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여행,레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람선에서 본 시드니 (0) | 2006.09.30 |
---|---|
아치즈 국립공원 (0) | 2006.09.30 |
신화가 남긴 무덤 카라코롬 (0) | 2006.09.30 |
울릉도 성인봉 가는길 (0) | 2006.09.30 |
김일성대학 양미래 입네다. (0) | 2006.09.30 |
| |||||||
|
유람선에서 본 시드니 (0) | 2006.09.30 |
---|---|
아치즈 국립공원 (0) | 2006.09.30 |
신화가 남긴 무덤 카라코롬 (0) | 2006.09.30 |
울릉도 성인봉 가는길 (0) | 2006.09.30 |
김일성대학 양미래 입네다. (0) | 2006.09.30 |
2006. 9. 30. 12:26 여행,레저
신화가 남긴 무덤, 카라코롬 | ||||||||
이름 | JR | |||||||
날짜 | 2006/05/26 18:28:02 | 조회 | 19443 | |||||
신화가 남긴 무덤, 카라코롬
처음 칭기스칸을 이은 것은 셋째아들인 어게데이칸이었다. 어거데이는 1229년부터 1241년까지 몽골제국의 칸이었다(처음 2년의 공백은 칸을 뽑기 위한 회의 기간이다). 어게데이는 칭기스칸의 유훈을 계승한 후계자로 기억된다. 그는 몽골의 역사를 정리한 [몽골비사]를 썼고, 세계의 수도를 지었다. 그 도시가 카라코롬이다. 건물을 잘 짓지 못하는 유목민들은 유럽 건축가들의 힘을 빌어 이 도시를 건설했다. 검은 자갈이란 뜻의 카라코롬은 칭기스칸이 평소에 좋아했던 지역이었다. 넓은 초원이 펼 쳐져 있어 경치가 좋고 오르혼강(Orkhon)이 흘러 풍요로움까지 더하고 있다. 오르혼강은 톨강(멀리 흐르는 강)의 어머니 강이다. 요즘 몽골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국립공원 테렐지에서 발원한 톨강이 울란바타르를 거쳐 카라코롬에 닿는다. 강물은 다시 셀렝게 강과 만나 바이칼호수로 들어간다. 어게데이칸도 그 지역을 좋아했다. 카라코롬은 몽골의 중심 지역(중앙이란 뜻의 아르항가이 지역)이었다. 처음 지어질 때의 도시는 웅장했다고 한다. 중앙에 큰 성이 있었고, 도시를 둘러 강과 해자가 있었다. 성 주변으로는 유목민의 집인 게르가 장사진을 이뤘고, 도시 중앙에는 아름다운 조각까지 있었다(이 조각은 울란바타르 근교 휴양지인 가초르트의 몽골리아 호텔 입구에 재연돼 있다). 이 조각은 아래가 커다란 통이고, 가운데는 야자수 나무 모양이며, 꼭대기는 ‘날개가 달린 나팔 부는 여신상’이 있는 분수였다. 분수에서는 마유주나 수태차, 우유, 술 등이 끊임없이 나와서 사람들이 언제나 받아먹을 수 있었다. 꼭대기 장식은 크리스트교의 상징 중 하나인데, 유럽인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를 널리 인정했다는 기록처럼 그런 장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카라코롬은 몽골의 수도이며, 세계 제국의 수도의 역활을 했다.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칸을 만나기 위해서 카라코롬을 찾았다. 역사학자들도 왔고, 교황과 왕의 사제도 왔고, 여행가, 정치가, 종교인, 상인들이 줄을 이었다. 도시안에 모든 종교가 성행했고, 누구나 장사를 하고,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치안이 잘되어 있는 나라였다. 카라코롬은 세계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지금도 중국 카슈카르에서 파키스탄으로 가는 길에는 ‘카라코롬 하이웨이’란 지명이 있다. 카라코롬에서 출발한 실크로드의 지류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세계를 이어준 길 즉, 역참제(파발말이 바톤 터치 형식으로 달려가는 교통, 통신, 물류 시스템)의 흔적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바투칸(칭기스칸의 큰아들인 조치의 차남)이 유럽 원정길에 있을 때 어게데이칸이 죽었다. 그 정보를 폴란드에 있는 바투칸에게 그 소식을 알리고 다시 돌아오는데 2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카라코롬에서 폴란드, 다시 카라코롬으로 귀환하는 무려 2만5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단 2주일만에 왕복한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빨리 말을 타게 되면 내장이 터져서 죽는다고 한다. 