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생활상식'에 해당되는 글 213건

  1. 2006.10.01 농가월령가
  2. 2006.10.01 뇌세포의 조절은 볼륨방식
  3. 2006.10.01 우리민족의 역사
  4. 2006.10.01 이스라엘건국의 진실 1

농가월령가(정학유)

[해설]
  1. 한 해 동안 힘써야 할 농사일과 철마다 알아 두어야 할 풍속 및 예의 범절 등을 월령체로 기록한 작품. 다양한 농사 내용과 세시 풍속 등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농업 기술을 음률에 맞추어 흥겹게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농업 기술의 보급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민속학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조선 후기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실학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2. 그러나 농민이 그 스스로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는 점과 너무도 교훈적인 것이 많다는 점이 아쉽다 하겠다. 즉, 농촌 현실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지켜야 할 예의 범절이나 풍속을 중심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술자는 지시와 교훈을 내리는 입장에 서 있는 인물이다.절기 소개는 감탄형 종결어미 <-로다>를 사용하고, 농사일은 명령형 종결 어미 <-하라, -하소> 를 사용하고 있다.
  3. 구성 : 전체 13장으로 된 월령체. 각 장의 구성 형식이 같다.
    절기 소개 - 그 달에 대한 작가의 정서( 그 달의 정경 묘사) - 농사일 - 세시 풍속
  4. 의의
    ① 농촌 생활과 관련된 구체적 어휘가 풍부하게 나타남.
    ② 농촌 생활의 부지런한 활동을 실감있게 제시
    ③ 세시 풍속을 적은 월령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있다.
    ④ 우리말 노래로서 농업 기술의 보급을 처음 시도한 작품.
  5. 동동과 농가월령가
    형식면에서 월령체로 되어 있다는 점이 유사하나, 내용면에서 동동은 임에 대한 연모의 정을 표현하고, 농가월령가는 농가의 실생활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차이가난다.
  6. 농가월령가의 자연
    이 작품에서 자연은 노동의 현장이자 생활의 현장이다. 즉, 생산의 공간이며 완상(玩賞)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선 전기 사대부들의 노래에 나오는 자연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7. 주제 - 달과 절후에 따른 농가의 일과 풍속을 노래함.

[본문]

天地(천지) 肇判 (조판)하매 日月星辰(일월성신) 비최거다 日月(일월)은 度數
만들어지매 해, 달, 별
(도수)있고 星辰(성신)은 輾次(전차)있어 一年 三百 六十日에 제 度數(도수) 돌
차례 순서
아오매 冬至(동지) 夏至(하지) 春秋分(춘추분)은 日行(일행)을 推測(추측)하고
해의 움직임을 추측할 수 있고
上弦(상현) 下弦(하현) 望晦朔(망회삭)은 月輪(월륜)의 盈虧(영휴)로다 大地上
보름, 그믐, 초승 달의 차고 기움이로다
(대지상) 東西南北(동서남북) 곳을 따라 틀리기로 北極(북극)을 보람하여 遠近
기준으로 멀고 가까움
(원근)을 마련하니 二十四 節候(절후)를 十二朔(십이삭)에 分別(분별)하여 每朔

(매삭)에 두 節候(절후)가 一望(일망)이 사이로다
보름
⇒24절후가 마련됨


<정 월 령>

正月은 孟春(맹춘)이라 입춘(立春) 우수(雨水) 절후(節侯)로다. 산중간학(山中
1월,초봄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
澗壑) 氷雪(빙설)은 남았으나 平郊(평교) 廣野(광야)에 雲物(운물)이 變(변)하도
평평한 들판 경치
다 어와! 우리 聖上(성상) 愛民中農(애민중농) 하오시니 懇惻(간측)하신 勸農綸
임금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히 여기시니. 지극히 간절하신
音(권농윤음) 坊曲(방곡)에 頒布(반포)하니 슬프다! 農夫(농부)들아! 아무리 無
간절하게 농사일을 권하는 임금님의 말씀 방방곡곡에 널리 펴시니
知(무지)한들 네 몸 利害(이해) 姑捨(고사)하고
聖意(성의)를 어길소냐 山田
고집하고 임금의 뜻(권농윤음)
水畓(산전 수답) 相半(상반)하여 힘대로 하오리라. 一年 豊凶(풍흉)은 測量(측
밭과 논을 서로 나누어 1년의 풍년과 흉년 헤아리지
량)하지 못하여도 ㉠人力이 極盡(극진)하면 天災(천재)를 免(면)하나니 제 각각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勸勉(권면)하여 게을리 굴지 마라
부지런히 권하여 ⇒농사일 권면

一年之計 在春(일년지계 재춘)하니 凡事(범사)를 미리 하라. 봄에 만일 失時
일년의 계획은 봄에 함.
(실시)하면 終年(종년) 일이 낭패되네. 農地(농지)를 다사리고 農牛(농우)를 살
해를 마치는 일이
펴 먹여, 재거름 재워 놓고 一邊(일변)으로 실어내어, 麥田(맥전)에 오줌듀기
보리밭
歲前(세전)보다 힘써 하소. 늙으니 근력(勤力) 업고 힘든 일은 못하여도, 낫이
새해가 되기 전
이영 녁고 밤의는 색기 꼬아 때 맛쳐 집 니우니 큰 근심 더럿도다. 實果(실
지붕을 이기 위해 엮은 짚.
과) 나모
 벗꼿 따고 가지 사이 돌 끼우기, 正朝(정조)날 未明時(미명시)의 試驗
정월 초하룻날 새벽
(시험)조로 하여 보소. 며나리 닛디 말고  小麴酒(소국주) 밋하여라. 三春百花時

(삼춘백화시)에
 花前一醉(화전일취)하여 보자  上元(상원)날 달을 보아 水旱(수

한)을 안다 하니, 老農(노농)의 徵驗(징험)이라 대강은 짐작나니.


