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에 해당되는 글 188건

  1. 2006.09.30 이열치열 더운나라 수단
  2. 2006.09.30 암릿사르
  3. 2006.09.30 경상도의 아름다운 길
  4. 2006.09.30 국립 자연사 박물관
세상구경- 이열치열 더운나라[수단]
2006/07/15 20:03
이수한 조회916 추천1

수단(Sudan)

아프리카 대륙에서 제일 큰 나라로 한반도의 11배가 되는 약 200만 평방키로미터.

9개 국가와 접경을 하고 있으나 이집트와 북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고

나일강 상류가 이 나라를 세로로 흐르고 있으며 고대에는 에집트 문명을

함께한 나라, 열사의 사막과 습지, 밀림이 공존하는 나라 수단.....

수도 카르툼(Kartoum)

국립박물관

합세수트 여왕(이집트)이 누비아왕을 위해 지어 준 사원 유적

식물원 내의 물방아(물긷는 수차)

낙타 시장

와디 할파 오아시스

자료

이맘 마하디 와 그의 세 아들의 영묘

사이드 알리 모스크(Sayyid Ali's Mosque)

테러 지원국으로 지목된 수단이 1998년 미해군 함정에서 발사한 미사일 세발에 의해

폐허가 된 어린이용 제약회사(화학무기 제조회사로 오인 오폭)

메로에(Meroe)

메로에 왕가의 묘지군(Royal cemeteries of Meroe)

이 유적은 수도 카르툼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보다는 규모가 작다.

아메니(Amani)여왕의 무덤(오른편 건물)

아메니(Amani)여왕의 부조(무덤 내부)

* 피라미드 첨단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 때문에 도굴꾼에 의해

상부가 전부 훼손되어 있다.

Meroe 왕조의 Royal City

왕궁 터

남부 고대도시 게지라

무사와라트(Musawarat) 사원전경 자료

무사와라트(Musawarat) 사원

Lion Temple

아몬(Amon) 사원

청나일강의 발원지 우간다의 진자(Jinja)

수면에 보이는 소용돌이는 강바닥(河底)에서 나일강물의 수원인 물이 용출되는 곳이다.

백나일 과 청나일이 각기 흘러와 수단의 카르툼의 이 곳에서 합류(두물목),

대(大) 나일을 이루어 이집트를 거쳐 3개월에 걸친 6400km의 대장정을 끝내고 지중해로 흘러든다.

- Epilogue -

아직도 속살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반군이 설치는 수단은

아무 곳 에서나 사진 촬영이 허락되지 않아 일반적인 모습을 담을 수는 없었다.

'여행,레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암컷리더만 보고 뛰다가 맞는 버팔로의 비극  (0) 2006.09.30
라스베가스의 한 호텔  (0) 2006.09.30
암릿사르  (0) 2006.09.30
경상도의 아름다운 길  (0) 2006.09.30
국립 자연사 박물관  (0) 2006.09.30
Posted by ogfriend

2006. 9. 30. 14:35 여행,레저

암릿사르

 
암릿사르 여행-작지만 강한 시크교사회 2006/07/16 03:36추천1스크랩0

amritsar-map.jpg

(펀잡주 암릿사르 위치)

네루 가문의 세명을, 암캐(bitch)와 아이들 둘을 황금사원으로 끌고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리고 처단할 수 있다면. 그 결과에 대해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인도 펀잡주 암릿사르에서 2006년 7월 4일 만난 50대 시크교도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그는 기자에게 인디라 간디(전 총리)가 시크교의 본산인 황금사원을 군홧발로 짓밟은 걸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2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원한이 사무치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절대 용서못한다. 그리고 라지브 간디가 많은 시크를 죽였다는 것을 반드시 써달라고 주문했다.

50대 초반인 그는 암릿사르에서 대학을 나와, 은행에 다녔고, 10여년전부터 개인 사업을 하는 평범한 시크교도. 뉴델리에서 지인의 소개를 받고 가서 만났다. 맥주 한 잔에 취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데, 발언이 과격하다.

IMG_9541(7236).jpg

(황금사원 전경)

IMG_9507(7236).jpg

그가 말한 네루 가족 3명은 소냐 간디 국민회의당 대표, 그의 외아들인 라훌 간디 하원의원(1970년생), 그의 딸인 프리얀카(1972년생)다. 이들은 1984년 황금사원에 군병력을 보내 분리주의 무장세력을 쓸어낸 인디라 간디의 후손들이다. 소냐 간디 대표는 큰 며느리이고, 라훌과 프리얀카는 외손자들이다.

암릿사르는 인도 북부, 파키스탄과의 접경지대에 자리잡은 펀잡주의 인구 100만명인 중소도시다. 델리에서 기차를 타고 5시간 20분 거리. 전세계 2300만명의 시크교도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시내 한복판에 시크교의 최대 성소인 황금사원이 있기 때문이다.

번잡한 시장 거리통을, 바퀴가 셋인 오토릭샤에 몸을 싣고 지나간다. 잠시 뒤 그 끝에 흰색의 가로로 긴 건물이 불쑥 나타났다. 황금 사원일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진에서 본 금빛 휘황한 황금사원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밖으로는 흰색의 3, 4층 높이 건물이 가로로 길게 뻗어있었다.

