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22건

  1. 2006.09.25 돛대도 아니달고 삿대도없이
  2. 2006.09.25 몇년전 죽은 동창녀석이 생각났습니다.
  3. 2006.09.25 아빠 제가 소금넣어 드릴께요
  4. 2006.09.25 쑥맥처럼 사시오 1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2006/08/17 오후 9:15 | 마음이 머무는 자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소사아저씨가 가르쳐준 ‘반달’ 노래 어른이 된뒤에도 가끔은 ‘흥얼흥얼’
전교생이 17명 밖에 되지 않는 산골 초등학교에,
사랑 많은 소사 아저씨가 있었다.
소사 아저씨는 개구쟁이 아이들의 다정한 친구였다.
10살만 넘으면, 가난한 농가의 일꾼이 되어야하는 아이들에게
소사 아저씨는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아름다운 동요도 가르쳐주고 싶었고, 반짝이는 동시도 가르쳐주고 싶었다.
소사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처음 가르쳐준 노래는 ’반달’ 이였다.
처음에는 한 두명의 아이들이 노래를 배웠다.
연필과 크레파스와 노트와 스케치북을 선물로 준다는 말을 듣고
전교생 17명이 모두다 노래를 배우러 왔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 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목이 쉬도록 노래를 가르쳤지만, 아이들은 매미처럼 제 각각 울어댔다.
“아저씨, 선물은 언제 주나요.”
“선물은 무지막지하게 많이 준비 되어 있다.
잘 하면 선물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크크.
우리가 노래를 다 배우면, 느티나무재 너머에 있는 성당에 가서
합창을 하기로 약속했다.
잘만 하면, 신부님이 연필과 크레파스와 노트와 스케치북을
선물로 마구마구 주신다고 했거든.”
그 후로 아이들은 더 열심히 노래를 배웠다.
합창 발표 날이 왔다.
햇볕이 다람쥐 꼬리 만큼 남아 있을 무렵,
소사 아저씨는 전교생 17명을 데리고 느티나무재를 넘었다.
성당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 눈이 갑자기 자두알 만해졌다.
바쁘기만 했던 엄마, 아빠들이
성당 안에 모두 모여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설레게 한 건 단상 앞에 있는 선물이었다.
높이 쌓여 있는 선물이 쓰러진다면
소사 아저씨 말대로 선물에 맞아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사 아저씨가 월급 봉투를 몽땅 털어
그 많은 선물을 준비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단상 위에 섰다.
아이들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찔레꽃처럼 피어 있었다.
풍금 소리가 흘렀다. 아이들 노래가 시작되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 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아이들은, 바람을 타는 청보리처럼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 아빠들 눈에 눈물이 반짝거렸다.
소사 아저씨는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저씨도 울고 있었다.
야윈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사 아저씨는 손등으로 계속 닦아내고 있었다.
노래를 불렀던 아이들은 세월을 따라 배추잎처럼 나박나박 자랐다.
사춘기를 앓았고, 새털처럼 많은 날들을 살아내며
아이들은 제법 단단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 뒤에도 가끔은,
소사 아저씨가 가르쳐준 ’반달’을 노래했을 것이다.
햇살처럼, 나비처럼 너울너울 살아가라고 했던 소사 아저씨의 말을
아주 가끔은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어른이 된 그들은 알고 있을까?
’반달’을 가르쳐준 마음씨 고운 소사 아저씨가,
박봉을 털어 빠작빠작한 선물을 사온 그 가난한 소사 아저씨가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분명히.
가슴에 새겨진 사랑은 지워지지 않으니까.
사랑은, 아무리 험한 세월도 견뎌낼 수 있으니까.
누구의 가슴에서도. 오랫동안. 그 모습. 그대로. 그렇게.
*반달 (윤극영 작사, 작곡)
(작가 약력)

작가 이철환 (www.cyworld.com/happygomul)씨는 ‘풀무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베스트셀러 ‘연탄길 1.2.3.4’의 저자인 이 작가는 아버지가 고물상을 하던 시절에 겪은 실제 이야기를 담아 ‘행복한 고물상’을 펴냈고, 문화일보 AM7에 연재하고 있는 글들을 모아 최근에 ’곰보빵’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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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목사 맞아' 대답은 못하고 그냥 눈물만 흘려습니다.