⇒정월의 농사일

正朝(정조)에 歲拜(세배)함은 敦厚(돈후)한 風俗(풍속)이다. ㉡새 衣服(의복) 떨
두터운
쳐 입고 親戚(친척) 隣里(인리) 서로 찾아 老少 男女 兒童까지 三三 五五 다닐
이웃
적에
와삭 버석 울긋 불긋 物免(물색)이 繁華(번화)하다 사내아이 연 띄우고
설빔(색동옷)
계집아이 널 뛰기요 윷놀아 내기하기 少年들 놀이로다 祠堂(사당)에 歲謁(세
세배
알)하니 餠湯(병탕)에 酒果(주과)로다
떡국 술과 안주
⇒설날의 풍속

보름날 약밥 制度(제도) 新羅(신라)적 風俗(풍속)이라 묵은 山菜(산채) 삶아

내니 肉味(육미)를 바꿀소냐. 귀 밝히는 약술이며 부름 삭는  生栗(생율)이라 먼

저 불러 더위 팔기 달맞이 홰불혀기 흘러오는 風俗이요 아이들 놀이로다

⇒정월 대보름날의 풍속


<4월령>

四月(사월)이라 孟夏(맹하) 되니 立夏(입하) 小滿(소만) 節氣(절기)로다. 비 온
초여름 24절기의 일곱 째,양력 5월6일경. 양력 5월21일경

끝에 볕이 나니 日氣(일기)도 청화(淸和)하다.
⇒4월의 절기 소개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로 울고, ㉯보리 이삭 패어나니 꾀꼬리 소리한다. 農

事(농사)도 한창이요, 蠶農(잠농)도 方長(방장)이라. 男女老少(남녀노소) 汨沒
이제 막 한창

(골몰)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어, 寂寞(적막)한 대사립을 ㉰綠陰(녹음)에 닫았도

다. 棉花(면화)를 많이 가소 紡績(방적)의 根本(근본)이라. 수수 동부 녹두 참깨
길쌈 삶이하고. 모를 내기 위하여 논바닥을 곤죽같이 만들고

부룩을 적게 하소. 갈 꺾어 거름할 제 풀 베어 섞어 하소. 무논을 써을이고 이른
사이 사이에 다른 농작물을 심는 일(間作).

모 내어 보세. 農糧(농량)이 부족하니 환자(還子) 타 보태리라. 한 잠 자고
가을에 갚기로 하고 봄에 관청에서 꾸어가는 곡식

이는 누에 하루도 열두 밥을, 밤낮을 쉬지 말고 부지런히 먹이리라. 뽕 따는
한 번 자고 일어난 누에. 누에가 알에서 부화해서 고치를 만들 때까지 다섯 번 잠을 잠.

아이들아 훗그루 보아 하여, 古木(고목)은 가지 찍고 햇잎은 제쳐 따소. ㉱찔레꽃
나중에 딸 생각을 해서

滿發(만발)하니 적은 가물 없을소냐. ㉡이 때를 乘時(승시)하여 나 할 일 생각하소.
때를 탐

도랑 쳐 水道(수도) 내고 우루처(雨漏處) 개와(改瓦)하여 ㉲陰雨(음우)를 防
비 새는 곳 지붕을 고치는 일. 몹시 음산하게 오는 비

備(방비)하면 훗근심 더 없나니.

봄낳이 필무명을 이 때에 마전하고 베 모시 形勢(형세)대로 여름 옷 지어 두소.
표백

벌통에 새끼 나니 새 통에 받으리라. 千萬(천만)이 一心(일심)하여 蜂王(봉왕)

을 擁衛(옹위)하니, 꿀 먹기도 하려니와 군신 분의(君臣分義) 깨닫도다.
부축하여 좌우로 호위함. 임금과 신하가 지켜야 할 도리.
⇒4월의 농사

파일(八日)에 懸燈(현등)함은 山村(산촌)에 不緊(불긴)하나 느티떡 콩찌니는 제
석가여래 탄신일에 등불을 켜 놓는 일. 쌀가루에 느티나무 연한 잎을 섞어 찐 떡
때의 別味(별미)로다. 앞 내에 물이 주니 川獵(천렵)을 하여 보세. 해 길고 潺風(잔
바람이 잔잔함.
풍)하니 오늘 놀이 잘 되겠다. 碧溪水(벽계수) 白沙場(백사장)을 굽이굽이 찾아

가니, 수단화 늦은 꽃은 봄빛이 남았구나. 촉고(數 )를 둘러치고 은린옥척(銀
눈이 촘촘한 작은 그물 은빛으로 빛나는 싱싱한 물고기
鱗玉尺) 후려 내어 盤石(반석)에 노구 걸고 솟구쳐 끓여 내니 八珍味(팔진미)
중국에서 성대한 잔치상에 갖춘다고 하는 여덟가지의 맛좋은 진기한 음식.
오후청(五侯鯖)을 이 맛과 바꿀소냐.
아주 맛있는 음식을 일컬음. 前漢의 성제때 누호라는 제후가 다른 네 제후와 함께 즐겼다는 음식