황금사원에는 그런데 안내원이 보이질 않는다. 타지 마할 등 어느 관광지를 찾아가도 흔한 게 가이드이다.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공인 가이드, 사설 가이드 등 해서 그렇다. 그런데 이곳에는 한 명도 없어 오히려 난감해진다. 정문 오른쪽의 안내소를 찾아갔다. 안내 센터 책임자인 구르바칸 싱씨는 1인 관광객에게는 별도의 관광 가이드를 붙여줄 수 없다고 한다. 대신 설명을 해주겠다며 안내책자를 꺼낸다.

싱씨는 시크교의 교리와 역사에 대해 길게 설명을 할 태세다. 그래서 말을 자르고 들어가 궁금한 걸 물어봤다. 1984년 푸른 별 작전의 흔적이 어디에 남아있나? 그랬더니 대뜸 기자냐는 말이 돌아온다. 귀신같이 남의 직업을 알아맞춘다는 느낌과 함께, 기자 생활 20년하면서 말과 행동에서 기자 티가 많이 나는 모양이라는 생각도 든다.

blue_star_akal_takht.jpg아칼_탈트.JPG

(아칼 탁트의 블루 스타 작전 직후 모습과, 요즘)

싱씨는 당시 분리주의세력의 무장 농성했던 사원내 아칼 탁트는 완전히 복구됐다고 했다. 아칼 탁트는 시크교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는 5층짜리 건물로, 당시 인도군의 진압작전으로 크게 손상됐다. 그는 이어 당시 탱크 5대가 사원내부 구역으로 진입했다. 대리석으로 만든 계단을 파손했다. 총탄 자국과 핏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핏자국은 당시 피가 대리석에 스며들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14살인 그의 아들을 따라 핏자국을 보러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사원은 북문이 정문이고, 동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었다.

사원의 정문 앞에서 신발을 벗어 맡겼다. 입구에 놓인 플라스틱 통에 수북히 쌓인 두건더미에서 하나를 꺼내 집어 들었다. 시크교는 머리칼을 드러내는 걸 금기로 한다. 그래서 머리에 터번을 쓰고 머리칼을 가려야한다. 황금사원 입구 바닥의 폭 1의 물이 흐르는 곳을 지나간다. 정화의식인 듯하다.

일부 비신자의 출입을 금하는 힌두교 사원과는 달리, 시크교는 개방적이다. 시크교는 인도에서 생겨났으나 힌두교의 계급도 부인한다. 우상 숭배도 거부하고 유일신을 믿는다.

황금사원 구역은 사각형의 건물이 외곽을 이루고 있고, 그 안에는 가로 200, 세로 300가 돼 보이는 인공호수가 있었다. 호수의 한 복판에는 지붕 등 사원의 상단이 금 100㎏을 뒤집어쓰고 있는 3층 높이의 하리 만디르(신의 사원이란 뜻)가 서있다.

blood_tainted_marvel_in_Golden_Temple(3315).jpg

(황금사원내 바닥의 핏자국)

7월초의 햇볕은 강렬했지만 제1의 성지를 찾는 시크교도의 발길로 사원은 붐볐다. 정문을 들어서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대리석 바닥으로 발을 딛는 순간, 소년이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오렌지색의 점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선혈 처럼 붉은 색의 반점들도 보인다. 대리석에 스며든 핏자국이었다. 누구의 피가 이토록 20년이 넘도록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지. 가슴이 참 아팠다. 사원측은 특별히 1984년 유혈작전의 핏자국이라고 표시하지는 않고 있었다.

총탄_자국들.JPG

(회당 벽면의 총탄 자국들)

호수 주변을 걸어 동쪽 출입구 밖에 접한 회당에 찾아가니 대리석 벽에 총탄 자국이 수십개가 보인다. 기둥의 끝이 날아가기도 했고, 깊이 3㎝는 충분히 될듯한 총탄 흔적이 뚜렷하다. 그 안에서는 뜨거운 햇볕을 피해 순례중 잠시 누워 눈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북문 바로 한 층 위에 자리잡은 시크 역사관. 시크교를 연 초대 구루 나낙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크교의 역사를 인물화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역사관의_영웅초상화.JPG

(시크교 역사관의'푸른 별 작전'관련 영웅 4명의 초상화. 왼쪽끝이 자르나일 싱, 그 옆이 그를 군사적으로 도왔던 예비역 장성, 그리고 오른쪽 두명이 인디라 간디를 저격한 경호원들이다.)

끝에서 두번째 방에는 인디라 간디를 저격한 두 시크교도 경호원이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샤히드 베안트 싱(1949년~1984년 10월 31일), 샤히드 사완트 싱(1967년~1989년 10월 31일)이라는 사진 설명이 초상화 밑에 붙어있다. 양인의 초상화 옆에는 군의 진압작전으로 크게 훼손된 황금사원내 아칼 탁트 건물의 당시 모습이 그려져있다. 설명은 이랬다. 수천명의 시크교도가 학살됐다. 시크교도는 힘을 모아 저항하기 위해 일어났다. 시크교도 군인들은 그들의 병영을 떠났다. 시크교도는 하지만 머지않아 복수를 했다. 복수를 했다는 말은 인디라 간디 당시 총리를 죽였다는 말이다.

