 위에서 구두 신은 몸은 예고 없이 수시로 휘청휘청거렸습니다. 한발한발 조심 또 조심하며 걸었습나다.
전 겨울이 무섭습니다. 빙판길을 걷다가 엉덩방이를 찍는 건 예사이고, 종종 발에 힘이 풀려 발목을 삐기도 합니다. 한번 삐면 이게 습관이 되서 또 삡니다. 별 수 없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야 하지요. 전 이제 주사 맞는 것 보다 침 맞는게 마음이 더 편합니다.
어제는 명동성당에서 가톨릭합창단 정기연습이 있는 날. 연습이 끝나고 신부님께서 맥주 한잔 사주셔서 근처 호프집에서 하얀 밤을 배불리 채웠습니다. 따뜻한 잔을 기울이느라 밤 11시가 되어서야 귀가하게 됐습니다. 그새 내린 눈으로 길은 더 미끄러웠습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길 미끄러우니까 조심하라시며. 네, 하고 무심히 끊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 버스로 갈아탔습니다. 조금만 더 조심히 걸으면 무사히 집에 들어갈 수 있다, 발에 힘을 주고 마지막 각오(?)를 다졌습니다. 버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는데, 저 멀리 정류장에서 아버지가 서 계십니다. 한손에는 제 운동화가 들려 있습니다. 구두 신고 나간 딸이 혹시나 미끌어질까봐, 추운 밤에 아버지는 그렇게 서 계셨습니다.
여자에게 아버지는 최초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전 무척이나 미워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는 술을 엄청 많이 드셨습니다. 술 드시고 들어오신 날은 어김없이 온 집안이 전쟁입니다. 엄마와의 잦은 싸움에 전 '분노'라는 감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철 없을 땐 엄마에게 이혼하라는 말도 서슴없이 했습니다. 무능력해 보이는 아버지가 한심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아버지의 일기장을 훔쳐 본 일이 있었습니다. 언니가 장애 판정을 받고 한창 치료를 받으러 여기저기 다니면서, 부모님께서 점점 포기해 갈 때 즈음의 일기였던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일기 속에서 저는 아버지의 눈물을 읽었습니다. 그후 제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대신 '연민'이란 감정이 들어섰습니다. 오죽하셨을까, 어린 저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맨손으로 다 큰 딸의 운동화를 들고 버스정류장에 서 계신 아버지를 보고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제 운명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어느새 아버지는 저와 키가 비슷해져 계십니다.
그리고 늦은 고백을, 더 늦기 전에 합니다.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 당신의 딸인게 자랑스럽습니다, 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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