<8월령>


2
4절기의 15번 째. 9월 8일경 9월 20일경 밤낮 길이가 같게 되는 날
팔월이라 중츄(仲秋)되니
백로(白露) 츄분 졀긔로다 북두셩(北斗星) 자로 도
북두칠성의 자루부분이 돌아서
라 셔편(西便)을 가르치네, 선선한 죠셕 긔운 츄의(秋意)가 완연하다. 귀또람이
가을뜻이,가을다운 서늘한 기분이 뚜렷하다.
말근 쇼  벽간(璧間)에 들거고나. 아참에 안개 끼고 밤이면
이슬 나려, 백곡
이슬은 백로 절기와 관련됨
(百穀)을 셩실하고 만물을 재촉하니, 들구경 돌나보니 힘드린 일 공생(共生)하
여물게 하고
다. 백곡(百穀)의 이삭 패고 여믈 드러 고개 숙어, 셔풍(西風)에 익난 빗츤 황

운(黃雲)이 이러난다.
누렇게 익은 곡식

⇒8월의 절기와 들판 풍경

백셜 갓튼 면화송이 산호 갓튼 고초 다래 쳠아에 너러시니 가을볏 명낭하다.
고추 열매 처마 밝고 환하다
안팟 마당 닥가 노코 발채 망구 작만하쇼. 면화 다락키에 수수 이샥, 콩

가지오. 나무꾼 도라올 졔 머루 다래 산과(山果)로다. 뒤동산 밤대츄는 아이들

셰샹이라. 알암 모화 말이어라 쳘 대여 쓰게 하쇼. 명지를 끈허 내여 추양(秋
알밤 제사 때 명주 가을볕
陽)에 마젼하고. 쪽 듸리고 잇 듸리니 쳥홍(靑紅)이 색색이라. 부모님 연만(年

晩)하니 슈의( 衣)  유의하고, 그 남아 마루재아 자녀의 혼슈(婚需)하셰.

⇒면화와 곡식과 과실

집 우희 굿은 박은 요긴한 기명(器皿)이라. 댑사리 뷔를 매아 마당질의 쓰오
중요한 그릇이라 집사리 비를 만들어
리라. 참깨 들깨 거둔 후의 즁오려 타작하고, 담배 줄 녹두 말을 아쇠야 쟉젼
중생종 벼. 담배 한줄과 녹두 말을 팔아 아쉬운데
로 돈을 준비한다
(作錢)하랴. 장 구경도 하려니와 홍졍할 것 잊지 마쇼.
북어쾌 봐耐?/font>  츄셕
북어 20마리. 조기젓으로
명일 쇠아 보셰. 신도쥬(新稻酒) 오려숑편 박나믈 토란국을, 션산(先山)의
명절 햅쌀로 빚은 술, 올벼 송편,

졔물하고 이웃집 난화 먹세.
제사하고 음복
⇒가을걷이와 추석쇠기(세시 풍속)

며느리 말믜 바다 본집에 근친(近親) 갈 제, 개 잡아 살마 건져 거리와 슐
휴가 친정 부모를 뵈러 감. 개고기
병이라. 쵸록 쟝옷 반믈 치마
쟝쇽(漿束)하고 다시 보니, 여름지어 지친 얼골
남빛 치마 차려입고 농사지어
쇼복(蘇復)이 되얏나냐. 즁츄야  은 달에 지긔(志氣) 펴고 놀고 오쇼.
원기가 회복 되었구나 한가을 마음놓고
⇒며느리의 친정근친


금년 할 일 못 다하나 망년 계교(計較) 하오리라. 밀재 뷔여 더운가리 모맥
내년 계획하오리라 풀이름 베어 소낙비에 논을 갈아
(牟麥)울 츄경(秋耕)하세. 끗끄치 못 닉어도 급한 대로 것고 갈쇼. 인공(人功)만
밀과 보리를 가세 사람의
그러할가 텬시(天時)도 이러하니, 반각(半刻)도 쉴 때 업시 맛츠며 시작나니.
하늘의 때도 잠시 마치면

⇒ 밀과 보리 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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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세포 조절은 스위치 아니라 볼륨 조절방식 2006/08/19 21:40추천0스크랩0

뇌세포는 인체 안팎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대해 전기스위치처럼 한번에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테레오의 볼륨을 조절하듯 수천 가지의 상태로 적절하게 대응한다는 사실을 재미(在美) 한국인 과학자가 밝혀냈다. 이번 연구는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처럼 뇌세포 손상으로 인한 질병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미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의 박강식(朴康植·36) 박사는 “살아있는 세포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칼륨이온통로를 조절하는 k2.1 단백질에 인산(燐酸)이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 뇌세포의 활성이 수천 가지 상태로 미세하게 조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사이언스’ 18일자에 제1저자로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인체 안팎에서 자극이 들어오면 칼륨이온이 세포막을 오가면서 신경신호가 되는 미세한 전류변화를 일으킨다. 뱀에 물리거나 선천적 결함으로 칼륨이온통로에 문제가 생기면 뇌세포에 손상이 가 간질발작·뇌졸중·치매가 발생한다. 그러나 뇌세포가 칼륨이온통로의 기능을 조절하는 방법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박 박사는 “대부분의 세포들은 스위치 온-오프(on-off) 방식으로 성장과 증식을 조절하지만, 뇌세포는 다양한 신경신호를 동시에 받고 또 전달하기 때문에 섬세한 활성 조절 메커니즘이 발달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박 박사는 한양대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이영완기자 ywlee@chosun.com

박강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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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2006/08/14 15:17추천0스크랩0

민족과 역사에 대한 패배주의와 열등의식을 극복해야 한다.