허종 paulhuh@naver.com">paulhuh@naver.com [조회수 : 168]

 
몇 년 전에 죽은 동창 녀석이 생각났습니다.

우연히 가곡 ‘산유화’를 듣게 되었는데 문득 몇 년 전에 죽은 동창 녀석이 생각났습니다.
대학시절 동창 녀석이 여름날 바다낚시를 가자고 했습니다.
몇 명이 의기투합하여 호기 좋게 돈을 모아서 돛단배를 빌려서 인천 앞 바다에서 망둥어 낚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신이 났는지 산유화를 목청 높여 불렀습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그 녀석은 한참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나는 속으로 ‘저 녀석 저런 면이 있네.’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망둥어 낚시를 즐기며 잡은 망둥어로 매움탕을 끓여 먹으며 하루를 즐겁게 놀았습니다.
신선놀음 같은 하루였습니다.


서로 생각이 많이 달랐기 때문에 깊은 정을 나눈 것은 아니지만 대학 4년을 함께 어울려 다니며 보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만나며 지냈습니다.
때로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하기도 했지만 소식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나는 목사가 되고 그 동창 녀석은 건설회사 차장이 되었을 때 여천에서 만나 적도 있었습니다.
고흥에서 목회할 때는 교회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한창 돈을 잘 벌 때였습니다.
나를 만나면 돈 잘 버는 이야기를 했으니까...
압구정동 00아파트에 살면서 고급 승용차가 두 대 씩이나 있었으니까.
딸 둘을 미국에 유학을 보냈는데 ‘1년에 1억은 보내야 한다.’고 자랑을 했으니까 돈을 많이 버는 모양이었습니다.
만날 때 마다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했지만 귀찮아 할 뿐이었습니다.
술을 마시는 데는 백 만 원도 쓴다고 하면서도 교회에 와서는 헌금은 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을까? 일산에서 목회할 때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 왔습니다.
회사를 퇴직하고 회사를 차렸는데 그만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집을 나가고 딸들하고도 소식이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때 내가 그 녀석에게 어떤 힘이라도 되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그 동창 녀석은 갔습니다.
며칠 후 그 녀석이 죽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혼자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새벽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가곡 산유화를 듣는데 문득 그 녀석 생각이 났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너무 초라했습니다.
40대 후반에 죽었고 그가 남긴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산유화를 들으며 꽃처럼 살지 못하고 간 그 녀석이 생각난 것입니다.
자기와 생각이 많이 다른 나를 그 녀석은 좋아했습니다.
술 먹고 개처럼 놀기도 했지만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친구였습니다.
그 녀석을 생각하며 나의 불성실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너 목사 맞아?’
산유화를 들으며 스스로 물어 보았습니다.
대답은 못하고 그냥 눈물만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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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회상의 작은쉼터2006/08/05 오후 9:40 | 마음이 머무는 자리


음식점 문이 열리더니
여덟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어른의 손을 이끌고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왔다
두사람의 녀절한행색은 한눈네도
걸인임을 짐작 할수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완전히 코을 찔렀다.
주인아저씨는 그자리에 일어나
"그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이바요! 아직 개시도 못했으니까!
담에와요!!

아이는 아무 말없이 앞못보는
아빠의 손을 이끌고 음식점 중간에 자리을 잡았다
주인 아저씨는그제서야
그들이 음식을 먹으러 왔다는것을 알았다...

"저어 ..아저씨! 우리순대국 두그릇주세요"
"웅 알았다..근데 이리좀 와볼래!
계산대에 앉아있던 주인아저씨는 손짖을 하며
아이을 불렀다

! 미안하지만 지금은 음식을 팔수없구나...
거긴 예약손님이 앉을자리라서 말야!!