킵착칸국의 바투칸은 온 몸을 소가죽 끈으로 꽁꽁 묶고 쉬지 않고 달려서 카라코롬에 도착했다. 후대인들에게 바투칸은 전쟁을 가장 잘했던 칸으로 기억된다. 어거데이칸을 이은 구육칸(어거데이칸의 장남), 멍케칸(어거데이칸의 동생인 톨루이의 장남)까지는 카라코롬이 몽골의 수도였다. 구육칸은 2년 임기만에 죽고, 멍케칸도 오래하지 못했다. 멍케칸이 죽을 때, 톨루이의 막내아들인 아리크부케는 수도 카라코롬에 있었고, 둘째아들인 쿠빌라이칸은 중국 원정에 나가 있었다. 카라코롬에 있던 아리크부케가 자신이 새로운 칸이라고 선포했다. 쿠빌라이는 인정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전장에서 스스로 칸이라 선포했다. 전쟁이 시작됐다. 왕자의 난이라고 하기엔 판도가 너무 컸다. 전 유라시아대륙이 남북으로 갈린 전쟁이었다. 쿠빌라이는 북경을 중심으로한 남쪽 세력을 집결했고, 아리크부케는 카라코롬을 중심으로한 북쪽 세력을 집결시켰다. 계속된 전쟁, 결국 쿠빌라이가 승리했다. 쿠빌라이는 칸이 되자마자 자신의 근거지였던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쿠빌라이가 버리고 간 카라코롬은 북방의 작은 도시가 되었다. 카라코롬이 역사 속에서 부활할 수 있는 길이 딱 한번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원나라가 망했을 때였다. 당시 원의 마지막 왕인 토곤 테무르칸(고려여인 기황후의 남편)이 1368년에 패망한 병사들을 이끌고 몽골로 돌아왔다. 카라코롬에서 힘을 키워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의지가 굳건했다. 토곤 테무르칸은 카라코롬까지 가지 않고 북경과 가까운 도시 인찬을 몽골의 수도로 선포하고, 북경 정복을 별렀다. 토곤 테무르칸의 후회가 깊은 만큼 재정복의 의지 또한 충천해 있었다. 그가 지어 부른 노래를 보면 알 수 있다. 40만 몽골인들의 자랑스러운 그러나 토곤 테무르칸은 채 2년이 되지 못해 인찬에서 병사한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다두(13세기 북경의 이름, 대도 또는 칸발리크)를 찾을거라 맹세했지만, 왕위 쟁탈전에 휩싸여 국세가 더욱 쇠약해지고 말았다. 그는 쫓기다시피 카라코롬으로 물러났다. 어게데이칸이 만든 수도 카라코롬에 110년만에 칸의 깃발을 다시 꽂았지만, 그 깃발은 전혀 명예로울 수 없었다. 1380년, 몽골은 명나라와 대규모 전쟁을 치루지만 완패했다. 당시 몽골은 동몽골과 서몽골, 하르몽골로 분열돼 있었다. 민족끼리, 부족끼리 갈라진 야비규환의 싸움터였던 몽골은 어떤 싸움도 이길 수 없었다. 승리한 명은 몽골과의 악연을 끊기 위해 몽골제국의 기틀인 카라코롬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카라코롬은 제국의 수도였다는 추억과 거북 하나만 남았다(에르덴쥬 사원 옆에 있는 이 거북을 몽골인들은 하라호름의 관문을 지키는 거북이라 믿는다). 명나라는 돌아갔지만, 몽골은 통일되지 못했다. 몇 번의 동서전쟁이 있었고, 몇 번의 통일 시대가 있었지만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그날 이후 몽골은 단 한번도 과거의 영화로 돌아오지 못했다. 1640년 경 하르몽골의 아브테칸(Abtai)이 몽골을 하나로 만든다는 명목으로 티벳에서 불교(라마교)를 들여왔다. 그는 카라코롬 성터의 무너진 벽돌을 모아 에르덴 죠 사원을 지었다. 그러나 그 사원마저도 1930년대에 러시아에 의해 무너졌다. 지금 에르덴 죠 사원은 건물 몇 개를 제외하고 거의 터만 남아있다. 최고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무너진 신화를 다시 세우는 것은 그보다도 백배는 더 어려울 것이다. 폐허가 된 도시 카라코롬, 산위에서 내려다보는 무너진 성터는 마치 무덤처럼 음산하고 휑하다. 폐허가 우리에게 경고를 던진다. 고인 물은 썩는다. 안주하지 말라, 안락은 스스로를 안락사시킨다. |
아치즈 국립공원 (0) | 2006.09.30 |
---|---|
대부도 (0) | 2006.09.30 |
울릉도 성인봉 가는길 (0) | 2006.09.30 |
김일성대학 양미래 입네다. (0) | 2006.09.30 |
전북남원 지리산 비래봉 철쭉 (0) | 2006.09.30 |