22년전인 1984년 암릿사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당시의 주인공은 자르나일 싱(1947년생)이라는 젊은 시크교 성직자다. 당시 30대 중반인 젊고 똑똑한 이 시크교 성직자는 선명성을 내세우며, 시크교도가 다수 거주하는 펀잡주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곧 펀잡주내 최대의 목소리로 커졌고, 시크교도 국가 독립을 추진했다. 그는 젊은 이들을 선동, 경찰과, 정부 관리, 힌두교 신자, 그리고 자신들에 반대하는 시크교도에 대한 백주 테러를 자행했다. 펀잡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무정부상태로 변해갔다.

인디라 간디 정부는 자르나일 싱에 대해 압박을 시작했고, 포위가 좁혀지는 걸 느낀 자르나일 싱과 추종자들은 황금 사원안으로 들어갔다. 자르나일 싱과, 그를 도운 인도군 예비역 장성 샤벡 싱, 그리고 수백명의 추종자들은 황금 사원내의 5층 건물인 아칼 탁트를 요새화하고 인도정부에 맞섰다. 아칼 탁트는 시크교의 최고위 결정이 내려지는 성스러운 장소. 이때문에 인도군이 무차별 진압에 상당한 부담을 느낄 것이란 판단을 했던 것.

인디라 간디는 결국, 군을 들여보내 무장 소요를 유혈 진압했다. 푸른 별 작전(Operation Blue Star)이었다. 현장을 지휘한 건 시크교도인 쿨딥 싱 브라르 중장이었다. 격렬한 저항에 봉착한 인명 피해가 급증하자 브라르 중장은 전차 투입을 감행했고, 탱크들은 아칼 탁트를 향해 불을 뿜었다. 자르나일 싱은 교전중 사망, 시신으로 발견됐다. 4일간의 작전이 끝난뒤 아칼 탁트는 폐허로 변했다. 이 사건은 시크교도들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안기게 된다. 자신들의 최고 성지가 훼손당했다는 반감에서 였다.

더구나 자르나일 싱은 국민회의당이 정치적인 필요성에 의해 만든 인물이었기에 반() 인디라 간디 정서가 강하게 표출됐다. 인디라 간디의 국민회의당은 당시 펀잡주에서 야당과 시크 지역 정당인 아칼리 달의 연합세력에 밀려 집권에 실패했다. 이렇게 되자 펀잡주에서 재집권을 모색하던중 아칼리 달 내부 분열을 위한 정치공학적 접근을 했다. 즉 아칼리 달내 기존 인물들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로, 젊은 시크교의 성직자인 자르나일 싱을 발굴해 정치적으로 후원했다. 정치 공작은 인디라 간디의 둘째 아들이자 후계자로 떠오르던 산자이 간디가 벌였다. 하지만 자르나일 싱은 인디라 간디의 통제권 밖으로 벗어나 애물덩이가 되었다. 호랑이 새끼인줄 모르고 키웠다가 자칫 물리게 된 것.

6월초의 푸른 별 작전으로부터 다섯달쯤 지난 10월의 마지막 날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도인 경호원 두 명의 저격을 받고 사망한다. 뉴델리의 삽다르정 1번지 자택에서, 바로 옆에 붙은 집무실로 출근하기 위해 걸어가던중이었다. 큰 며느리인 소냐 간디에 의해 앰베세더 승용차로 황급히 AIIMS 병원으로 옮겨진 그의 몸에서는 무려 20발이 넘는 탄알이 나왔다.

피는 피를 부르고, 또 다른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법. 힌두교도 총리가 시크교도의 총탄에 쓰러졌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델리에서는 힌두교도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시크교도가 대상이었다. 델리는 펀잡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시크교도가 살고 있는 지역. 1947년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인도 아()대륙이 쪼개지면서 파키스탄쪽 펀잡에 살던 시크교도들이 상당수 델리로 이주했다.

힌두교도들은 폭도로 변해,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른 시크교도의 집을 약탈하고 살해했다. 딸들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강간당했다. 시크교도는 살아남기 위해 터번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힌두교도처럼 짧게 깍아야 했다. 국민회의당 일부 지도자들이 앞장서 폭도를 선동했고, 경찰 당국도 사실상 방조했다. 광풍이 지난뒤 북인도에서 최대 4000명의 시크교도가 숨졌다고 전해진다.

폭동은 인디라 간디 총리의 큰 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총리직에 오른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50대 암릿사르 사업가가 라지브 간디의 학살 책임론을 주장한 건 이같은 배경에서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흰색과 검은 색으로 명료하지도 않고, 얽히고 꼬여있는 법. 시크교도의 흉탄에 맞아 숨진 어머니의 자리 계승을 위한 총리직 선서 차 라지브 간디가 찾아간 대통령은 시크교도(지아니 자일 싱)이었다.