그러잖아도 주눅든아이는
주인아저씨 말에 금방시무룩 해졌다..
!"아저씨 우리 빨리 먹고나갈꼐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에요
아이는 비에 젖어 눅눅해진 천원짜리 몇장과
한주먹에 동전을 꺼내보였다..

"!알앗다..그럼빨리 먹고 나가야한다 !
잠시후 주인아저씨는 순대국 두그릇을 갖다 주었다.
그리고 계산대에 앉아서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바라봤다..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꼐"
아이는그렇게 말하고는 소금통대신
자신의국밥그릇으로 수저을 가져갔다..

그리고 국밥속에 들어있던 순대며
고기 들을떠서 앞못보는 아빠의 그릇에
가득 담어 주었다...

"아빠 이제 됫어..어서먹어..
근대 아저씨가 우리빨리먹고 나가야 핸댓으니까...
어서밥떠..내가 김치올려줄꼐..

수저을 들고 있던 아빠의 두눈네는 눈물이 가득히 고여있었다..

그광경을 지켜보던 주인아저씨는
조금전에 자기가 했던 일에대한 늬우침으로
그들을 바라볼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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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는 나를 보고 쑥맥처럼 살라하네
2006/06/30 02:33
조정래 조회1674 추천1

작은 솥데지기 골에 들어서자 저만치 지멋되로 자란 떡버들 나무 숲사이로 숨이 딱 막히는 무릉도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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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할매는 나를 보고 쑥맥처럼 살라하네.

단양 구담봉 들어 갔다가 해가 떨어지도록 기다린 후에 어둑어둑 해질 무렵 무쏘 엔징이 갈갈 소리를 낼 정도로 가파른 저수령 고개로 올라가서 앞 발통은 경상도에 걸쳐놓고 뒷 발통은 충청도에 걸처놓고 하룻 밤 달 구경을 하고나서 다음 날 아침 굽이굽이 경상도 쪽 저수령 고개를 내려와서 00읍 00병원으로 갔다.
그 곳엔 친구 아부지가 노환으로 벌써 석 달 넘게 입원을 하고 계신다.
지나가는 길이니 한번 병문안을 할 셈이다.
병실에 들어서니 젊었을 때 그 당당하시던 친구 부친은 이제 무서리 내린 고추대궁처럼 육신이 다 소진하신체로 오래된 희므그래한 조선한지처럼 누워 계셨다.
한방에 무려 네분이나 계셨는데 다 노인들이시다.
다들 7-8남매 자식들이 있을듯한 노인들이지만 병실에는 병간호 하시는 젊은 며느리 단 한명도 당체 보이질 아니했다.

"아부지 입원하면 다들 버긋내이로 병실 지키시더"

그런 말조차 이제 듣기 힘들어진 세상이다.
옛날 같으면 며느리들이 버긋내이로(순번제로) 시아버지 병실을 지켰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자꾸 우시는 친구 부친을 위로해드리고 허전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는데
왠 초라한 옷을 입은 할머니가 내 소매를 잡더니

“아이고 우야닛껴..고만애..내가 표쪼가리를 잊자뿌랬니더”

그 할매는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처다 보고는 “표 쪼가리”를 이야기 하셨다.
할매가 이야기하시는 “표쪼가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언듯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할매요 무슨 표쪼가리 말하시닛껴”

“표쪼가리가 있어야 할바이 약 타는데..우짜닛껴 내 밥부제하고 이자뿌래니더”

순간 시골 할머니가 말하시는

“표쪼가리”는 의료보험카드를 말하시고
“밥부재”는 지금도 경상도 멧골에 가면 실제로 통용되는 말인데 밥부재라는 말은 옛날 먼 길이나 산에 나무하러 갈 때 밥을 싸든 천을 말하는 것이다.
아직도 그 흔한 도시 손가방 하나 없이 시골 할매들이 읍내 오실 때는 밥보자기에 이것저것 물건을 싸서 들고 나오시는데 그것이 소위 장 보따리가 되는 것이다.
싶게 말해서 밥부제는 할매 쇼핑백이다.
아마 양복차림을 입은 나를 의사 선생으로 착각하시고 의료보험 카드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 할머니를 모시고 창구에 가서 할머니가 할아버지 혈압 약을 타러 오셨는데 그만 의료보험 깜박 잊어먹고 오셨는데 약을 탈 수가 없느냐고 물었다.
간호원 아가씨가 컴프터를 보면서 할아버지 성함을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 뒤에서 서계시는 할머니를 보고