2006. 9. 30. 12:25 여행,레저
|
대부도 (0) | 2006.09.30 |
---|---|
신화가 남긴 무덤 카라코롬 (0) | 2006.09.30 |
김일성대학 양미래 입네다. (0) | 2006.09.30 |
전북남원 지리산 비래봉 철쭉 (0) | 2006.09.30 |
세계 10대 아름다운섬 (0) | 2006.09.30 |
2006. 9. 30. 12:21 여행,레저
김일성대학 ‘양미래’ 임네다
여행은 즐겁고 남녀의 만남은 아름답다. 여행은 시선에 활력소를 불어넣고, 꽃다운 여인과의 접함은 마음에 불어 넣어주는 활력소 때문인 것 같다.
자금성, 븍경
여행과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새삼스런 느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의 새파란 여대생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다. 북한의 젊은 여인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여행에 끼인 북경 ‘모란’ 식당이 여행코스에 들어있어서 가능했다.
사실 난 처음 북한 정부에서 운영하는 식당 방문에 여행 코스에 정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좀 놀랬다. 찜찜하여 괜한 중국 여행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 갑자기 중국여행을 하고 싶지 않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모든 일정이 짜였고 돈을 다 지불해서다.
북한 정부가운영하는 북경의 궁전 '모란' 식당
북한 식당에서 북한 사람을 접하는 것도 꺼린 점이지만 중국 북경의 특선 “마사지”를 받는 게 여행일정으로 끼여 있다는 게 또 내 마음을 꺼리게 만들었다.어렸을 때는 잘 몰랐지만, 난 결벽증이 좀 있다. 세상 사람들이 거의 다 하는 것을 못하고, 또 먹는 것도 잘 못 먹는 게 많다. 술, 담배, 춤추는 것을 전혀 못하고 음식은 편식이 심하다. 그러니 사람들과 함께 막 어울려 놀 수 있는 타입이 아니다. 하지만 단체 여행이라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하는데, 이번엔 남들이 다 한다는 “마사지 코스”가 들어있었고, 난 그 마사지를 거부하여 남들의 이상한 눈총을 좀 받았다.
잘은 모르지만 그런 곳을 소개받아 서비스를 받고 돈을 뿌려야 여행사에 이득이 되어 여행사는 마사지를 적극 권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난 지금 이 나이까지 살면서 마사지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일이 없다. 굉장히 오래 전 항상 들리던 이발관을 놔두고 다른 이발관을 처음 가보았는데 그 이발소에서 모르는 여자가 얼굴 마사지를 해주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어 그 다음부터는 할아버지가 깎아주는 이발소만 지금까지 26년을 계속 이용하고 있다. (26년을 똑같은 사람이 내 머리를 깎아줘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이발도 여자가 내 얼굴에 손대는 게 싫어 한 할아버지한테만 하니 홀로 머무는 호텔 방에서 모르는 여자가 40분간 해준다는 마사지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마사지가 싫어서가 아니다. 난 그냥 여자건 남자건 남이 내 몸에 손대는 게 정말 싫다.
아무튼 나는 이미 호텔에서 마사지 받는 것을 거부하여 일행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눈치를 받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북 정부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간다하여 좀 긴장했다. 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있지 않을까 하는 방법도 생각했다.용빼는 재주를 부린다 해도 혼자 빠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할 수없이 ‘모란’ 식당을 갔다. 그런데 막상 그곳을 가보니 잘 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내 입맛에 맞는 음식 맛.
