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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기행 (하)-나 아닌 것들을 위하여 |
박일원 |
이틀 동안 온 세상을 적시며 내리던 비가 뚝 그쳤습니다. 해말간 하늘입니다. 햇빛이 살금살금 창턱을 넘고 있을 때 세상은 마치 방금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빠져나온 여인 같습니다. 처마 끝에서는 낙수가 아직 뚝뚝 떨어지고 대지는 촉촉한 피부를 보입니다. 나리꽃에는 송글송글 빗방울이 맺혀 있으며 비탈을 덮고 있는 로즈마리에서는 상큼하고 유혹적인 비누냄새가 납니다. 양털처럼 뽀송뽀송하고 따뜻한 아침햇살은 대자연의 속살에 내려앉아 차근차근 물기를 닦아주기 시작합니다. 바람이 불때마다 머리채를 흔들며 유칼리와 은사시나무는 부산하게 물방울을 털어냅니다. 뽀독뽀독 윤이 나도록 잘 닦인 바위 사이로 다람쥐 한 마리가 들고나곤 합니다. 네, 부산하기는 산 속에 사는 동물들도 마찬가지이지요. 호주까치인 맥파이가 베란다 앞까지 날아들고 평소 수줍음이 많고 의심 많은 꿩과의 라이버드는 별채 앞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커르릉 커르릉 울어 댑니다. 특히 수놈 라이버드는 다른 새의 울음소리는 물론 인간 세상의 소리까지 듣고 똑같이 흉내내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꾸 커르릉 대는 걸 보니 그 놈이 간밤에 방문 앞 숲 속에 숨어 있다가 제 코고는 소리를 들은 게 확실합니다. 다시 나타난 잿빛 토끼와 부스스한 모습으로 풀을 뜯기 시작하는 얼룩박이 젖소며 팔랑대는 나비를 쫓아다니며 철없이 짖어대는 양치기 개 때문에 저는 가만히 방안에 앉아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와틀추리의 노란 꽃잎 위로 붕붕대며 벌들이 날고 불어난 개울에는 개구리가 와락와락 대며 시냇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둥근 자갈들을 굴리며 시끌벅적 흘러갑니다. 이제 온 세상은 기분 좋은 소요로 가득합니다. 어제까지 무거운 수녀복을 입고 있던 힐데가르드 수녀님은 청소복으로 갈아입고 빗자루로 여기저기 쓸기 시작합니다. 매주 목요일은 청소의 날이라고 합디다. 건초 수레를 끌고 가시는 맥덜린 수녀님. 침대시트를 한 아름 걷어들고 바쁘게 걸어가는 조안나 수녀님, 멀리보이는 목장 안에서 부릉부릉 대며 트랙터를 몰고 가는 또 다른 수녀님. 저는 대자연의 소요와 수녀님들의 ‘차분한 극성’에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갑작스런 이 아침소요에 한몫을 했네요. 성당 내부를 사진 찍게 해달라고 조안나 수녀님을 졸라 결국 허락을 받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구 셔터를 눌러댔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법석대는 아침나절을 보내고 옥수수와 찐 감자와 삶은 완두콩을 곁들인 소시지로 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입니다. 조안나 수녀님이 조용히 테이블로 오시더니 집에 갈 때 저 쪽 창가에 앉은 여자를 카이아마 역까지만 데려다주라고 부탁하더군요. 가만히 보니 그는 우리가 머무는 별채의 2층에 머무는 여자였습니다. 저는 그 여자가 참 쌀쌀맞고 거만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동행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내는 쉽게 동의하더군요. 뭐 묵상하러 왔으니 한 집에 살면서도 말 한 번 건네지 않는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길에서 만났는데 고개를 돌려 외면을 하더라구요. 그 길이 넓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성당을 나와 숙소로 가고 있었고 그 여자는 나무 밑에 앉아 있었지요. 그러다 제가 다가가니 고개를 돌리더란 말씀이지요. 그만하면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는 나눠야 되는 게 아니겠어요. 수녀원을 나오자 아내는 카이아마 역으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시드니로 올라오는 하이웨이 쪽으로 난 길을 타면서 그 여자에게 아예 시드니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조금 못마땅하고 거북했지만 이미 말해버렸으니 그냥 참기로 했지요. 얼마를 오다 그 여자는 자기가 좀 피곤하니 뒷좌석에 눕겠다고 하더군요. 속으로 생각했지요. 참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목장 한 가운데 드믄 드문 집들이 서 있는 게 참으로 쓸쓸해 보였습니다. 뒤편에 몇 그루의 나무도 있고 앞으로는 푸른 초지가 펼쳐지는 아름다운 집들이지만 맨 날 거기서 살며 이따금 오가는 차를 바라보며 지낸다는 것,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같은 시간에는 더욱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요. “농부들이 왜 알파카를 양과 함께 키우는지 아세요? 비록 순하게는 생겼지만 저 알파카가 딩고 늑대나 여우의 습격으로부터 양을 보호해주기 때문이랍니다.” 언제 일어났는지 그 여자는 양떼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알파카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암놈 알파카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수놈이 근처로 다가 오면 침까지 뱉는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지요. 나 아닌 것들을 위해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험한 날이 닥쳐오더라도 스스로 험해지지 않는다. 갈라지면서도 도끼날을 향기롭게 하는 전단향나무처럼 인도의 잠언시집인 수바시따에 나오는 글귀라고 합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나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네, 그것은 제가 남을 대하는데 퍽 인색하다는 것을 고백하며 속죄하기 위해서지요. ‘나 아닌 것들을 위해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잼버루를 떠나 시드니까지 오면서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꼬였었고 특히 운전대를 잡은 아내가 돌고 돌아 렌드윅의 그 여자가 사는 동네까지 찾아가고 있었을 때는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에 짜증까지 났었지요. 아내가 그녀가 사는 동네에 거의 다 와서 사는 집이 어디냐고,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반복해서 물었고 그 때마다 그 여자는 그냥 저기 라운드어바웃(로터리) 근처에 세워주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 여자가 아내에게 져서 말한 곳은 바로 ‘프린스 오브 웨일즈 병원’이었습니다. 