요즘 사극이 많이 방영되어 방송 드라마란 특성에 비추어

재미를 추구하고 시청률에 신경 쓰다 보니

상당히 많은 부분의 픽션이 가미되어 일종의 역사왜곡을 염려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간 정통사학자들이 주장하던 교과서적인 역사,

즉, 일본의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그간의 우리 역사는

아직도 이병도의 진단학회를 앞세운 조선총독부의 역사 왜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를 뒤집는 역사 해설이 새롭게 주목되어서 기쁘다.


‘주몽’이나, ‘연개소문’을 보면

그간에 신화적인 부분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졌던 부분을 역사로 해석한다.


단군 조선 이전에 '배달국'이 있었고, 그 배달국의 왕은 ‘환웅’이었으며,

단군 조선은 환웅의 배달국을 뒤이어

환웅의 후예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곰을 토템으로 하는 토착부족과 연합하여

조선(고조선)을 세우고 역대 임금은 '단군'이라 하였다.


그 배달국의 환웅 중 '치우천황'은 황하 이북의 땅까지도

그의 통치지역으로 할 만큼 강대한 국력을 떨쳤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역사에서도 '치우'는 중국 역사의 시조라 부르는 3황5제와 동급

으로 대우하여 그들이 우러러 보고 두려워하는 '전쟁의 신'으로서 대우한다.


한나라에 의해 단군 조선이 망하고

해모수란 지도자를 모시고 국권회복 내지 국토회복을 위한

대 한나라 항쟁을 벌이다가 해모수는 죽고,

그의 아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그 고구려 건국의 바탕은 주몽이 8살 연상의 과부인 소서노와 결혼하여

소서노의 친정 부족인 계루부를 근거로 고구려를 건국한다.


단군신화를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곰이 처녀로 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는다.


고구려 건국신화를 보면 유화부인이 환웅을 만나 주몽을 잉태하여

주몽은 알에서 태어난다.


신라의 건국신화를 보면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가 모두 알에서 잉태한다.


이는 한마디로 당시의 외래부족의 총각과 토착부족의 처녀간에 잉태한

각 나라의 시조가 사생아로서 태어나고 그 출생의 떳떳치 못함을 각색하고자

또는 외래부족과 토착부족의 연합정권의 창업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기 위하여

만든 신화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


어찌 인간이 알에서 태어난단 말이며 아비, 어미 없는 아들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러나 역사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생아들은 많다.

우리나라 역사를 새운 이들뿐만 아니라 진시황, 한고조 유방도 사생아였고,

지저스 크라이스트도 사생아였다.


고구려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주몽과 연개소문은 사료의 부족함에

많은 픽션을 동원하나 그간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지 못한

생경한 역사 해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는 그간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던 역사관을 대폭 채용한 결과이다.


즉, 우리 고대역사가

배달국(환웅)-(고)조선(단군)-치우천황의 전성시대-(고)조선의 멸망

-해모수의 대 한나라 항쟁-부여, 옥저, 동예 등 열국시대-고구려 건국

-고구려의 한반도 이북/만주지역 통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을 보면 '삼족오(세발 달린 까마귀)'가

고구려의 상징으로 부단히 나온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일본축구국가대표팀의 공식 스포터즈인

‘울트라니뽄’의 마스코트가 바로 '삼족오'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일본 그들도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간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은

고-수전쟁, 고-당전쟁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전쟁으로 알고 있었지만

고-수전쟁, 고-당전쟁은 당시의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던

강대국 쟁탈전이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열세인 국가가 아니었고,

또한 당나라에도 열세인 군사력을 가진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수나라와 당나라와 고구려는 장장 12차에 걸친 전쟁을 벌였고

이는 대부분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수나라와 당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왕조로서 그들 중국 영토를 끊임없이

침탈하고 수,당과 교역하는 주변국과의 교역을 방해하는 고구려에 대하여

전면전쟁을 벌여 각각 나라의 운명을 걸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걸고 벌인

전쟁이 바로 고-수전쟁이고 고-당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간 왜 고구려가 강대한 국력을 가지고

백제와 신라를 통일하지 않았는가?

하는 끊임없는 의문을 가져왔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관계는 형제국으로서 상호 조공관계에 있었던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로서 고구려 입장에서는 백제와 신라는 아예 관심밖의

약소국이어서 크게 국경을 어지럽히지 않으면 가만히 놓아두는

요즘으로 치면 미국과 대한민국의 관계로 해석하면 우리의 의문은 절로 풀려진다고 본다.


동아시아의 강국 고구려는 한민족, 말갈족(이후에 거란, 여진, 몽고족으로

분화), 선비족-이 세민족을 통털어 ‘배달민족’이라고 칭함-의 연합국가로서

그 지도층은 한민족이 차지했다고 재야사학자들은 본다.


고구려는 결국 12차에 걸친 고-수전쟁, 고-당전쟁의 결과 국력의 피폐를 가져와서

멸망하게 되고 이에 따라 우리민족의 웅대한 역사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강대국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의 왕은 ‘당고종’이 아니라

바로 유명한 ‘측천무후’라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설인귀, 이세적, 소정방이란 당의 걸출한 장수들을 쥐락펴락하며

백제와 고구려 를 무너뜨린 당의 통치자는 바로 여인천하를 이룬

‘무측천’이란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당시의 당은 일시 국력을 상실하고 측천무후가 지배하는 ‘무씨왕조’였으니 말이다.


우리는 김유신, 김춘추를 3국을 통일한 영웅으로 대접하지만

국토의 5분의 4를 당에 내준 통일은 결코 통일이 아니다.