난 김치 하나만 놓고도 밥을 잘 먹을 수 정도로 단순한 식성을 갖고 있지만 이상하게 냄새나고 기름이 많은 중국 정통 음식 같은 것은 못 먹는다. (한국식 중국음식은 괜찮다.) 때문에 중국 본토 음식을 섭취 하고 소화시키려 했다 배가 놀랬다. 놀란 배를 달래느라 고생 좀 했다. 그 와중 ‘모란’에 가서 음식을 먹으니 맛이 그렇게 담백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먹는 음식보다 특별히 나는 게 없는데 느끼한 중국 음식을 먹다 먹으니 그렇게 맛 나는 것 같았고 배가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음식이 하나씩 들어오고 있는 중
역시 난 한국사람 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 이북 음식도 남한의 음식과 하나 다르지 않는 한민족의 음식임을 확실히 깨닫게 되어 음식 먹다 속으로 통일이 빨리 되었으면 하는 비약된 생각도 하게 되었다.
둘째, 젊고, 예쁘고, 상냥한 아가씨들의 시중(?).
조블에서 열심히 블로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이북 정권이나 이북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이 남보다 많을 것이라는 선입감이 생길 수 있고, 또 그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북 정권이 운영하는 ‘모란’ 식당에 가 음식을 즐겼다는 사실은 좀 아이러니 한 일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느낀 사실을 말하고 싶다.
차를 따르는 김일성대학 여대생 종업원
그 느낀 사실 중 하나가 “남남북녀(南男北女)”라는 말이 가슴 깊이 들어와 뭔가 느끼게 한 점이다. 뭔지 모르게 뭉클하고 짜릿했다. 그렇게 나이 어린 20대 여자들인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 내 자신이 아직도 이팔청춘의 남자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런 느낌을 가진 자체만으로도 흡족할 수 있었다.
이런 감을 느끼니 정말 왜 예전부터 남쪽 남자들이 왜 북쪽 여자들에 대하여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됐고, 또 북쪽 여자들이 남쪽 남자들을 바라보게 되었는지 하는 느낌이 왔다. 비록 정치적으로 김정일을 혐오하지만, 그래도 이북 여자들은 이남 남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면이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는데 그런 필링이 매우 좋았던 것 같다.
셋째, 일반 식당에서 볼 수 없는‘엔터테인먼트’
‘모란’은 일반 식당이다. 대중식당인 것이다. 그런데도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이북 정부에서 운영하는 식당이라 그런지 중국에서 보기 드물게 고급풍이 풍기고 내부가 비교적 깨끗하고 현대식이라 좋았다.
춤과 노래도 들려주고
다른 많은 손님들도 식사하고 즐기고..
식당 여종업원들은 한국에서 말하는 기업의 ‘도우미’ 같은 여자들이었는데 다른 식당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미(美)를 갖추고 있었다. 다만 다른 느낌이 들었던 것은 남한의 여자로부터 느낄 수 있는 ‘글래머’다우며 개성의 미가 독특하게 풍기는 그런 미모를 갖추지 않았지만 뭔가 가득 차고 북한 여인네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내심(內心)을 발(發)하는 게 여느 여인네들과 다르다는 감이 마음에 와 닿았다.그런 나의 느낌은 정확했다. 갑자기 풍악이 울리고 예쁜 한복을 입은 그 여자들이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데 수준급 이상이었다. ‘획일 된 사회규칙으로 움직여지는 북한에서만 저런 일을 할 수 있겠지...’ 하는 약간 비판적인 생각도 들었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산뜻한 맛이 들어 흥이 절로 돋워 졌다. 아마 그 맛 60-70년대 한국 TV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맛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좋아했던 것 같다.
넷째, 북한 최고 엘리트 특수계층을 양산하는 “김일성대학”의 학생들이 여종업원.
말이 “여종업원”이지 사실 이 식당에서 손님을 시중드는 여자들은 “여종업원”이라 말할 수 없다. 그들은 학교 공부과정의 연수생으로 나온 엄연한 권력층의 집안 빽이 든든한 여대생들이다.
오른쪽, 양미래
배경이 그래서 그런지 말하는 것과 몸가짐이 남 달랐다. 분명 싸구려 같이 싼 여자도 아니었고, 또 그렇다고 저속한 미모를 갖춘 여자들도 아니었지만, 뭔가 풍기는 맛이 특출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조용하게 여행을 했던 일행의 시선을 끌고도 남았다.
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말을 걸어보니 여자가 시원스런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래 김일성대학 ‘양미래’임네다. 우리 3년간 연수나왔시오.”