IMG_9456(3315).jpg

(목욕재계)

2006년 7월 초의 황금 사원은 평온했다. 순례자들은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신통력이 있다는 호수에 들어가 몸을 적셨고, 그 사이로 길이 30㎝가 넘는 금잉어가 헤엄치고 다녔다. 호수 옆의 성스러운 나무 둑 반자니 베르, 순교자들의 사당 앞에서 절을 했다. 그리고는 사원의 네 모서리에 자원봉사자들이 철제 대접에 가득히 담아놓은 물을 마시는 정화의식을 했다.

순례의 핵심은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금빛 찬란한 3층 건물 하리 만디르에 있는 시크교 성서 구루 그란트 사힙를 참배하는 것. 순례객의 줄을 따라 하리 만디르에 들어가니 1층에는 3인조 남자 밴드가 앉아 노래를 하고 있다. 50대인 두 사람은 키보드를 치며, 역대 구루들의 말씀을 모은 구르 그란트 사힙의 구절을 노래하고, 다른 한 사람은 두 개의 작은 드럼을 두드리고 있다. 그들의 노래는 몇 만평은 되어 보이는 황금사원 곳곳에 스피커를 통해 전해졌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이었다.독립국가를 만들겠다는 시크교도의 의지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는지 모른다. 1984년을 고비로 펀잡내 시크교도의 분리주의 운동은 추진력을 잃었다. 현재 펀잡주의 집권당은 시크지역당인 아칼리 달이 아닌 국민회의당. 현재의 의석 분포는 전체 116석중 국민회의당이 64석, 아칼리 달이 52석을 차지하고 있다. 내년에 주총선이 예정되어 있으나 국민회의당의 재집권이 예상된다. 암린데르 싱 주총리가 인심을 얻고 있고, 펀잡주 암릿사르 출신인 만모한 싱 총리(시크교도)가 연방정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게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현지 주민들의 말이다.

IMG_9477(7236).jpg

(황금사원내에서 담소하는 승려들)

하지만 시크교도는 약화되지 않았다. 이들은 작지만 강하다. 한 예가 황금사원의 역사관이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중 참혹한 장면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후손들에 전달하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자꾸들었다. 어디서도 그런 참혹한 그림들은 본 적이 없었다. 목이 잘리고 교수형을 받은 모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큰 칼을 정수리로 받고 가슴까지 몸이 두동강나고,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 삶겨지고, 칼날이 달린 톱니바퀴에 몸이 들어가기 직전이고. 최근세의 순교자 10명의 끔찍한 사망 직후 얼굴 사진은 정면으로 바로 보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시크교 500년 역사는 종교 박해와 외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들의 신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무굴제국의 창건과 비슷한 시절 구루 나낙에 의해 1507년 만들어진 시크교는 이후 1708년까지 10명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구루를 계속 배출했다. 하지만 이중 2명이 순교하고, 마지막 구루는 4명의 자식을 모두 전쟁터에서 일을 정도로 감당하기 힘든 도전에 부딪혔다. 5대 구루인 아르준 뎁(1563~1606년)은 시크교도 사회의 첫 순교자. 시크교 성서를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는 시크교 세력이 급속도로 확산되는데 위협을 느낀 무굴 황제 제항기르에 의해 체포해 혹독한 고문 끝에 숨졌다.

6대 구루인 하르 고빈드(1595~1644년)는 처음으로 시크교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어야했던 인물. 무굴제국과 모두 4차례 전쟁을 벌였고, 인도 중부 도시 괄리오르의 성에 1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시크교를 전사 집단화했다. 몸에 두 개의 칼을 항상 차고 다니는 시크교의 전통도 만들었다.

9대 구루 텍 바하두르(1621~1675년)은 무굴의 아우랑젭 황제에 의해 델리에 끌려가 무굴황성인 랄킬라(붉은 성) 앞에서 순교했다. 지금도 랄킬라 앞에 가면 순교지의 표지가 남아있다. 구루 텍 바하두르가 목이 잘린 직접적인 계기는 카슈미르 지방의 힌두교도인 판딧들 때문이었다. 판딧들은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요구하는 아우랑젭 황제의 시한부 통첩에 봉착한 뒤 인근 펀잡의 구루 텍 바하두르를 찾아왔다. 구루 텍 바하두르는 이들의 도움을 요청받고 이렇게 말했다. 나를 개종시킬 수 있으면, 카슈미르의 힌두교도들도 개종할 것이라고 아우랑젭에게 전하시요라고. 그는 이후 델리에 끌려간뒤 아우랑젭 황제 앞에서 개종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했고, 참수당했다.

시크교의 지막이자 10대 구루인 고빈드 싱(1666~1708년)은 무굴황제 아우랑젭과의 전투에서 네 아들을 모두 잃었다. 고빈드 싱은 자신이후에는 더이상 구루가 없을 것이라고 선언, 그 자신 마지막 구루가 됐다.

구루가 없는 시대의 시크교도 역사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프간 왕의 침공을 받아 1761년 황금사원이 대파되는 참극을 겪었다. 시크교 역사의 정점은 1799년 란짓 싱이란 불세출의 인물이 등장, 북인도를 아우르는 첫 시크왕국을 세우면서다. 라호르를 중심으로 펀잡주는 물론이고 북으로는 카슈미르,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접경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평화지대를 호령했다. 란짓 싱은 황금 100㎏를 희사, 황금사원을 금으로 장식했다. 황금사원이란 속칭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영국군의 침략을 받아 두 차례의 전쟁 끝에 펀잡은 1849년 영국의 수중에 떨어진다.

