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 30. 15:06 여행,레저

길위에서

여행&산행관련
길 위에서
2006/08/03 오후 7:16 | 여행&산행관련

길 위에서
긴 장마가 끝나자 사람들은 태양과 겨루듯 길을 떠나기 시작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꿈꾸던 남미여행을 준비하며 짐을 꾸리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늘 그러하듯 여러 가지 자료를 모으고 뒤적이다가 한 편의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쿠바혁명의 불꽃이었던 체 게바라에 대한 로드무비 형식의 영화였다. 단란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난 의과대학생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와 낡은 모터사이클 ‘포데로사’에 몸을 싣고 1만㎞의 기나긴 여행에 나선다. 무모하고 낭만적인 충동으로 시작된 이 여행은 처음에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과 또래의 젊은 여성 사이를 좌충우돌 지나가는 두 젊은이의 구김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불타는 저녁놀이 내리는 대평원,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춘 신비로운 안데스의 자태, 눈덮인 숲과 들의 고요와 평화 속에서 그들은 두 마리 야생동물처럼 마음껏 해방감을 만끽한다.

그러나 여행이 계속되면서 두 사람은 그 아름다운 풍경 뒤에 깃들어 있는 짙은 어두움에 눈뜨게 된다. 부도덕한 토지 개발업자에게 집을 빼앗기고 정든 땅을 떠나 광산노동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극빈의 유랑 부부를 만나게 되고, 나환자촌에서는 고통을 운명처럼 떠안고 사는 비참한 존재들을 만난다. 같은 핏줄끼리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는 분열과 증오의 현실도 목도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외우며, 지독한 천식에 시달리던 병약한 청년 체 게바라의 남모르는 고뇌가 시작된다. 4개월여의 여행이 끝났을 때, 그는 이미 수줍음 많은 스물세 살의 의대생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의 몸을 고치는 의사가 아닌 사회를 고치는 의사를 꿈꾸게 된다. 의대생 루쉰(魯迅)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서 중국혁명의 선봉에 섰던 것처럼.

여행이 끝나고 작별하는 시간에, 졸업 후의 취직자리를 알선해주겠다는 알베르토에게 말한다. “길 위에서 지내는 동안 내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고. 영화는 마지막으로 비행기의 트랩에 올라 손을 흔드는 체 게바라의 맑고 깊은 시선을 보여주며 끝난다. 이후 그의 모습은 사진가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베레모를 쓰고 음영 짙은 눈빛으로 세계를 응시하는 그 유명한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겨진다.

의사의 길을 접고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한 게릴라 투쟁을 하다 볼리비아에서 총살당하기까지, 그를 이끌어간 것은 권력에의 욕망이 아니라 밑바닥 삶을 사는 민중에 대한 기이할 정도의 애정이었다. 애초에 털털거리는 고물 오토바이를 타고 치기만만하게 떠난 여행이 아니었던들 모르긴 해도 그는 혁명가 체 게바라가 아닌 의사 에르네스토로 살며 평범한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이 영화는, 때로 여행이 한 인생을 얼마나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쩌면 섣불리 가방을 꾸리거나 함부로 문 밖에 나서려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여행을 한다고 누구나 의대생이 혁명가가 되어 돌아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낯선 길에서 그 세계관을 넓히고 사유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말을 타고 장장 17개월 동안이나 유럽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철학자 몽테뉴는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철학적 통찰과 명제들을 얻게 된다.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는 한국과 중국여행을 통해 ‘풍도’나 ‘돈황’같은 대륙적 시야의 소설을 쓰게 된다. 18세기에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여행기를 남긴 괴테는 자기 여행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해둔다. “내가 이처럼 놀라운 여행을 하는 것은 내가 보는 대상들에 비추어 나를 재발견하려는 것”이라고. 그리고 “하늘은 어디를 가나 푸르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세계 일주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새벽 3시에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와 여행가방과 오소리 가죽 배낭만을 든 채 역마차에 오른 괴테나 우리는 결국 같은 것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휴가를 보내려고 엄청난 인구가 공항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TV가 보여준다. 실로 엑소더스의 긴 행렬을 연상케 한다. 이제 긴 여행을 떠나려는 나 역시 내 마음 속에서 무슨 변화인가가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김병종 / 화가, 서울대 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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