김유신, 김춘추는 우리민족의

역사를 찌그러뜨린 반역자가 더 어울리는 인물평일 것이다.


하지만 신라가 백제로부터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으면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를 멸망케 했을까?

그 신라의 몸부림은 그 때로 돌아가 보지 않으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김유신, 김춘추도 결코 욕할 수 없는 인물이다.

단지 자신이 속한 국가 신라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 결과가

신라 하나로 쪼그러진 한반도의 역사로 돌아온 것뿐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멸망으로 배달민족의 웅대한 역사는 막을 내렸다.

그에 더불어 당나라는 고구려의 웅대한 역사, 배달국의 역사, 단군조선의 역사를

깡그리 흔적도 없애버리고 우리의 역사를 형편없이 쪼그려뜨려 버린다.


이러한 한반도를 침탈한 당나라, 원나라, 왜의 배달민족 역사 없애기는

천여년에 결쳐 자행되고 그 결과로 우리는 우리의 고대 역사에 대한 사료가

없어 중국의 사서에 적힌 몇 줄에 기대고 가끔 발굴되는 고적이나 유물에서

우리의 영광된 역사를 유추하는 초라한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배달민족의 그 광영의 역사는 결코 종언되지 않았다.


당을 이은 송은 배달민족의 후예인 ‘거란족’이 건국한 요나라와

‘여진족’이 건국한 금나라에 의하여

중국 전토가 양자강을 기준으로 반분되는 남북조시대를 열었고,


배달민족의 후예 몽골의 징기스칸이 새운 원나라는

중국 전토를 통일한 왕조가 되었으며 몽골대제국은

세계 역사에 질풍노도의 시대를 열었다.


원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뒤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3백여년을 통치한

16세기말에는 배달민족의 후예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또 다시 중국 전토를 지배하게 되고

청나라의 역사는 서구 열강이 동진한 19세기말에야 끝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배달민족이 주도한 동아시아의 웅대하고 광영된 역사이다.


우리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

한민족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로 동일시하였으며

우랄알타이어를 사용하는 한민족, 말갈족,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을

배달민족이란 동아리안에 묶을 수 있는 한민족으로 보지 않고

서로 적대시하고 침략하고 피터지게 싸우고 지배하는 관계로만 보았으나


사실상 중국이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쟁취한 뒤의 동북아의 역사는

배달민족의 분파끼리의 골육상잔이었으며

이는 다분히 중국이 그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배달민족의 각 분파끼리

생존의 투쟁을 펼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필연적인 결과였을 뿐이다.


일본도 결국은 백제와 고구려와 신라의 유민들이 흘러들어가 건국한

우리의 아우의 나라로서 1905년 일본이 조선을 실질적으로 병탄한

을사조약 체결시 일본의 유명한 정한론자로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초대수상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천년의 원수를 갚았다’고 실토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의 북큐유슈우에 근거한 백제의 후손으로서

신라에 복속된 백제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을사조약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근래에도 일본 불침항모설을 주장하여 태평양전쟁이후 일본의 재무장을

주장한 나카소네 일본수상은 그 집안이 나카소네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핏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요사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일본 정계에서 앞장서 이끌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관방장관은 그 자신이 신라 유민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다.


바로 일본의 지배층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유민들과 그 후손들이며,

일본의 천황가도 금관가야의 허황옥 황후의 후예라는 연구 결과는 도처에 널려있다.


게다가 일본은 삶의 환경이 척박하다 보니 일본 개국이래

단 3백년 정도(헤이안시대, 무로마치막부, 도쿠가와 막부)의 평화기를 제외하고는

번간에 끊임없이 서로 토지 빼앗기를 위한 내전의 시대였으며,

이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타국의 침탈하는 전쟁도 여러 번 벌인바 있고

그 주 대상은 가장 가까운 우리 한반도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의 일본과 조선의 쟁패는 사실상 신라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조선과 백제,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일본과의 골육의 쟁패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의 팔자가 사납다 보니

중국의 당나라가 우리의 위대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난 뒤

우리의 고대사를 깡그리 없애고,

같은 배달민족인 거란의 침략, 몽골의 침략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사료마저

불타 없어져 버리고,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 정유재란, 청나라의 병자호란, 정묘호란으로

우리의 사료는 거의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일제 식민통치 40년동안 일본은 그들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우리의 역사 자체를 왜곡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타국의 침략에 위한 우리민족의 역사 말살의 결과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교과서에 나오는 이른바 정통 역사라는 것은

민족의 역사라고 논하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거짓과 왜곡이 판치는

치욕의 역사만 남아있는 것이다.


재야사학자들이 여러 가지 우리 배달민족의 역사를 발굴하고

우리의 영광된 역사를 증명하는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으나

민족 역사 왜곡의 앞잡이 진단학회의 후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통 사학계는

‘사료를 제시하라’고 윽박지르며 재야사학계의 주장과 논문들을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다.


역사가 왜 소중한가?


민족의 영광된 역사를 찾아야 우리 민족이 이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웅대하고 영광된 우리민족의 역사를 다시 한번 건설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간에 우리는 한반도 중심의, 우리 한민족 중심의 좁은 역사, 약소국의 역사에

끊임없이 세뇌당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으로서 한번도 타국을 침략하지 않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는 둥

창피한 약소국, 피지배국의 역사의 망발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시아를 호령하고 세계를 지배한

우리 배달민족의 웅대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자기네 땅에서 일어난 모든 이민족의 역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언어도단이고 거짓이고 억지 주장이다.


