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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9. 30. 12:12 여행,레저

남원 광한루

전북 남원(南原) 광한루원(廣寒樓苑)
2006/05/17 오후 6:36 | 여행&산행관련

[담은글] 전북 남원(南原) 광한루원(廣寒樓苑) 조회(0) /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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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6-05-17 18:20:44
  담은글 : 김신묵의 해피투어 > http://cafe.joins.com/happytour/234864


전북 남원(南原)은 춘향의 고향이자 古典 春香傳의 발상지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 영원한 "사랑의 지침서" 역할을 해오고 있는 춘향전.

서양에 로미오와 쥬리엣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도령과 춘향이가 있다.
이도령과 춘향의 애틋하고도 고결한 사랑이야기인 춘향전은 그야말로 클래식 러브스토리이다.

성춘향(成春香)은 1675년(조선숙종) 음력 4월 8일, 남원부의 퇴기(退妓) 월매와 성씨라는 양반 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가 되던 단오(端午)에 사또 자제 이몽룡(李夢龍)과 광한루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는다.

이도령이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떠난 후 춘향은 후임 사또에 의해 온갖 고초를 겪게 되지만 수청을 거부하며 일편단심을 지키다가 죽기 직전에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에 의해 다시 행복을 찾게 된다는 다소 진부(?)하고도 밋밋한 스토리~

이러한 춘향이와 이도령을 기리는 춘향제가 매년 열리고 있는데 사랑을 주제로 한 보기드문 향토 문화축제로써

춘향이와 이도령이 처음 만난 날인 음력 단오를 양력화하여 5월 5일을 전후로 열고 있으며 (금년은 5월 4일 ~ 9일)

첫 춘향제는 일제 식민지 시절인 1931년 단오날 남원 권번(券番) 주관으로 전국 각지의 명기(名妓) 1백여명이 모여

처음 지은 춘향사당에서 추모의 제사를 올리므로써 시작되어 어언 올해로 76회에 이르고 있다.

남원(南原)에는 춘향의 사연이 얽혀있는 곳이 많다.

그래서 남원은 흔히 춘향골이라 부른다.

도로나 고갯길, 심지어 터널의 이름도 춘향터널이다.

춘향이 버선발도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원인광한루원....

이도령과성춘향이 처음 만나사랑을 맺은 그곳을 찾아가천 년을 뛰어넘는 사랑의 위대함을 느껴보자.

광한루(廣寒樓)가 아니라 광한루원(廣寒樓苑)이라 부르는 이유는?

전주에 가서 광한루를 찾았더니 광한루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광한루원(사적 303호)은천체 우주를 상징하여 조성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누원이란다.

광한루를 중심으로 영주(한라산),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 등을 뜻하는 세 개의 삼신산이 있는 호수와 오작교가 있다.

즉, 광한루라는 누각만 있는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 싸고 있는 호수와 오작교, 삼신산등을 포함하고

그밖에 완월정같은 기타 부속 건물들을 모두 포함하여 하나의 작은 공원같은 그런 개념이라고 보면 될 듯 하다.

현재의 광한루원은 약 2만2천평쯤 된다고 한다.

남원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요천(蓼川)...

섬진강의 상류가 되는 요천변 옆에 광한루원이 있었다.

누원내의 호수는 이 요천의 물을 인공으로 끌어들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입장권(1,600원)을 끊어 안으로 들어서자 이내 나타나는 누각 하나....

저것이 광한루인가?... 듣기보다는 왜소하구나 하고 다가가서 보니 완월정(玩月亭)이다.

지상의 사람들이 천상의 세계를 꿈꾸며 달나라를 즐기기 위해 지은 것으로 달이 뜨는 동쪽을 향해 있는 수중누각이다.

춘향제 행사(2006년 제 76회, 5월 4일 ~ 8일)의 주요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평상시는 전통혼례를 올려주고 있다.

<완월정(玩月亭)......>

 

완월정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호수가 있고 홍교(아치교) 형식의 돌다리가 나타난다.

바로 오작교(烏鵲橋)다.

견우와 직녀의 전설에 이도령과 성춘향의 사랑을 빗대어 호수를 만들어 은하수로 가늠하고 다리를 놓아 오작교라 하였다.

