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 공간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이탈리아 관광청에서 할리우드에 돈을 투자해 만든
홍보영화라고 해도 믿을 법한
‘투스카니의 태양’을 처음 보았을 때,
언젠가 영화의 흔적을 좇아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리라 결심했다.
토스카나(투스카니는 영어 이름) 지방의
피렌체와 코르토나에서
남부의 포시타노까지.
로마와 베네치아만 방문한 뒤
이탈리아를 알게 됐다고 여겼던 이전 경험은
경솔한 착각이었다.
◆피렌체의 햇살
피렌체 두오모(대성당)를 나설 때 비가 쏟아졌다.
파스텔 톤의 다양한 색상이 섞인 외벽에
붉은 돔을 지닌 이 성당은
웅장하면서 예쁘기도 해
흔치 않은 매력을 지녔다.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고
삶의 바닥에서 이탈리아로 도망치듯 떠났던
미국 여성 프랜시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
피렌체 두오모는 그녀의 첫 여행지인 동시에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연인들이
10년 후 재회하기로 약속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갑작스런 비에 당황할 때
아랍계 우산 장수들이 경쟁적으로 몰려들었다.
5 유로(6000원)를 치른 뒤
곧바로 붉은색을 집어들었다.
투어 버스에서 내리며
프랜시스가 펴든 것도 붉은색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것은 우산이 아니라 양산이었다.
‘색깔’은 흉내낼 수 있어도
‘용도’까지 맞출 순 없는 것.
환상과 현실은 의지로 간신히 만나
우연으로 쉽사리 헤어졌다.
베키오 다리와 우피치 미술관을 지나
갖가지 조각상들로 공간 전체가 야외 미술관 같은
시뇨리아 광장에 이르는 사이
하늘이 맑게 개었다.
비가 올 땐 시 전체가 텅 비고 우울한 느낌이었지만
어느새 광장엔 햇볕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부채살처럼 퍼져서 광장에 쏟아지는 빛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날씨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상상의 낙원 속에서 환희에 젖기도 하고
관계의 지옥 안에서 몸부림칠 때도 있지만,
사실 인간의 내면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프랜시스라면 어땠을까.
수십년 믿어오던 삶으로부터 배신당한 뒤
처음 발디딘 이 피렌체의 눈부신 햇살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코르토나의 지붕
코르토나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길을 묻고 또 물어 한 밤에 도착한
산 꼭대기의 소도시 코르토나는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였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성문을 지나
급경사의 골목길로 차를 몰다보니
요새 같은 구조에 자연스레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호텔 방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볼 때부터
느낌이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집들의 붉은 기와였다.
저 멀리 탁트인 평원과
정감 어린 농촌 마을로 이뤄진 원경이,
세월의 더께를 이고서
자연을 닮아가는 기와의 근경과 어울리면서
잊지 못할 그림 하나를 그려줬다.
프랜시스가 피렌체에 이어 들른 코르토나에 반해
충동적으로 집을 구입할 만 했다.
이 영화의 영향인지,
내가 묵었던 호텔 로비엔
코르토나의 부동산 매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담장 틈 사이 탐스럽게 피어난 들꽃에 경탄하며
프랜시스가 구입했던 성 밖 전원주택 ‘브라마솔레’로 갔다.
크게 흥행한 영화가 아니었지만,
코르토나 주민들은 그곳에서 촬영한
‘투스카니의 태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브라마솔레로 가는
4㎞ 남짓 산길이 쉽지 않아 몇차례 물었을 때,
이탈리아 사람들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친절로 안내를 해줬다.
5분 가까이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게 길을 가르쳐주다가
더 빠른 길이 어딘지
서로 언쟁을 벌이는 커플도 있었다.
때마침 차안에 틀어놓았던
굼베이 댄스 밴드의 히트곡 모음집 씨디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노래 ‘Sun Of Jamaica’를 듣다가
문득 자메이카의 태양을 상상했다.
이런, 투스카니의 태양을 보러와서
이젠 또다시 자메이카의 태양을 상상하다니.
어처구니 없게도 환상은
언제나 원심력으로 작동했다.
가까스로 찾은 브라마솔레는
주황색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고택이었다.
그러나 산 중턱의 탁월한 전망을 가진,
잘 단장된 정원 위에 부드럽게 얹힌 2층집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이 집을 산 프랜시스는
인부를 고용해 대대적으로 손을 본다.
어차피 여행이란 삶을 수리하는 기간이니까.
◆포시타노의 바다
소렌토에서 시작하는
40㎞의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아말피 해안)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해안 절벽을 끼고 굽이굽이 돌며
감겼다 풀리는 해안 도로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멋진 풍광을 내내 선사했다.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에서도 가장 예쁜 풍경은
‘투스카니의 태양’에 등장했던
작은 마을 포시타노가 빚어냈다.