역사 연구의 방법론에서도 역사의 주역은 사람이고, 민족이다.

한민족, 말갈족, 거란족의 ‘배달민족’의 역사는

그 직계후손인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이 좁은 한반도의 역사에서 벗어나 배달민족의 역사를 찾아

영광된 배달민족의 웅대한 새 역사를 건설해야만 한다.


자! 우리 모두 좁은 눈을 크게 뜨고 좁은 마음을 크게 열어

우리 스스로를 좁은 울타리에 가두지 말고

세계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는 새 역사를 건설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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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gfriend
 
이스라엘 건국의 진실 2006/08/14 15:29추천0스크랩3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의 대결국면이 소강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서구언론이고, 아랍언론이고, 한국언론이고 할 것 없이헤즈볼라에 다소 동정적인뉴스 보도 때문에 이스라엘은 죽일 놈이 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헤즈볼라 측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을 과장하거나 조작한 사진도 여러건 적발됐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자국 군인 2명을 구하기 위해 국가가 최선을 다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테러 세력에는단호한 결의와 실천을 보여주며, 주변의 아랍국가들이 모두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을때 생존 차원에서즉각적인 보복을 한다는 점에서는이스라엘을 높이 평가합니다.

다만, 전쟁이란 어차피 군인이든 민간이든 범벅이 되어 죽는사태란 점을 감안해도, 그리고 헤즈볼라측에서과장되고 조작된 사진을 내보내고 이를 서구언론과 한국언론이 여과없이보도한 점이 아쉽다곤 해도, 이스라엘의 반격은 지나친 측면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유대인의 판단 매커니즘과사고 특성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지요.

그런데, 몇몇 관련 기사를 보면서일부 언론에서정확하게 보도하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바로 '......이스라엘이 나라를 다시 세울때 팔레스타인 땅을 강제 점령하여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을 내쫓았다.....'는 비과학적인 지적입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이 적극 도와주었고.....'란 비역사적인 사실까지 첨부됩니다.

어찌된 판인지, 국내에서 식자층이라는 사람들까지도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보다 정확한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선 2개의 훌륭한 분석 글을 '펌'하여소개합니다.

여러분께서 혹시 다른 역사적인 자료가 있다면 보내주십시오.

[첫째글입니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이 된 과정

2차 대전 전

팔레스타인 지역은 1917년까지 오트만 제국의 차지였다.(400년 이상) 로렌스와 알렌비장군의 합력으로 아랍연맹이 탄생하며 오트만은 물러나고 지금의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대부분과 이스라엘, 예루살렘,서안뱅크, 가자지구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영국자치령(총 넓이 8,940,374km2 /남한99,646 km2 /현 이스라엘 22,145 km2)이 생겨났다.

팔레스타인 영국령의 영토(1920년 표식)

Palestine1920.jpg

이때는 이미 1870년 부터 불기 시작한 시오니즘의 영향으로 몇만명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에게서 합법적으로 돈을 지불하여 농장과 땅 등을 구입하여 속속 들어와 입주하기 시작하던 때이나 이미 팔레스타인 인들은 유태인의 이주를 폭력과 테러를 써가며차단에 들어갔다. 원천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기 시작하며 이집트자치령에서 대량의 식량을 구입, 팔레스타인에 원조하고 수도 시설을 개량하여 전염병을 퇴치하였다. 새로운 철도와 통신을 확장했고 아랍인들의 오랜 부패를 근절했다.

이 기간 영국은 아랍에게는 아랍자치국 건설을, 유태인에게는 유태국가 건설을 각기 약속해주었다. (벨푸어 선언;1917)

당시 이 지역은 다민족이 거주하는 곳으로 1920년 조사에 의하면, 인구 75만명이고 무슬림, 베드윈(1922년 10만3천명), 그리고 유태인들(7~8만명) 외에 시리아, 수단, 체르케스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사우디아라비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2년 팔레스타인 자치령령이 국제연맹을 통과했는데, 여기에도 역시 유태인 국가 창설이 약속되었다. 그 문서의 많은 조항들이 유태인의 이주와 국가창설을 도울 것을 언급하였다.

1920년 그간의 유입 중 최대 숫자인 10만명의 유태인이 하스트루닷 운동에 의해 그 지역으로 이주했다. 비유태인은 6천명이 이주했다.

하스트루닷은 먼저 이주한 유태인들이 기금을 모아 새로운 이주민들이 유태농장을 경영하는 것을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었다.

유태인들의 이주는 초기에는 반대를 거의 겪지 않았으나 19세기 말부터 유럽에 불기 시작한 반유태 운동으로 이주민이 늘어나자 원주민들과 마찰이 심해졌다.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지도자들에 의해 유태인에 대한 폭력 테러가 부추겨졌다. 아랍인들의 너무 많은 공격에 대비키 위해 하가나(이스라엘 국회조직)가 만들어졌다. (1920.6.15.)

1921,1929년의 아랍인에 의한 유태인 공격은 특히 극심했다. 1936-1939년도 극심했다.

1936년 유태인들은 지도자이젤과 레히의 지도 아래 영국과 아랍인들에게 마찬가지 폭력시위를 하기로 했다. 이것이 영국정부로 하여금 그들을 테러집단으로 분류하게 만들었다.

1936-1939년은 마찬가지로 아랍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아랍 사회주의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해다. 이 운동은 독일 히틀러 등장으로 추방이 늘던 유태인들을 특히 겨냥했고 후세이니 가문이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유태인들보다 아랍인들을 더 많이 살해했다. 그들은 이 운동을 자기네 정적을 처형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후세이니는 나중에 레바논으로 도망했으며 그후엔 이라크로 최종엔 1941년 독일로 들어갔다.