‘할매요 할배 이름이 뭐라카닛껴“
”우리 할바이 이름?“ 할머니는 귀도 조금 먹은듯하셨다.
“할매요 할배 이름만 알면 우선 약 타갈 수 있다 카니더”
“우리 할바이 이름?....용득이 아비씨더”
“용득이는 누구잇껴?”
“우리 아들...서울 살아”
“아들 이름말고 할배 이름 모르시닛껴?...약 탈려면 할아버지 이름만 알면 되는데....”
“아이고 그래만 오늘 우리 할바이 약 못 타닛껴?...쪼매 있으마 우리 동장이 온다캤는데..동장이 우리 할바이 이름 아끼-씨더”.

이미 나이가 드셔서 할아버지 이름을 잊어먹고 그냥
“용득이 아바이”라고 하셨다.
간호원에게 이차저차 설명하고 다음에 약 타러 올 때 의료보험증을 갖고 오기로 하고 일단 혈압 약을 받은 후 그 할머니를 내 차에 태웠다.

“할매 집이 어딧껴”
“작은 솥데미골”
“작은 솥데미 골에 사시닛껴?...아이고 잘됬니더 지도 오늘 그 마을에 가니더”
“작은 솥데미는 우리 집 밖에 없는데...큰 솥데미 마을에 가시닛껴?”
“예예..큰 솥데미 가니더”

일단 할머니를 집까지 태워 드리려면
큰 솥데미든
문바우 골이든
너리티 마을이든 ....일단 간다고 해야 할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
할머니 사시는 작은 솥데미 골은 읍내에서 엄청 멀었다.
간간히 담배 밭에 엎드린 농부 한 두어 명 보일 뿐 당체 30K,M 속도 간판이 보이는 국도에는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읍내에서 무려 19KM를 산골로 들어가서 0탑 이라는 마을에서는 아예 비포장도로에 무쏘가 겨우 들어 갈 산골 길이였다.
이리저리 나무 가지를 부딧끼면서 듬으로 듬으로 차를 몰아가는데 길섶에는 산딸기들이 붉은 복분자 알을 벌겋게 달고 있었다.
그리고 묵밭이 보이고
그 바로 아래 허물어진 빈집 터가 보이고 바로 뒤에 감나무가 몇 그루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자 또 한체의 빈집이 마당에 오만 잡풀을 덮어쓰고 대문을 열어놓고 멍하니 이놈의 차를 보고 있었다.

"저집은 5년전에 대구 아들 집으로 갔니더"

묻지도 아니한데 할머니는 허허한 빈집을 가르키면서 말하셧다.
나는 대뜸

"할매요..이 산골 집들은 언제 초가지붕에서 스레뜨 지붕으로 갈았닛껴?"
"지붕요?...박대통령 새마을 사업 때 했어"
"그마 그 이후 그 많은 대통령이 아무것도 안 해줬닛껴?"
"무신 말있껴.........?"
"혹 할매 이번에 땅투기하고 3.1절 부산까지 가서 골프 치다고 목 날아간 이해찬 총리 아닛껴?"
"저런! 누가 목을 메고 죽었닛껴?"
"............."