이런 역사속에서 시크교도들은 강한 군사조직으로 대응한다. 영국식민지 시절에는 다수가 군문에 들어갔다. 이들은 1857년 세포이 반란 당시 반란군 토벌에 앞세워졌다. 당시 영국군 소속 인도군인 세포이들은 벵갈출신이었고, 이들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는 건 힌두교도가 시크교도라고 판단한 것이다. 세포이들이 델리를 점령, 무굴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자파르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투쟁을 벌였을 때 시크교도들이 델리 탈환전에 대거 투입됐다.

영국식민지 인도군에 입대한 시크교도의 수는 이후 계속 늘어났다. 1차대전이 시작된 다음해인 1915년에 3만5000명이었고, 1차대전이 끝날 때쯤에는 10만명을 넘어섰다. 인도의 대표적인 무장독립투쟁가인 수바쉬 찬드라 보스(1897~1945년)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된 인도군을 모아 독립군(INA)을 조직, 미얀마를 지나 인도를 향해 진격했을 때 병력 2만명중 3분의 1이 시크교도였다.

시크교도는 전사적인 전통은 현 인도군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으나, 시크교도 출신 숫자는 인도 전 병력의 10%까지를 차지한다는 게 통설이다. 인도 전체 인구의 2%미만인 시크가 군의 10%를 차지한다는 건 엄청난 비중. 인도가 1947년 독립한 뒤 군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후진국형 쿠데타를 경험하지 않은 건, 시크교도가 군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시크교도는 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해, 탱크를 앞세우고 뉴델리의 권력을 장악해도 국가를 통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 현재의 육군 참모총장도 시크교도인 J.J.싱 장군(1945년생)이다. 그는 시크교도 출신으로는 2005년 처음으로 육군의 최고위직에 올랐다.

J_J_Singh.jpg

(J J 싱 장군)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시크왕국을 세운 마하라자 란짓 싱의 후손인 M.S.사르카리아씨()는 군 입대를 선호하는 시크교도 사회의 분위기와 관련, 지금 동네에 나가도 2시간이면 100명의 군 입대 희망자를 모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열흘을 주면 1 만 명은 쉽게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농촌의 경우 75%이상이 아들은 군에 보낸다면서 시크교도의 용기를 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도의 강한 부대로 유명한 시크 연대는 1984년 푸른별 작전이후 크게 흔들렸다. 황금사원 유혈진압 소식을 접한 시크연대 소속 병력들이 일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황금사원에 군병력이 진입한 2일 후 파키스탄 접경 강가나가르에 주둔중이던 시크연대 9대대 장병 수 백명이 한때 무장 소요를 일으켰다. 비하르주() 주둔 시크 연대 소속 병력 1461명의 병영 이탈은 가장 큰 반란이었다. 이들은 무장한 채 암릿사르를 향해 이동하다가 비하르에서 UP주로 넘어가는 접경 도시 바라나시 인근에서 저지에 부딪히자 포격전까지 벌이는 전투를 치렀다. 진압군과 반란군 양측에서 35명이 사망했다. 이후 인도 정부는 시크교도의 군내 비중을 낮추기 위해 기존에는 병력을 선발하지 않는 지역에서도 골고루 모병하기 시작했다.

시크교도는 한편 인도에서는 부자의 대명사이다. 델리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건 시크교도들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인도내 시크교도의 삶의 공간인 펀잡주는 인도내 가장 소득이 높은 지역이다. 인도내 밀 생산량의 22%, 쌀 생산량의 10%를 생산하는 곡창지대이기도 하다. 다수의 시크교도가 이민을 떠나, 영국의 버밍햄과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에 강력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이들이 송금하는 돈은 펀잡주 시크교도의 지갑을 두툼하게 만들고 있다.

헌금함.JPG

(기부함속 돈과 금붙이)

실제로 황금 사원의 지붕에 금을 입히기 위한 목적으로 기부를 받고 있는 함에 들어가 있는 돈에는 고액이 많았다. 미화 100달러 짜리 아멕스 발행 여행자 수표, 금 반지, 금 팔찌, 그리고 100루피(약 2500원) 등 인도 고액화폐도 수북했다.

시크교도는 힌두교도가 압도적인 인구 11억명속의 섬주민이나 다름없다. 소수로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때때로 반복되는 유혈의 역사. 하지만 시크교도들은 독립적이고 무릎꿇지 않는 강인함으로 버티고 있었다. 작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는 시크교도 사회, 참으로 존경받을 만한 커뮤니티였다.

신세대_시크.JPG

(신세대 시크교도. 아이의 짧은 머리 스타일이 변화의 바람을 느끼게 한다)

사족: 분리주의 운동이 급커브를 그리는 한편, 머리칼과 수염을 깍지않는다는 시크교의 문화에도 서서히 변화가 오고 있다. 터번은 시크교도를 알아볼 수 있는 단적인 표식. 이 속에 가려진 머리칼은 자르지 않는 것이나, 암릿사르에서 만난 부동산업자 라진데르 싱(1967년생)은 6살난 아들의 머리를 힌두나 무슬림처럼 짧게 깍아놓았다. 그는 아이도 머리모양을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도 터번을 쓰고 있지만 머리는 깎았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깍는다고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싫어한다고 했다.