영국은 유태인들의 토지구입에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특히 팔 자치지구의 자치권--유태인과 협력하에 시행하기로 한-- 은 거부했다.

1939년 영국은 아랍에게 8500 에이커를 할당하고 유태인에게는 4100 에이커를 할당했다.

2차대전 기간과 그 후

2차대전 기간 아랍은 그들 간에 합치라는 것은 없으나 대부분은 유태와 영국에게서 팔레스타인을 빼앗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지도자들중 예루살렘의 그랜드 무티, 알 후세이니(이라크로 도주한)가 동맹국에 대한 지하드(성전)을 선언했다.

히틀러 독일은 아랍세계에서 영국을 제치기 위해 아랍을 지원했다. 아랍계 중 히틀러를 반대하던 일부 아랍은 팔레스타인군을 창설, 6천명의 팔아랍군과 2만6천명의 유태인군을 자원, 영국군에 들어간다.

1942년 롬멜의 지휘로 독일군이 수에즈 운하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자 팔레스타인이 독일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던 아랍, 유태인들과 영국은 팔마치라는 훈련정예부대를 창설하는데 이것이 나중에 하가나로 속하게 된다.

홀로코스트가 팔레스타인 상황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기간 영국은 팔레스타인에로의 유럽출신 유태인의 이주를 금했고 그들은 따로 아프리카 동남단 끝의 마우리티우스 국에 난민캠프를 짓고 수용했다.

1939년이 시작되면서, 시온주의자들은 불법이민단체 '알랴 벳'을 조직 '하모싸드 레알랴 벳'의 지휘하에 폐선 직전의 배들을약탈해서 거기에수만명의 유태인을 태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킴으로써 홀로코스트에서 구출해냈다.

마지막으로 오던 배(스트루마)가 1942년2월 소련잠수정에 의해 격추되어 768명의 유태인들이 수장됐다.

알랴후 하킴과 알랴후 벳 주리(유태레히지하운동 멤버)가 1944년11월6일 영국의 고위정치가 모이네 경을 그가 스트루마 호의 팔레스타인 기항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카이로에서 암살했다. 모이네 경은 처칠과 가까웠으며 이 이유로 처칠은 그후 반시온주의로 돌아섰다.

이때 영국은 아랍에서 나는 기름 확보를 위해 아랍의 협력을 더 중시했다. 그런 이유로 유태민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막았다.

모이네 경의 암살결과로 하가나 조직이 이르군단(유태군사조직)을 납치, 심문하고는 영국군에게로 넘겨주었다. 이 기간을 사냥시즌이라 부른다. 이때 이르군단은 내부적으로 그런 하가나에 절대 대항하지 말도록 명령내렸다. 그로써 하마터면 번질 뻔한 유태인들간의 내전은 차단되었다.

2차대전의 결과 25만명의 유태인이 유럽에서정처없이 방황하게 되었다. 트루만과 앵글로 미국 위원회의 요구에 영향받은 세계 여론에 불구하고 영국은십만명의 근거지를 잃은 유태인들에 대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토록 한 법안을 해지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유태인들은 단합하여 영국에 대한 여러 차례 공격을 실행했다. 1946년 이르군단이 예루살렘의 다윗호텔을 폭파했다. 거기는 영국군 사령부가 있었으며 92명이 죽었다.

그 결과,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기로 선언하고 1948년5월 철수했다.

유엔하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 유태인 분쟁을 종식키 위해 특별위원회(UNSCOP)구성. 아랍독립국 창설과 유태독립국 창설의 목표 및 예루살렘을 유엔 감시하에 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두번째 것은 오스트리아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냄으로써 첫째 목표만 채택되었다. 그 결의는 유엔총회에서 각각의 구역 분할이 확정되었으며 독립국 개시는 영국군 철수일로부터 시작하는 걸로 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령 지역에 대한 분할 계획은 팔-아랍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아랍인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유태인 특사와 유태인 다수는 찬성했다. 유태인들은 이 결의가 통과된 날인 11월29일을 이스라엘 건국의 중요한 기념일로 친다.

영국군이 철수하던 일자에 유태지방자치기구는 유태국가 설립을 선언하고 국경내의 시민들의 권리--그들이 아랍인이건, 유태인이건, 베두윈이나,드루즈인이건 불문코--를 인정한다는 발표를 했다. 1948년5월14일이 이스라엘국가설립 선언일이다.

유엔이 분할한 이스라엘영토와 아랍영토 지도

노란색: 아랍구획. 주황색: 이스라엘구획

1947[1].png

지금의 이스라엘

Is-map.png

결론.

현재 헤즈볼라 테러집단을 옹호하는 그릇된 시각이 한국인들, 특히 우익 속에 많이 퍼져있는 현상을 경계한다. 그들은 내세우는 논리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사는 무고한 양민들을 내어쫓고 그 땅을 차지했다고 우긴다.

그러나, 위의 역사적 내용을 고찰하면, 유태인들의 국가건설, 특히 팔레스타인에의 건설에는 국제간의 약속이 그 바탕이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당시 팔레스타인(지금의 팔레스타인이 아닌 요르단, 시리아를 포함한 넓은 지역 )에 100만명정도거주했을 뿐인 아랍인들이 오토만제국의 멸망으로 주인이 없어진 그 넓은 지역내에 2천년간 유랑하고 유럽의 반유태주의로 갈 곳 없어진 유태인에게 유엔과 국제협약이 약속한 국가건설을 거부, 차단하고 나섰다는 데 있다. 그런 아랍인들의 태도가 오늘까지 이어진 테러의 근본 이유이다.