뒷 자리에 가득 싣은 노숙산중할 때 쓰는 내 물건이 심하게 덜컹거렸다.
오디를 새카맣게 달고 있는 버려진 뽕나무에 박새가 풀풀 날고 한무리 개망초 꽃 무리들이 희고 흰 가루떡을 뿌린듯 몇년째 농사도 아니짓고 그냥 버려진듯한 묵밭을 뒤덮고 있었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할매요 그마 요즈음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군지 아시닛껴?"
"대통령?...내사 몰씨더...이 산골에 사는데 우째 아닛껴?"
"진짜로 노대통령도 모르시닛껴?"
"대머리 벗겨진 대통령 다음에 하던 그사람이 아직도 대통령 하시닛껴?"
"누구 말하시닛껴?...아 노태우 대통령요?"
"그사람 노씨 아잇껴..저넘어 아랫 용각골에 우리 11촌 질부님의 그사람 노씨씨더..얼매나 사람이 양반인데요"

총리도 대통령도 모르시고 사는 할매다.
할매는 할배하고 작은 솥데지기 산골에서 쑥맥처럼 참으로 순우순박하게 살아 오신듯 했다.

그까짓거 도시에 배웠다는 사람들이 저녁만되면 소주 잔을 탁탁 치면서 정부가 하는 짓거리에 열을 내거나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앙칼지게 싸움질하는 드라마를 본다거나 그 잘난 여자 몸매에 목을 길게 빼거나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으신 분들 같았다.

남들이보면쑥맥같은 할매다 하겠지만

할매는 그저

총리도 모르고
대통령도 모르고

진실이도 모르고
효리도 모르고

이라크도 모르고

이북 미사일도 모르고

은마 아파트도 모르고

양도세도 모른다.


할매를 모시고 작은 솥데지기골에 당도하자 저만치 지멋되로 자란 떡버들 나무 숲속에 무릉도원에서 본 듯한

낡은 집 한체가 보였다.

작은 앞 논에서 풀을 뽑던 할아버지가 허리를 절반쯤 펴시고는 낮선 내차에서 할머니가
내리시자 학처럼 멀거니 이쪽으로 응시하고

그런 할아버지 뒷쪽으로 신기하게 학 한마리가 외다리로 졸고 있었다.

끝.

그름아 구름아 하는 놈이 요 며칠 무릉도원을 다녀 왔습니다.

그 산골에서 다녀 온 이후에 그저 몇일 이유도 없이 잠 못 이루었습니다.

내 살아생전 그저 쑥맥처럼살아가가기를 마다 하겠지만...그래도꿈을 꾸는 면이 있어

가슴 한구석이 지금도 움툴거리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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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솥데지기 골로 올라가는 길 섶에 주인 잃은 빈집이 허망한 아름다움으로 멍하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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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솥데지기 듬으로 올라가는 비포장 길이다.
아무도 안 꺽어가는 개망초 꽃이 흐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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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버린 묵밭이다.
갑자기 아리랑 가사가 떠 올랐다.

저 건너 저 묵밭은 작년에도 묵더니
올해도 나와 맨키로 또 한해 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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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저 밭이 우리끼시더" 하는 산골 삿갓배미 밭이다.

엉덩이 큰 며느리가 깔고 앉으면 안 보이고
가을 추수를 하면 80순 노인 지게에 반지게 정도 나온다는 쪼래기 땅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 수천년 이땅에서 순박한 산골 사람들 목숨을 이어주든 이런 땅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밭도 곧 숨을 거두고 잡풀이 피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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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래기 논에 풀 뽑으로 들어간 할아버지가 벗어놓은 고무신이다.
뒤 집어보니 이미 다 헤져서 구멍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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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듬으로 다닐 때 나는 그 곳에 사는 분들의 옷 지절과 같도록 헌바지와 흰 고무신을 싣는다.
지난주 충청도 시골 장터에서 산 고무신은 자세히 보니 할버지 고무신과 조금 달랐다.
내 고무신은 코팅이 입혀져서 반짝 반짝 거렸고 할아버지 신발은 무광택이다.

싣고 있던 내 고무신을 벗어서 몰래 논가에 두고
다 헤진 할아버지 신발을 내가 몰래 싣고 서울로 허겁지겁 돌아왔는데 당체 두고 온 무릉도원이 눈 앞에 어른거려서 잠이 오지 아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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