선조 15년(1582년)에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놓고 오작교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 되었지만 오작교는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연지교중 국내 최대이다.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고, 처녀가 아닌 사람이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은하수위에 걸쳐 진 오작교.....호수위에 오작교(烏鵲橋)....>

 

오작교를 건너 호수의 반대편...

광한루원의 후문쯤에 이르니 드디어 광한루(廣寒樓)가 나타난다.

넓고(廣)…추운(寒)…누각(樓) 인가???

광한루(보물 제281호)는 원래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광통루"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광한루(廣寒樓)'라 바꿔 부르게 되었으니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廣寒)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되었다.

<광한루(廣寒樓)....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 본 모습이 아름답다.....>

 

 

 

 

 

광한루의 앞에는 호수를 바라보고 자라의 石物이 놓여져 있다.

이 호수는 영지(靈池)라고도 하며 그 가운데에는 인공 섬을 만들어 봉래산-방장산-영주산의 3神山을 재현해놓았는데 이를 지키고 떠 받드는것이 9 마리의 자라라고 하는바 이를 상징하여 만들어 놓은듯 하다.

 

삼신산은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에 의하여 만들어진 섬으로

왼쪽 섬을 영주산, 가운데 산을 봉래산, 오른쪽 오작교 옆을 방장산이라고 일컬으며

섬과 섬사이는 아담한 구름다리로 연결하여 영주산에는 영주각이, 방장산에는 방장정을 세워 놓았다.

우리나라의 삼신산은 한라산, 금강산, 지리산을 일컫는다.

<왼쪽 섬인 영주산의 영주각.....>

 

 

<오른쪽 섬인 방장산과 방장정....>

 

 

 

광한루원(廣寒樓苑)은 경복궁(景福宮) 경회루(慶會樓)의 지원(池苑)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梁山甫)가 조성한 소쇄원(瀟灑園)과 함께 한국의 경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 모체가 되고 있다는 평가이며 그 당시의 생활상, 건축기술, 신선사상등을 엿볼수 있는 귀중한 사적지(史蹟址)이기도 하다.

광한루원을 돌아보고 남원을 떠나오는데 춘향이가 한양으로 가는 이도령을 마중나와 작별하였다는 오리정이 있다.

 

Tip...... 먹거리 정보....

남원에서 전주가 멀지 않다.

전주는 흔히들 전주비빔밥이나 콩나물국밥을 이야기하는데

민물 매운탕인 '오모가리'가 더 유명하고 그 맛이 일품이다..... 한벽집에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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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9. 30. 12:11 여행,레저

북경

 
[스크랩]화려한 대륙의 중심 북경(北京) 2006/05/16 21:05추천0스크랩0
원문출처 : 바다뜰

화려한 대륙의 중심 북경(北京)

화(中華)의 중심인 북경(北京)을 다시 찾은 것은
발해와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만주와 백두산을
답사하고 난 뒤 사나흘이 지나서였다.
연길에서 북경공항에 도착하여 버스를 이용하여 시내 중심으로 향하였다.
28km나 길게 뻗은 넓은 도로는 북경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었다.

시내 중심으로 들어왔지만 신호등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다"는 이 나라 사람들의 문답처럼
차량이나 사람들의 움직임에 급한 것이 없었다.
또한 시내 중심의 자전거 전용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넓은 땅을 밟아야하는 이들의 현실에 이해가 갈 것 같았다.

200여 년 전, 북경을 찾았던 연암 박지원은
그의 저서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본래 수레라는 것은 하늘이 만들게 하여 땅에 다니게 한 것이니,
육지에 다니는 배요, 능히 움직여 다닐 수 있는 방이다.
수레에는 융차와 역차가 있고, 수차와 포차도 있어 그 종류가
수 없이 많아서 지금 다 들어 말할 수 없거니와
사람이 타는 수레(태평차)와 물건을 싣는 수레(대차)는
백성들에게 가장 긴요한 것이다“

인류의 발명품 중에서 바퀴의 사용은 실로 엄청난 진보를 가져왔다.
불과 얼마 전 연암이 북경에 머물면서 한 없이 부러워했던 태평차는
이제 자전거로 변하여 북경의 거리 곳곳을 누비고 다니고 있었다.
그러고도 그럴 것이 말과 수레의 발전이 없었더라면
진시황제의 통일이나 현재의 중국도 존재하지 못했을 듯싶다.