게다가 유엔이 정한 분할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도 네게브 사막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스라엘에 할양된 평야지대는 샤론해안, 여즈리엘 계곡, 요르단 계곡이고 당시는극심한 산림벌채와 모기떼 번식으로 말라리아가 굉장히 창궐하였고 아랍인들은기피하던 지역이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인구 구성은 2004년말 조사로유태인 76.2%, 무슬림 2.1%, 기독교인 1.6%, 드루즈, 러시아 이주민,소수파 유태인들이 1.6 %이며아랍인들은종교자유를 허용치 않는 반면, 이스라엘은 종교자유가 보호되어 있다.

2006.8.13. 파아란 한은경 정리.

팔 영국령의 인구구성:

YearTotalMuslimJewishChristianOther
1922752,048589,177(78%)83,790(11%)71,464(10%)7,617(1%)
19311,036,339761,922(74%)175,138(17%)89,134(9%)10,145(1%)
19451,764,5201,061,270(60%)553,600(31%)135,550(8%)14,100(1%)

[둘째글입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가장 흔한 비방은 이스라엘이 수천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 토착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빼앗았다는 주장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팔레스타인 땅의 역사와 현대 이스라엘 건국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면 그러한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영국이 일차세계대전 이후(1917) 중동지역의 땅을 점령하면서 부르던 이름일 뿐이며,현재의 팔레스타인에 살고있는 아랍족과 구약성경에 있다가 사라진 팔레스타인(블레셋족)과는 전혀 다른 종족입니다.

블레셋 족속조차도 구약의 유태인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려고 할 때 이미 그곳에 살던 종족들이아니라 나중에 들어온 종족이며 그곳에 살던 종족은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므로 현재 지구상에 남아있는 종족만으로 보자면 그 땅은 유태족에게 우선권이 있는 곳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땅은 여호수아의 인솔로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후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번성기를 거쳐 수천년을 유태인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된 이후로 유태인은 응집력이 사라지면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고, 이 땅은 그 후 여러 왕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로마, 이집트, 바그다드, 유럽십자군의 점령을 거치면서 이땅은 낙후된 벽지가 되었고 질병, 지진, 경제적 궁핍으로 비참한 땅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나무들에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나무들을 다 잘라 내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형편없는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늪지에서는 치명적인 말라리아균이 번식했고 토양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에서도 유태인들은 소수이지만 근근히 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오늘날 터키인 오스만 제국(1517-1917년)의 지배하에서도 약 1000호 정도의 유태인들이 이 땅에 살았습니다.

이 유태인 공동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과 이 땅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유태인의 후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스만 제국 초기에 유태인의 생활이 개선되면서 이 지역으로 이주하는 유태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18세기 말경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소홀해지면서 갈릴리의 울창했던 삼림은 없어지고, 늪지와 사막이 경작지를 침식했습니다.

1869년대 이 지역을 여행한 마크 트웨인은 그 당시 이 땅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밤에 양떼를 지키고 천사들이 ‘땅에 평화를, 인류에게 좋은 소식을'이라고 노래하던 거룩한 이곳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다. 황폐한 땅, 맹수와 살그머니 숨어 있는 여우만이 고독의 침묵 속에 잠을 잔다."

유럽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본격적 이민을 오기 시작한 19세기 말엽 (1882년경), 이 땅은 황폐하고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유태인 이주민들은 유럽 각지, 특히 러시아, 폴란드,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극심한 박해를 피해 도망 온 망명자들이었습니다.

말라리아와 질병이 가득한 이 지역의 위생은 형편 없었으며 유아 사망률은 높고 평균 수명은 현저 히 낮았으며 물도 부족했습니다.

초기 유태인 이민자들은 불모의 땅을 경작지로 일구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불모지에서 늪지의 물을 빼고 나무를 심느라 과로하여 병들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황폐했던 땅에 수목이 자라고 농업이 가능해 졌으며 일자리가 창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이들의 수고로 점점 더 살만한 땅이 되어 갔습니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은 하나의 독자적인 민족이 살던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매우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살았습니다.

1911년 출판된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 의하면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50개 이상의 언어가 쓰여지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지역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랍과 유태인 이외에도 페르시아, 이집트, 수단, 그리스, 알제리, 조지아 등의 국가에서 온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1500년대에 약 5000명에 불과했던 유태인의 수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할 당시(1914년)에는 85,000명에 이르렀습니다.

유태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아랍 정착민도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태인들의 정착으로 불모지가 경작지가 되고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주변 아랍인들을 끌어 들였기 때문입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882년 유태인 가정 40호가 있으면 400호 이상의 아랍 가정을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이런식으로 아랍 사람들은 유태인 마을 주변에 자기들의 마을을 형성하였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의 인구도 증가하였습니다.

요약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70년 이래 한번도 독립국가의 영토인 적이 없었습니다.

16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터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이 지역에는 유태인을 비롯해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19세기 말엽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심한 박해와 시오니즘의 영향을 받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본격적 이민을 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팔레스타인 땅은 한마디로 인간이 살만한 땅이 아닌 불모지였기 때문에 인구는 너무나 희박했습니다.

이 불모지를 유태인 정착민들이 목숨과 재산을 바쳐가며 온힘을 다해 살만한 땅으로 일구어 놓았던 것입니다.

<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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