절도 있는 말씨에 살짝 상냥하게 웃은 그 얼굴, 여느 남정네의 혼을 빼앗아 가고도 남을 것 같은 맛을 풍기고도 남는다.
기풍 당당, ‘김일성大’ 여대생 ‘양미래’
‘양미래’와 다른 여종업원들, 한국에서의 학교 출신으로 말한다면 최고 일류대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북은 다른 사회다. 그 아무리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학생이라 해도 사상 충성도, 집안 배경, 똑똑한 브레인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게 바로 “김일성대학”이다. 때문에 그들이 갖는 프라이드는 한국의 최고 일류대생들이 갖는갖는 프라이드의 프리미엄보다 훨씬 더 높은 고가(高價)를 자랑한다 해도 과언 아닐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김일성대학의 학생이 식당에서 웨이트리스 노릇을 하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는 게 너무 아깝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오르간니스트, 양미래, 김일성대학 북경 연수생
난 호기심에 양미래 학생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사진 좀 같이 찍자고 했다. 이미 일행들의 요청에 의해서 사진을 여러 번 찍었던 터라 내가 양미래 학생을 부르는 것은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내 옆에 다가오자 난 이 여학생의 옆에 섰고, 내 카메라는 다른 사람에게 줘 사진을 찍게 해 기념사진을 박았다.
한복을 입은 학생은 거리를 두고 봤을 때는 키가 큰 것으로 보였는데, 막상 내 옆에 세우고 보니 키는 작았다. 많아야 158-160 정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품어내는 기(氣)는 남한 여자들로부터 느낄 수 없는 당당하며 미묘한 것이었다.
아마 그것은 여자만이 풍길 수 있는 “여성”의 특이한 맛과,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철두철미한 교육으로 무장되어져 “사상(思想)”에 있어서는 세뇌교육을 통한 억지 쓰는 것으로 미제국주의자들을 이기고, 실전에 있어서는 핵무기를 통한 “벼랑 끝 외교전술”의 뱃심으로 미국을 이기고자 하는 오기에서 생겨진 그런 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런.. 미... 제국주의자들이 !! ....”
미국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재미교포 이미지”라는 특이한 인상이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갓 미국에 온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다. 미국식의 투박한 옷차림과 행동양식이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많이 다른 맛을 풍겨서 하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가 그 식당에 들어가 왁자지껄 말을 많이 하고 자연스럽게 북한의 젊은 여대생들과 어울렸을 때는 남한에서 온 사람들과 달랐다는 느낌을 받았어야 할 터인데, ‘양미래’ 라는 학생은 그런 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양미래 학생이 물었다. “어디서 왔시오?”
일행 중 몇 사람이 동시에 답했다. “미국에서 왔어요.”
순간 양미래 학생은 눈이 동태눈으로 변한다. 놀란 티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말한다.
“뭣이라요?? 아니 ~ ~ ~ 이런.... 미.. 제국주의자들이 !! .......”
양미래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면서 손님의 심기를 건드린 게 아닌가 하는 눈빛이 뚜렷하다. 놀란 토끼의 얼굴로 동료 학생들(식당 종업원)을 쳐다본다.
순간 우리 일행들은 폭소를 터트린다. 그리고 말한다. 나도 함께 한마디 거두었다.
“하 하 하!!! ^^ 예~ 우린 미국에서 온 미 제국주의자들이라요~ ~ ~”
미 제국주의자들이 어설픈 평양도 사투리 흉내를 내며 말하니 식당 안은 폭소 장으로 변한다. 모든 종업원들이 우리 테이블로 시선을 던진다. 순간 한 여자가 눈치를 날리니 잽싸게 모두 무대 위로 올라가 풍악을 울린다.
노래가 나온다.
“반갑습네다 ♬. 반갑습네다 ♬.”
