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라고 하는 것의 길이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 나는 곧 이어 공간이라고 하는 것도 정해진 규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일한 공간이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넓어질 수도 있고 좁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예전처럼 운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몇 차례 큰 통증과 더불어 그 때문에 뒹굴었다는(오직 나만) 수치심에 나는 더 이상 공을 차든지 하는 것에 덤벼들지를 못했다. 아마도 내 평생 가장 의기소침한 순간이 아니었는가 싶다. 하는 수 없이 체육 시간이 되면 나는 운동장에 나가지 않은 채 교실을 지켜야만 했다.
그런데 그 일이 내게 약간의 곤란함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각반마다 체육시간이 되면 반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교실을 지키는데 생각보다 교실에 남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반의 경우 내가 늘 교실에 남기 때문에 교실에 남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기회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불만에 쌓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원래 한 학년 위였다는 사실과 나를 겪어보니 그렇게 만만하게 대할 타입은 아니라는 것을 반 아이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뒤에서 수군거리면서도 정작 내게 와서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아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 그때 내 자존심을 상할 대로 상해 있었기에 그런 식으로 다가온 아이가 있었다면 싸움이 났을 것이다.
질 때 지더라도 끝까지 덤비는 악바리 근성이 내게 조금(^0^)은 있었기 때문에 왕따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순수할 것만 같은 학생들의 속성이 생각보다 비열한 측면도 있어서 강한 자 앞에서 몸 사리고 약한 자 앞에서 큰소리치는 일들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정말 당하는 아이들은 날마다 당하곤 하니 말이다. 그러나 약해도 기를 쓰고 덤비는 아니는 당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교실에 남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렇게 교실에 남아있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님을 그 아이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이미 가지고 있는 큰 특권과 행복은 보지 못하는가 보다.
다 나가고 혼자 남은 교실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교실 안을 둘러보면 교실은 그렇게 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도화지에 점 하나를 찍어 놓은 듯이 나는 그렇게 교실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고 그 넓은 교실이 좀 좁아졌으면 하는 부질없는 소망을 가지기도 했다. 가능한 한 교실이 좁게 보이는 방법을 찾아 나는 반의 중앙에 앉아 있곤 했다(체육 시간에만 혼자서).
지금도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유체이탈한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 교실을 지키는 내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쓸쓸하게 축 늘어진 어깨로 교실 한 가운데 앉아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가련한 소년. 인내심은 그렇게 자라가고 있었다. 가끔 부러운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쓸쓸한 소년. 원치 않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그렇게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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