그제 서야 우리는 그녀가 거기 장기 입원환자였다는 사실도 알았지요. 아, 그래서 뒷좌석에 자꾸 누웠던 것이었구나, 그래서 수녀원 산책로에서 만났을 때도 힘없이 고개를 외면하며 눈길을 피했던 거로구나, 그래서 한 집에 머물면서도 인사 한 번 나누지 않았던 거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 자신이 무척 추하게 느껴졌습니다. 병원 앞에 그녀를 내려주고 안작퍼레이드로 들어섰을 때 건물들을 붉게 물들이며 떠있는 오렌지 빛 석양을 바라보면서 어제 아침 수녀원에서 새벽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을 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어 우리는 우산에만 신경을 썼지 어두운 길을 어떻게 가야할 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니 가로등이 항상 불을 밝히는 도회지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겁니다. 아내와 제가 조심조심 성당까지, 요리조리 물웅덩이를 피해가며 오솔길을 살펴가고 있었을 때입니다.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며 우리 앞에 계속 플래시 불빛을 비쳐주고 있었습니다. 캄캄해서 뒤를 돌아보아도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오렌지 빛은 여전히 우리를 앞질러 가며 길을 살펴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볼 수 없어도 그는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제 앞길을 더듬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지난밤 앞길을 비쳐주던 손전등 불빛 속에서 저는 신과 조우했을지도 모릅니다. 맥덜린 수녀님의 말마따나 신은 그의 창조물에게 자신의 비밀을 우연히 알도록 여기저기 흔적을 떨어뜨려놓으셨는데 그걸 자꾸 제가 지나치는 것 같습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무슨 종교를 가졌든 세상에는 나 아닌 것에 향기를 더해주며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지요? 렌드윅의 저녁노을, 그 오렌지 빛깔이 오늘 저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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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오니 정돈되지 않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개수대에 제멋대로 헝클어져 담겨져 있는 빈그릇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깨워 밥먹이랴, 내 와이셔츠 다림질하랴, 출근준비 하랴 서두르다 아침 회의 시간에 늦지 않기위해 미처 집사람이 아침 설거지를 못하고 출근을 했다.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우리회사 역시 그 후폭풍을 비껴갈 수가 없었고, 비상국면으로 치닫고 있던차에 우리가 작년에 추진했던 국가사업의 한 프로젝트가 해당기관으로 부터 금년도 신규사업으로 채택되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긴장이 풀리면서 오히려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고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상념들이 곪은 상처가 터져 고름이 나오듯 머리에서 용솟음 쳤고,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주변의 잡다한 것들이 구석 구석으로 부터 눈에 박혀 들었다. 문득 설거지가 하고 싶었다. 더러운 것이 보기 싫어서가 아니고, 냄새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그릇을 씻고 싶어졌고, 그래서 개수대로 다가서는 내 기분도 다른때 처럼 마지못해해야했던 때의 지극히 수동적인 것이 아닌, 오히려 무엇인가새로운 것을 경험할 것같은 묘한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개수대앞에 다가서 어지럽게 쌓여있는 그릇을 바라보는 순간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릇을 깨끗이 씻는다는 생각이 아닌 그것을 씻는 행위에 동화되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디선가 읽은 설거지에 관한 어떤 스님의 얘기가 떠올랐다. 저녁을 마치고는 손님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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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차이 2번째- 쾰른 대성당 앞에서 햇볕을 쬐며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왼쪽을 보니 2명의 여성이 서로 포옹을 하고 있더군요. 처음에는 아주 대수롭지 않게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서로 얼굴과 얼굴이 다가가더군요. 입술과 입술이 닿을 정도로 말이죠... 그러더니 충돌. @.@ 독일에서 남녀의 키스에 대해선 많이 봐왔지만 이건 좀 충격으로 다가오더군요.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돌발적 행동에 대해 순간적으로 카메라를장면을 담았습니다.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지나갔지만 그녀들의 애정행각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또 관심을 갖는 이들도 없었구요.가끔 학생들이 보고 웃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대다수가 쳐다만 보고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이 명동 성당 앞에서 일어난다면 우린??? 그녀들의 애정행각은 약 20여분 지속되었습니다. 참 끈길기게 입을 맞추더군요. 그것도 아주노골적으로 말이죠. 기차시간은 다가오는데...허허~ 일어날 시간입니다. 한 남성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녀들 뒤에 앉아 바라봅니다. 부러웠을까요? 두 여성 가운데 오른쪽 여성이 어딜 가는 모양입니다. 배웅을 하고 서로 헤어지더군요. 레즈비언인지는 몰라도 두 여성중에도 한쪽은 남성 역할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진에서 왼쪽이 남성 역할을 하는 듯 보였습니다. 계속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만지더군요. 참고로 기차역으로 가는 여성에게 사진을 찍었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몰카 아닙니다. (찍을 땐 몰카였지요.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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