/암릿사르(인도 펀잡주)=최준석 조선일보 특파원 jschoi@chosun.com

'여행,레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스베가스의 한 호텔  (0) 2006.09.30
이열치열 더운나라 수단  (0) 2006.09.30
경상도의 아름다운 길  (0) 2006.09.30
국립 자연사 박물관  (0) 2006.09.30
넌 날 미치게 했었지  (0) 2006.09.30
Posted by ogfriend

경상도의 아름다운 길 18선
2006-07-12 11:01 | VIEW : 11,603
지난 6일부터 도깨비뉴스는 건설교통부에서 발표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을 시도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은 그 다섯번째로 경상도편입니다.

7일 서울의 아름다운 길, 10일 경기·인천·강원의 아름다운 길, 11일 충청도의 아름다운 길에 이어 이번에는 경상도의 아름다운 길을 소개합니다.

먼저 경상북도의 아름다운 길입니다. 길에 대한 특징 및 설명은 건설교통부의 보도자료를 참고한 것입니다.
 
▲ 무섬 외나무다리 :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무섬외나무다리)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은 자연과 고가(古家)가 그대로 보존된 전통마을로서 내성천(乃城川)이 마을의 3면을 감싸 듯 흐르고 있으며, 그 가운데 섬(島)처럼 떠 있는 육지 속 섬마을입니다.

30년 전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이어 다리를 놓아 내성천을 건너 뭍의 밭으로 일하러 갔다고 합니다. 장마가 지면 불어난 물에 다리는 휩쓸려 떠내려가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다리를 다시 놓았다고 합니다.
지난 30여년간 마을과 뭍을 이어준 유일한 통로였던 무섬 외나무다리. 현재도 30년전 방식으로 그대로 주민들이 나무를 잘라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 죽령옛길 : 경북 영주시

죽령옛길은 2,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길입니다.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 길의 선비, 공무를 띈 관원들, 장사꾼들로 붐비고,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주막, 마방이 죽 늘어서 있어 사시사철 번잡했던 고개길이었다고 합니다.

영주시에서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기 위해 이 길(2.5km)을 다시 뚫고 안내판을 설치한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자연탐방로로 개발되어 야생화 등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 울릉도 일주도로 : 경북 울릉군(지방도 926호선)

이 도로로 인해 산간지역 마을의 접근성이 좋아져 농민들의 특산물 판매량 증대에 기여하였다고 합니다. 기암절벽과 아름다운 해안선이 어우러진 도로라 관광객들이 붐빈다고 합니다.

울릉도는 일주도로로 인해 사동 흑비둘기 자생지, 불교진각종 성지, 사자암, 태하 성하신당, 북면 바다위의 코끼리바위, 송곳산, 삼선암, 관음도, 나리분지, 너와집, 용출소, 신령수 등 울릉도 관광명소에 대한 접근성도 크게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 영덕대게로 : 경북 영덕군 축산면 ~ 강구면(국지도20호선)

영덕대게로는 39ha 면적에 이르는 해변공원, 해맞이공원과 인접하여 영덕군을 찾는 사람들에게 수려한 해안풍경과 해맞이 등 멋진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300여 미터에 이르는 공원의 시작과 끝 지점에는 파고라, 의자, 주차장, 나무계단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부채꽃, 패랭이꽃, 야생화, 향토수종 꽃나무 900여 그루가 잘 조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인근에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바다경관과 어우러진 이국적 정취를 느끼며 드라이브 할 수 있는 도로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 문경새재 옛길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문경새재 1관문~3관문

조선시대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길(영남대로)인 문경새재 옛길은 예로부터 영남과 한양을 잇는 길목이었으며, 군사적 요충지, 문물의 교류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현재 문경새재 1관문에서 3관문에 이르는 6.5km의 문경새재 옛길은 황토길로 보존되어 있으며, 관광과 역사체험의 현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 황악로 : 경북 김천시 다수동(국도 4호선)

황악로에 위치한 영남제일문(높이 12m, 길이 50m)은 6차로 도로와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장관을 이룬다고 건설교통부는 평가했습니다.

옛 영남의 첫 관문에 위치한 영남제일문은 한식구조로 건립된 전통 구조물입니다. 중앙에 걸려있는 현판은 서예대가 여초 김응현 선생과 각장자 이수자인 고원 김각한씨의 작품이며, 특히 무형문화재 기능자인 단청장 조정우 선생이 직접 단청한 현판 좌우 8폭의 비천상을 징, 장고, 꽹과리, 포도 등 김천의 상징물을 함께 그려 품위와 고전미를 더하여 김천의 명물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 팔공산 한티재 : 경북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 득명리(국지도 79호선)

팔공산은 전국의 10대 명산중 하나로서 동화사, 부인사 등의 명성사찰과 천주교 한티성지, 신숭겸장군 유적지 등 많은 유적과 전설이 서려있어 4계절 내내 등산객과 탐방객이 넘치는 전국적 관광명소라고 합니다.

