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0. 4. 15:19 살아가는 이야기
나의 아버지 1925년-1937년의 생생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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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아버지입니다. 나는 여덟 살에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에 들어갔다. 보통학교는 우리 마을에서 약 2 킬로 떨어진 義 興 面 사무소 소재지인 義 興 面 邑 內 洞 장터에 있었다. 義 興 장터의 아이들은 야무지게 설치고 우리는 어수룩한 촌놈 이었다. 보통학교 일학년 겨울에 나는 소위 윤감이 라고 하는 장 티부스에 걸렸다. 의술이 발달 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집에서 한 달반 동안 조(粟)를 끓인 물만 마시고 있었다. 그 바람에 병이 다 나은 뒤에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걸음걸이 연습을 오랫동안 한 뒤에 비로소 학교에 갈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몸이 약해저서 보통학교 졸업 때 까지 달리기는 항상 끝 등이었다. 보통학교 때 학교 성적은 일 이 학년 때는 보통 수준 이 엇고 삼학년 때부터 잘 하기 시작해서 오륙학년에는 3등을 했다. 1등 權 大吉과 2등 都敬熙는 나이가 많았다. 權 大吉은 졸업 후 대구농림학교에 들어갔고 都 敬 熙는 대구사범학교 입학시험에 낙방 한 후 八 公 山 巴 溪 寺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다가 병사 했다.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 맞 형님은 이미 자동차 운전면허를 가지고 대구의 여객버스회사에 취업하여 게셨다. 둘째 형님은 고향 義 興 우체국에 근무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내가 보통학교 4-5학년 때 형제들이 합쳐서 大邱 鍾 路 通 진 골목 입구에 양품점을 개업하였다. 자금은 맞 형님의 번 돈과 둘째 형님이 처가에서 빌려온 돈 일부라고 생각 한다. 상당히 규모 있는 상점으로서 삼형제(正 圓 正 斗 正 台)가 딸린 방 한 칸에서 자취하며 활기차게 열심히 일 하고 있었으며 주위에서 장내성이 있다고 평한 모양이었다. 내가 보통학교 5학년 방학 때 가 본 일이 있다. 그러나 한창 뻗어 나가려고 할 무렵 불의의 화재 사고로서 전소되고 화재 보험금의 지급도 오랜 날자가 걸렸고 결국 재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우리 집이 부자가 될 기회를 놓친 것이다. 대구 화재사건 이후 둘째 형님은 가족과 상의 없이 만주로 가시고 셋째 넷째 형님은 양품 행상을 하시다가 넷째 형님은 만주 신경으로 가시고 셋째 형님은 혼자 고군분투 하시다가 몇 년 뒤에 日本 大 阪에 있는 처남을 따라 가셨다. 형제들이 뿔뿔이 헤어졌다. 내가 보통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구상업학교 입학시험 차 대구에 갔을 때 형님들의 종로상점이 있던 곳을 찾아 가서 형님들과 친하게 지나던 안집 아주머니를 맛났더니 눈물이 한 없이 흘렀다. 큰소리로 한참동안을 울었더니 그 아주머니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한 것이 기억난다. 보통학교 시절에 또 한 가지 어머님께서 대단히 비통해 하신 사건이 있었다. 아버님께서 근무하시던 면사무소 에서 사건이 생겨서 아버님께서 연루되시어 금전 보상을 하셔야 될 일이 있었는데 첫째 형님과 둘째 형님이 합쳐서 변상하신 모양인데 둘째 형님은 처가에서 돈을 빌려 오셨다고 들었다. 그때 일본은 중국을 침범하여 中華民國의 수도인 南京을 점령하여 축하행사에 주민이 강제 동원 되여 밤중에 義 興 邑에 까지 끌려가서 제등축하행렬에 동원 되었었다. 또 보통학교 여름방학 때에 각 동내의 고 학년 자를 책임자로 하여 조기회를 하도록 하고 내가 우리 동내의 책임자로 지명 되었다. 시계가 없던 때라서 동내의 큰 북을 둘러메고 골목 마다 다니며 북을 치고 외치고 다녔는데 때로는 새벽 세시 내시에도 돌아다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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