“반갑습니다”라는 노래 가사를 시작으로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요란스럽게 흘러나왔다. 뚜렷한 외모로 제일 많은 시선을 받은 양미래 학생은 전자오르간 앞에 앉아 열심히 오르간을 친다. 한복을 입고 그렇게 오르간을 열심히 치니 그 모습이 예쁘게 보인다. 특이하게 보였다. 사진기를 든 사람들은 모두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사진을 찍고 테이블에 다시 앉아 흥겨운 풍악을 들으며 밥을 먹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여대생에게 상사병 걸린 "K"
‘양미래" 학생의 행동과 말투는 단연 돋보였다. 전형적으로 강성인 평안도 사투리라 그런지 모른다. 그녀는 분위기를 휩쓸었고 한국 여자에 비하면 특별한 미인 축에 들어가지도 않는데도 남정네의 시선을 이끄는 데 묘력(妙力을)을 발휘했다. 우리 일행 중에 그 ‘양미래’ 학생에서 뿅 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K"라 불린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미국은 나보다 늦은 1978년도인가 왔다. 그런데도 말 발음은혀가 꼬부라진 영어식 발음을한다. 즉 ‘쏼라쏼라’로 말하는 사람이다. 아직도 총각이란다.20대에 미국 온 사람 중 혀 꼬부라진 투로 한국말 하는 사람은 드문데 “K"가 그렇게 말하여 별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람은 너무 재밌었다. 보는 여자마다 말 걸고 거는 작업이 능숙한 솜씨가 그렇게 보였다. 나이가 든 사람이지만 모든 게 귀엽게만 보였지 밉게 보이는 면은 전혀 없었다.
아무튼 그는 그런 사람인데 임자를 만났는지 ‘양미래’ 학생에게 집중 포화를 퍼 붇는다. 계속 말을 걸고 사진을 찍고 연락처를 물어본다. 사모함의 표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설마’라는 생각을 하고 나는 눈치 없이 기념이라는 미명하에 식당 앞에서 그 여자와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니 K는 싫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인데 나랑 사진 찍는 게 싫다는 투였다. 하지만 당시 난 그런 사실을 몰라 사진 한번 찍어주는 것 놓고 무슨 유세냐는 식으로 나무랬다. 그때서야 K는 마지못해 사진을 찍어준다.
나중에 알았다. 여학생에게 연락처를 주고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노라는 약조(?)를 했다고 한다.
그 후 어떤 곳을 가도 여자에게 선물할 생각만 하고 좋은 물건을 보면 여자에게 선물하겠다고 공포하고, 자기가 찍은 여자고, 결혼까지도 생각한다는 초고속 메어리지(marriage)의 좀 허황되게 보이는 꿈을 꾼다.
남남북녀(南男北女)의 한 쌍이 탄생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 한마디의 말을 던진다.
“K형, K형이 ‘양미래’와 결혼하려면 아무래도 노동당에 가입해야 할 것 같소. 김일성대학 학생이면 이북에서는 고위층 자녀일 것이고, 그렇다면 중국에까지 올 수 있었던 것 든든한 신분보장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인데, 그럼 어떻게 그 여자가 K형과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겠소. 그러니 천상 그 여자와 결혼하려면 이북을 방문하여 노동당에 가입하고 김정일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야 결혼이 성사될 수 있을 것 같소.”
농담 반 진담 반의 이런 말에 K는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 그럼 내가 그 여자를 찍은 게 아니라 내가 그 여자에게 찍힌 게 아냐?”
당근!! ^^
일행 모두는 폭소를 터트린다.
분단의 비극
여행 가이드는 북경에 거주하는 교포 3세였다. 북경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온 사람으로 중국과 한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가는 곳마다 엄청난 양의 역사적 사실을 쏟아냈는데 교포 3세로서 한국말을 참잘한다는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한다. "중국에서 자란 2세 3세는 한국말 다 잘하는데 미국에서 자란 2세 3세는 한국말 못하는 사람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이 말에 끔찔했던 사람이 좀 있었을 것 같다.
이어지는그의 중국에 대한 해박한 설명이 너무 값져 메모도 하고 디지털 녹음기로 녹음을 했다.
그는 한반도 실정에 대해서 말한다. 한국에 가보니 너무 잘 살아 좋았는데 이북에 가보니 너무 못살아 가슴 아팠다 한다. 중국의 1960년대와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북이 한국과 같이 잘 살려면 중국공산당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김정일이 살아있는 한 잘 될 것 같지 않다고 한다.
몇 년 전 김정일은 중국 상해를 돌아보고 천지개벽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등소평 식의 경제개혁을 이뤄 인민을 배불리 살도록 만들겠다고 공언했는데 현실은 요원하게만 보인다. 김정일 정권이 흔들릴 수 있어서다. 때문에 조심스런 경제개혁을 추진하는데 그것은 등소평 경제개혁과 너무 멀다. 때문에 신의주 경제특구 활성화보다 개성공단을 통하여 뭔가 점진적 경제개혁을 이루려 하는데 언제 어느 세월에 중국과 같은 경제개혁이 이뤄질 지 한심스럽게만 보인다.
