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역사기행-후마윤 무덤 2006/08/04 16:23 | 추천1스크랩2 |
(후마윤의 무덤 전경) 후마윤의 무덤은 델리가 자랑하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중 하나다. 가까이 살면 언제든지 가볼 수 있어 안가보게 되는데 후마윤의 무덤이 그런 꼴이었다. 이러다가는 델리에 1년 살고도 가보지 못할까봐 발걸음을 했다. (들어가는 입구와 공작 한 마리) 후마윤은 무굴제국의 2대 황제다. 무덤은 델리 시내 동쪽의 니자무딘 역 인근에 있었다. 일대는 무슬림 거주지역이었다. 흰색 옷에 흰색 모자를 쓴 무슬림들이 많이 보였다. 무덤 입구는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입장 티켓을 구입해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데 공작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공작은 인도의 나라새이다. 무덤 구역의 문 위에 걸터 앉아있는 자태가 예쁘다. 무덤 구역으로 들어가는 데 문 안쪽에 후마윤의 무덤 지역을 정리 복원한 내용을 사진으로 정리해놓았다. 전에는 일대에 불법 건물이 가득했는데, 모두 철거 이주시켰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후마윤의 초상화가 있다. 의자에 두 손을 단정하게 모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수염이 새카만 걸 보니 젊었을 때 모습이다. (후마윤의 초상화) 그 밑으로 재위 기간 표시가 나와있다. ‘1530~1540년, 1555~1556년’. 재위 기간이 두 시기로 나뉘어 있다. 그렇다. 후마윤은 15년간이나 제위에서 쫒겨났다가절치부심끝에 옥좌를 되찾은 사람이다.죽었다 살아났기에후마윤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후마윤이 아버지 바부르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은 무굴제국의 일부였다. 몽골 티무르 계열인 선왕은 제국의 모두를 후마윤에게 넘기지 않았다. 네명의 아들에게 영토를 나눠줬다. 몽골의 징기스칸이 그가 이룬 대제국을 아들들에게 나눠준 것과 같았다. 큰 아들인 후마윤은 델리와 수도 아그라가 포함된 북인도를 받았고, 동생 카므란 미르자는 아프간과 펀잡 일대를 상속했다. 후마윤의 나이 22살이었다. 그는 한량없이 좋은 사람이었으나 좋은 지도자는 못됐다. 그의 여동생 굴바단 베굼은 자서전에서 너무 관대해, 자신에게 일부러 도발해오는 사람들을 끝없이 용서했다고 말하고 있다. 후마윤을 위협한 최대 세력은 동쪽 비하르에 자리잡은 쉐르 샤 수르였다. 그는 결국1540년 5월 17일 쉐르 샤의 군대에 카노지에서참패하고 수도 아그라를 내줘야했다. 그는 일단 동생 카므란 미르자의 영토인 라호르(현 파키스탄 펀잡주 수도)로 도주했다. 하지만 쉐르 샤 수르는 펀잡을 향해 계속 압박해왔다. 이에 후마윤은 쉐르 샤 수르에게 편지를 보내 “힌두스탄의 전부를 당신에게 남겨줬다. 그러니 라호르는 손대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나는 카불을 당신을 위해 남겨놨다. 그곳으로 가라"였다. 카불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이다. 카불행도 여의치 않았다. 동생 카므란 미르자가 배신하고, 카불에 있으면서 적대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후마윤은 서쪽으로 더 가서 이란의 사파빗 왕가에서 망명처를 구해야했다. 고초는 말할 수 없었다. 훗날 위대한 무굴 황제가 되는 아들 악바르는 행군을 감당할 수 없어 뒤에 남겨놓아야 했다. 악바르는 불과 생후 14개월의 어린 아이였다. 후마윤은 먹을 게 없어 군용 말을 죽여 병사의 투구에 물을 넣고 끓여먹어야 했다. 이란에 도착했을 때 일행은 불과 40여명이었다. 이란의 샤 타마습은 뜻밖에 후마윤을 환대했다. 왕의 손님으로 대우해 좋은 거처와 음식을 제공했다. 두 사람의 만나는 장면은 이란 이스파한의 체헬 소톤 궁전에 벽화로 남아있다고 한다. 샤 타마습은 후마윤에게 환대의 조건을 하나 걸었다. 수니파에서 시아파로 개종하라고 요구했다. (이란은 지금도 최대 시아파 국가이다) 후마윤은 결국 시아파로 개종했고, 샤 타마습은 이에 1만2000명의 기마부대 지원을 약속했다. 후마윤은 빌린 병력을 갖고 아프가니스탄의 동생 카므란과 아스카리를 공격했다. 후마윤은 두 동생을 생포한뒤 죽이지 않았다. 대신 이들을 메카로 순례를 보냈다. 두 사람은 순례길에서 시리아의 사막과 메카 인근에서 각각 숨졌다. 후마윤은 인도를 향해 진격했고, 쉐르 샤 수르와 그의 아들(이슬람 샤)가 1546년, 1554년 사망한 이후 약화된 북인도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가 델리에서 다시 제위에 오른 건 1555년 7월이었다. 제위를 빼앗긴지 15년만이었다. 후마윤은 이제 47세의 원숙한 나이였고,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강한 지도자로 거듭났다. 하지만 그는 복귀 6개월만에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죽고만다. 왕궁내 계단을 내려오다가 옷이 발에 걸려 넘어져 머리를 돌이 튀어나온 부분에 부딪혔다. 사흘 뒤에 숨졌다. (후마윤의 무덤 건물 벽에 만들어져있는 다윗의 별.) 몬순의 비에 젖어있는 붉은 색 후마윤 무덤 건물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사암으로 지은 거대한 무덤 건물은 그저 담담하게 다가왔다. 건축사 측면에서 후마윤 무덤은 무굴 양식을 구현한 초기의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건축을 모르는 기자의 눈에도 건물 지붕위의 장식들은 델리의 무굴 황성 레드포트에서 본 것과 같았다. 후마윤 무덤은 또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는 건물로 유명하다. 건물은 왕비가 이란에서 건축가를 초빙해 지었다. (후마윤의 무덤) 무덤 건물 안에는 그의 무덤은 단출했다. 흰색 대리석 관이 돌바닥에 솟아올라와 있을 뿐이었다. 아그라의 타지 마할에서 보았던 화려함도 없었다. 후마윤 무덤은 또하나의 역사적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무굴제국의 끝을 목도한 곳이다. 무굴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자파르가 1857년 델리에 밀려들어온 영국군을 피해 이곳에 숨어있다고 붙들렸다. 그는 소위 ‘세포이의 난’ 주역에 지도자로 추대됐다가 영국군의 추적을 받았다. 황성인 레드 포트를 빠져나와 델리 남쪽의 옛 선조의 무덤속에 숨어들었던 것이다. 후마윤이 죽은 302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후마윤 무덤 어디에 숨어있다가 영국군에 의해 붙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을 듯 했다. 역사는 영욕으로 가득차 있고, 후마윤 무덤도 그런 곳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