색색으로 아름답게 박힌 절벽의 집들은
강렬한 햇살을 조명 삼아 뽀얗게 빛났고,
미로 같은 골목은 천장까지
4면을 둘러싼 꽃 장식과 개성 넘치는 가게들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변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온통 하얀 산타 마리아 아순타 성당을 지날 때
때마침 예식을 끝낸 하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때마침 오후 4시가 되자 맑은 종소리가
마을 전체로 푸르게 울려퍼졌다.
포시타노만큼 결혼식에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프랜시스 역시 이곳에서 만난 멋진 이탈리아 남자
마르첼로와의 낭만적인 결혼을 꿈꾸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 찾아온 사랑에
중년 여인은 가슴 설레며 달콤한 기대에 젖었다.
이곳으로 프랜시스를 데려온 마르첼로는
그녀에게 지역 특산주인 리몬첼로를 맛보게 하며
감미롭게 유혹했다.
음료수와 술을 파는 곳에 들어가
첼로 모양의 유리병에 담긴
리몬첼로 한 병을 샀다.
한 모금 맛보니
먼저 리몬향이 입천장으로퍼져 휘발된 뒤
돗수 높은 알콜이 혀를 골고루 찌르며 가라앉았다.
단맛은 짧게 머물렀고
쓴맛은 길게 남았다.
마르첼로는 프랜시스에게 리몬첼로가
25%의 설탕과 75%의 알콜로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삶의 맛도 혹시 그런 게 아닐까.
25%의 단맛과 75%의 쓴맛.
출산을 앞둔 친구 때문에
마르첼로와의 약속을 몇차례 미룰 수 밖에 없었던 프랜시스는
사랑을 찾아 다시 포시타노에 오지만
그 사이에 마르첼로가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린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그녀는 그 모든 좌절을 이겨낸다.
거듭 사랑을 잃고서야
그는 이국의 마을에서 새로운 인생행로를 발견한다.
‘투스카니의 태양’은 프랜시스의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뜻밖의 일은 항상 생긴다.
그로 인해 인생이 달라진다.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조차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그리스의 섬 카스텔로리조에서
뉴질랜드의 도시 크라이스트처치까지,
각지를 다니다보면
여행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새 삶을 사는 사람들과 종종 마주쳤다.
그런데, 마음만 고쳐 먹으면
정말 달라질 수 있는 걸까.
훌훌 털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면
진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리몬첼로 값을 치르려 가방을 뒤지다가
비행기표가 손에 걸려 나왔다.
다음날 오후 2시30분.
내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저 멀리 바다의 실존이
홀로 시퍼렇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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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자랑인 우피치 미술관의 회랑 풍경입니다. 이제 막 비가 그쳐 바닥이 젖어 있어요.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이예요. 갑자기 날이 맑아지니 정말 광장 자체가 반짝반짝 빛나더군요.
피렌체 중심을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는베키오 다리지요. 다리 위에 보석 가게 등이 들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데, 예전엔 푸줏간들이 이 다리 위에 늘어서 있었다고 하네요.
제가 투숙했던 코르토나의 호텔 방 창문을 열고 찍은 사진입니다. 광각으로 찍고 싶었지만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에 그런 기능이 있을리 만무하죠. -.- 참, 코르토나에서는 사전에 예약을 못했던 탓에, 눈에 띄는대로 이 호텔에 밤 11시 이후에 들어가 가격을 물었더니 원래 방값에서 3분의 1이나 깎아주더군요.
코르토나나의 시뇨렐리 극장입니다. 영화 속에서 프랜시스가 젊은 두 남녀의 사랑을연결해주는 곳이지요.
브라마솔레라는 이름엔 태양을 그리워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지요. 날이 맑았으면 참 좋았겠지만, 제가 이 브라마솔레를 찾은 오후엔 날씨가 좋지 않아서 좀 아쉬웠어요.
이건 폼페이의 거리 풍경입니다. 유적지 앞의 도로였는데 정말 색깔이 예뻐서 여러장 사진을 찍었지요.
폼페이에서 소렌토로 가는 길에 잠시 멈춰서서 이 집에서 점심으로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었어요. 워낙 유명한 피자 전문점이라는데, 사진에서 보시는 것은 1미터짜리 피자입니다. 손님이 주문하는 크기대로 이렇게 만들어온답니다. ^^
포시타노는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더군요. 포시타노의 골목은 전부 이렇게 예쁘더라구요.
이건 포시타노의 해변이예요. 집들이 정말 색색이죠? 이 사진 오른쪽에는 일광욕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