호텔 방에서 내다 본 중국의 발전상, 북경
사실 중국의 경제개혁은 등소평에 의해서 이뤄졌고, 등소평은 한국의 박정희 식 경제개발을 염두에 두고 중국식 자본주의 토착화를 꾀했다. 요즘 중국이 도입하려는 “새마을운동”도 일례다. 등소평 경제개혁은 계획 실시 20년 만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북한이 중국식 자본주의를 도입으로 경제개혁을 이루겠다면 이는 박정희 식의 경제개혁과 별 다를 바 없다. 즉 “독재개발”인 것이다. 그렇다면 쓸데없는 핵무기를 통한 견제구는 더 이상 던지지 말고 과감하게 박정희 식 “스트라이크 볼”을 던져 경제를 개혁시킨다면 6자회담을 성공시킬 수 있고, 그 대가로 더 후한 경제 원조를 받을 수 있을 수 있고, 또 한국에 여자가 없어서 베트남에서 들여온 여자들을 받아들여 농촌 총각들이 결혼하여 혈통을 무질서하게 흐려놓는 사태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았는데, 그게 바로 “남남북녀” 결혼으로 남북한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만든다.
맺는 말
여행하면서 별 이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외람된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바로 김일성대학 여학생과 “K"라는 사람을 보고 하게 되었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은 서로 끌리는 게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남북의 비극적 분단과 ”정치체제“ 때문에 두 사람의 교제도 원천봉쇄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교제가 원천 봉쇄되면 사랑은 키울 수 없지요.
물론 앞서 언급할 것처럼 남자가 이북에 들어가 노동당에 입당하고 김정일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한다면 달라질 수 있지만, 미국에서 자유롭게 살은 사람이 자유를 다 버리고 사랑을 찾아 들어간다는 것도 쉽지 않지요. 일반적으로 뜨거운 사랑 몇 년 가지 못 간다고 하는데, 그렇게 위험한 사랑을 놓고 자유에 취해 살은 사람이 남은 생애의 자유를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여학생의 이름을 밝히는 게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밝히게 된 이유는 여자가 남자한테 찍힌 게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게 찍혔다는 결론이 들어 ‘양미래’ 여대생에게 어떤 불이익이 당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어 이름을 밝혔습니다. 즉 그녀는 미국의 한 남성을 김정일 정권에 유리한 행동대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 하에 다른 동료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대담한 포즈를 취하고 또 연락처 주소를 받았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도이북의 공작(?)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답니다.^^)
북경신화반점 호텔. 중국에서는 일류호텔을 "반점"으로 부르는 게 묘하다
5성 호텔이라 하지만 한국의 호텔에 비하면 3.5성 정도밖에 되지 않아 아직 후지다
마지막 북경을 떠나던 날 호텔 뷔페 카페테리아에서 청담동에 산다는 한 한국의 중년 여인에게 “K"가 부탁을 했습니다. 식당 ‘모란’에 가면 ‘양미래’ 여대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전해달라고...
그 분은 전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정말 전해줬는지 모르지만, 이 글을 통하여 또 ”K“의 마음을 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K"는 ‘양미래’를 사무치게 사모한다고...
여자에게 한 남자의 속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또 결실도 맺을 수 없는 사실, 바로 분단의 비극이 빚어낸 현실입니다. “남남북녀”의 현실화가 아직 요원하게만 느껴지게 하는 한 사례라라는 생각을 이번 여행을 통해해보았습니다.
P.S.
K형, 내가 이 글을 써서 K형의 속 마음을전하는데 나중에 딴말하면 그땐 국물도 없기요. ^^ 남남북녀가 이뤄지면 이북에 있는 남자들은 누구한테 장가 드냐고요? 이남에 있는 여자들은 누구한테 시집가냐고요? 그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해 봅시다. 궁하면 길이 열리겠지요.
신화가 남긴 무덤 카라코롬 (0) | 2006.09.30 |
---|---|
울릉도 성인봉 가는길 (0) | 2006.09.30 |
전북남원 지리산 비래봉 철쭉 (0) | 2006.09.30 |
세계 10대 아름다운섬 (0) | 2006.09.30 |
타임지가 권하는 아시아 최고 (0) | 2006.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