팔공산의 아름다운 전경과 신선함을 굽이굽이 휘감아 돌다보면 도로의 굴곡을 따라 펼쳐지는 수려한 주변경관에 감탄과 탄성을 자아낸다고 건설교통부는 평가했습니다.


 
▲ 김유신장군묘 진입로 : 경북 경주시 충효동(시도 58호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장군묘로 연결되는 흥무로 벚꽃길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벚꽃 터널을 이루어 경주 내에서도 가장 최고로 손꼽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건설교통부는 경주를 찾는 관광객에게 주간뿐만 아니라 야간에도 볼거리를 제공하고자 지중 등을 설치하여 야간경관이 매우 아름답다고 평가했습니다.


다음은 경상남도의 아름다운 길입니다.
 
▲ 지안재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함양읍 구룡리(지방도 1023호선)

지안재와 오도재는 옛날 내륙지방 사람들이 남해안쪽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고자 지리산 장터목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했던 고개였다고 합니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휘감아 오르면 지리산으로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곳은 낮에 보아도 아름답지만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또한 여름밤에는 반딧불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맑다고 합니다.

이곳은 ‘가루지기’전의 주인공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오도재 정상에는 그 옛날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무사히 재를 넘고 장사가 잘 되도록 산신령에게 기원하였다는 비석이 서있다고 합니다.

아래는 2005년 5월 말 독자 '후루룩'님이 '이니셜D 코스??'라는 제목으로 제보했던 것으로 낮에 찍은 지안재 사진입니다.
 
관련기사 : http://www.dkbnews.com/bbs/zboard.php?id=hotandcool&no=2409



 
▲ 가야의 거리 : 경남 김해시 봉황동 ~ 구산동(시도 2-23호선)

김해시는 금관가야의 발상지로서 시가지 전역에 산재한 역사문화자원을 종합적으로 정비하고자 가야문화의 주요 유적지들을 연결하는 가로공원의 성격으로 가야의 거리를 조성했다고 합니다.
철기문화를 상징하는 상징분수와 야간경관조명, 타원형의 바닥분수, 가야인의 생활환경이 함축된 주제정원, 소광장, 쉼터 들이 조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 천자봉 산길 : 경남 진해시 태백동 안민도로 ~ 장천동 대발령 고개(임도, 천자봉 산길)

이 도로는 산불방지와 산림자원의 보호증식을 위해 개발된 것이라고 합니다.
길 양쪽으로 벚나무가 심어져 해마다 봄이면 장관을 이루며 산길 주변에는 철쭉, 배롱나무 등 25만여 본의 꽃길이 조성되어 있어 사계절 다양하고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고 건설교통부는 평가했습니다.


 
▲ 대천로 : 경남 진해시 시민회관~북원로타리(대로 3-1)

경남 진해는 국내 최고·최대의 벚꽃 행사인 군항제가 개최되는 곳이죠, 대천로는 진해 내에서도 최고로 꼽는 벚꽃길이라고 합니다.
이 벚꽃길은 2002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로망스' 촬영지로도 유명합니다.


 
▲ 해안관광도로 : 경남 진해시 웅천동 ~ 웅동1동(중로 3-21 및 중로 3-22)

진해시 웅천동 사도마을에서 영길마을까지의 해안변을 따라 약 20㎞에 이르는 해안관광도로는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진해지역의 새 관광 명소로 각광받는 곳입니다. 낚시하기가 좋은 곳으로 알려지기도 해 인근 부산, 창원등지의 낚시꾼들도 즐겨 찾는 낚시 명소라고 합니다.

도로 양쪽으로 벚나무, 아열대 식물 등이 식재되어 있어 해안도로의 아름다움을 더하며,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도로 중간 중간에 휴게소(Scenic Point)와 주차공간, 자전거도로 등이 조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 동진대교가 있는 해안도로 : 경남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 ~ 마산시 진전면 창포리(국도77호선)

고성군 동해면과 마산시 진전면을 잇는 동진대교는 바다로 향하는 길로서 국도77호선(국지도67호선과 중용)상의 교량이며, 동해면 해안일주도로의 일부구간입니다.
이 곳은 리아스식 수려한 해안경관과 조화를 이루어 지역명소가 되고 있으며, 동진대교가 개통되면서 낚시꾼과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합니다.


 
▲ 산양관광도로 : 경남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 남평리(지방도 1021호선)

도로변에는 동백꽃이 심어져 있어 동백이 피는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반짝이는 동백 잎 뒤로 핀 꽃을 보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건설교통부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와 한려수도의 크고 작은 섬들이 연출하는 해안경치가 일품이며, 한적한 바닷가 어촌마을들과 조그만 포구가 정겹게 비춰지고 차창을 열면 상큼한 갯바람이 차안을 가득 메우는 최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 학동·해금강 해안도로 : 경남 거제시 남부면 ~ 장승포동(국도 14호선)

학동·해금강 해안도로는 시원스러운 바다풍경과 해안절경이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2월 말에서 3월 초에 이곳을 찾으면 아름다운 해안절경과 함께 붉게 물든 동백숲과 도로변에 핀 갖가지 야생화로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학동몽돌해수욕장의 몽돌이 바닷물에 쓸리는 소리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선정될 만큼 운치를 더하며, 학동해수욕장부터 해금강까지 형성되어 있는 학동동백림과 팔색조 번식지는 천연기념물 제233호로 지정·보호되고 있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또한 함목 삼거리에서 해금강마을 가기 전에 있는 도장포마을에는 신선대와 바람의언덕이 있으며, 이곳 주변도 시원스러운 바다풍경과 아름다운 해안절경으로 찾는 이에게 즐거움을 더 한다고 합니다.


 
▲ 남면해안도로 : 경남 남해군 남면(지방도 1024호선)

평산고개를 넘어 유구마을로 접어들면서 시작되는 남면해안도로는 바다와 작은 섬, 기암괴석, 해안마을이 조화를 이루어 이국적 정취를 자아내는 남해군의 대표적인 해안관광도로입니다.

남면해안도로는 남해섬의 서쪽에 위치하여 해질녘 낙조에 비치어 보석처럼 빛나는 바다가 일품이며, 장항숲이나 구미숲에서 보는 일몰도 장관이라 건설교통부는 평가했습니다. 또한, 홍현에서 향촌까지 해안절벽을 따라 놓여진 도로의 양쪽에는 깎아지른 산과 해안절벽이 절경을 이루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살이 잔잔하다는 앵강만도 찾는 이에게 잊지 못할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합니다.


 
▲ 남해대교 : 경남 남해군 설천면 ~ 하동군 금남면(국도19호선)

한국의 금문교라 불리는 남해대교는 1973년 개통되었으며 길이 660m, 높이 80m의 국내 최초 현수교라고 합니다.

건설교통부는 남해대교가 가로지르는 노량해협의 거센 물살은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 증인으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이며, 고려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수한 유배객들이 자신의 적소로 건너오기 위해 나룻배를 탔던 한 맺힌 곳이기도 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부식으로 인해 잿빛을 띄던 남해대교는 2003년 산뜻한 선홍색 빛으로 새단장하였고, 창선·삼천포대교와 함께 섬으로 가는 남해군 최고의 관광자원이다라고 건설교통부는 덧붙였습니다.

독자분 중에 위에서 소개한 경상도의 아름다운 길을 더 멋있게 촬영한 사진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댓글을 등록하는 부분의 아래에 '답변의견'이 있습니다. '답변의견'을 클릭한 후 아름다운 길을 찍은 사진을 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여행,레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열치열 더운나라 수단  (0) 2006.09.30
암릿사르  (0) 2006.09.30
국립 자연사 박물관  (0) 2006.09.30
넌 날 미치게 했었지  (0) 2006.09.30
피지,뉴질랜드,호주 여정기  (0) 2006.09.30
Posted by ogfriend
 
국립자연사박물관(워싱턴 D.C) 2006/07/13 09:03추천1스크랩0
국립자연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싱턴 D.C.의 내셔널 몰 중앙에 위치한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지구의 창성기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물, 식물, 광물을 비롯하여
자연인류학, 고고학 등 5000만 점 이상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뉴욕의 미국 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과 더불어
미국이 자랑하는 박물학의 박물관이다.(무료입장)


박물관 입구 1층 중앙홀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만난
박제된 '아프리카 코끼리'는 지금도 눈에 선명하다.
1~2층과 지하층으로 나누어진 여러 분야의 전시장에는
지구에 있는 각종 광물과 보석은 물론 40억 년 전의 화석 플랑크톤에서부터
수많은 동물의 박제들이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특히, 아마존의 아나콘다 박제와 살아 꿈틀대는독거미는
보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으며,
공룡화석의 뼈를 맞추어 세운 거대한 공룡 박제는 자연사박물관의 하이라이트였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44.5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는
전시물의 백미로 관람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연사박물관은 자연사의 전 분야에 대한 자료를 다루는 곳을 말하며,
대표적인 파리의 국립자연사박물관(Muse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은
1억 점 이상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3000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영국의 대영자연사박물관(British Museum of Natural History)은
자연사 연구자료의 보고로 알려져있다.


또한, 뉴욕의 미국 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은
연건평이 10만㎡으로 세계 최대의 전시 면적을 자랑하고 있고,
스위스 베른에 있는 자연사박물관(Naturhistorisches Museum),
시드니의 오스트레일리아박물관(Australilan Museum),
하와이 호놀룰루의 비숍박물관(Bernice P. Bishop Museum)은 지역의 자연사를 전시하고 있다.

'여행,레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암릿사르  (0) 2006.09.30
경상도의 아름다운 길  (0) 2006.09.30
넌 날 미치게 했었지  (0) 2006.09.30
피지,뉴질랜드,호주 여정기  (0) 2006.09.30
절두산 순교성지  (0) 2006.09.30
Posted by ogfriend

블로그 이미지
오래된 그리고 좋은 친구들이 가끔들러 쉬다 가는곳.. 블로그에 게재된 내용 중 게재됨을 원치 않으시거나, 저작권자의 요청이 있으면 즉시 게재한 내용을 삭제하겠으니 삭제요청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모닥불 올림. Any copyrighted material on these pages is used in noncomercial fair use only, and will be removed at the request of copyright owner.
ogfriend

태그목록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1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