경은 주대(周代) 초기부터 연(燕)에 속해 있었다.
연은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왕조를 이어왔다.
춘추전국(주周 동천東遷부터 진秦의 통일까지)의 난세를 거치면서
여러 번 도읍을 옮겼으나 대부분이 현재의 북경(베이징) 근처였다.
그런 까닭에 북경을 '연경(燕京)이라고 달리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후 당대(唐, 618~884)에는 유주(幽州)라 불렀으며,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요(遼)와 송(宋)이 대륙의 남북을 양분하고,
요(遼)는 국토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하여 오경(五京)중 '남경(南京)'이라 불렀다.
12세기 중반에는 흑룡강(黑龍江) 유역에서 남하한 여진족이
금(金, 1115~1234)을 세우고 도읍으로 '중도(中都)'라 불렀다.


하지만 중국의 통일 국가의 수도(首都)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남방의 송이 아직까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279년 원(元, 1281~1368)이 남송을 멸하면서 전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고,
비로써 북경은 처음으로 중국 전체의 도읍으로 대륙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북경은 '대도(大都)'라고 불렀다.

그 후 1368년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원을 쓰러트리고
남경(지금의 江蘇省 난징)으로 도읍을 정했지만,
제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는 원의 대도가 일부 포함된 북경에
지금의 자금성(紫金城)을 짓기 시작해 1421년에 다시 천도하면서 북경이라 했다.
건축은 대부분 새롭게 지어졌으며 이것이 현재의 골격이 되었다.

명을 이은 청(淸)도 북경을 수도로 삼아 정권을 지켜왔다.
사람들은 보통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 내성(內城)의 안쪽만을
북경의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북경시는 성(省)과 같은 급의 특별시로
현재 강원도의 땅 전체보다 약간 넓은 1만 7800㎢나 된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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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국무총리표창)/푸른 바다 위 구름다리(고속국도 15호선 : 서해대교)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내기리~충남 당진군 송악면 복운리 /
한국도로공사 서해대교관리소 김정학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내장산 오색 단풍길(국지도 49호선) /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 정읍시청 김우술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바다 위에 세운 건설 미학(고속국도 130호선 : 영종대교)
/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인천광역시 중구 운북동 / 신공항하이웨이(주) 노명일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도심속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도로(제주시도 중2류1호선)
/ 제주도 제주시 일도1동 중인문로 / 제주시청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길(태안군도 14호선)
/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 태안군청 김동영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문화가 있는 벚꽃 길(지방도 819호선)/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영암군 학산면 독천리 / 전라남도청 김정선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한강위의 飛上(고속국도 130호선 : 방화대교)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경기? ?고양시 강매동
/ (주)삼안건설기술공사 정규봉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지나치기에 아까운 장회재 구간(국도 36호선)
/ 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 건설교통부 충주국도유지건설사무소 강창구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아름다운 샘골다리(정읍시 대로3류4호선)
/ 전라북도 정읍시 시기동 / 정읍시청 김우술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바람과 계곡의 교차로(고속국도 102호선)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 / 한국도로공사 창원지사 이연수



[선외가작]AG 상징거리/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 R∼동래구 미남 R



[선외가작] 가로수길의사계/충북 청주시 강서동(강서동∼석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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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외가작]사계가있는 가로수/전남 담양군 담양읍(담양,남산∼금성,원율)




[선외가작]세계로 미래로/경기도 고양시 강매동∼인천시 중구 운서동
/노선번호:고속국도 130호!



[선외가작]신비로운 문/서울 강서구 방화동∼경기 고양시 강매동
/노선번호:고속국도 130호선



[선외가작]친환경적인 한강 물갓도로/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
/노선번호:국도 6호선



[선외가작]태고적 신비/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봉선사∼국립수목원)
/노선번호:군도 14호



[선외가작]하늘에 닿는 길/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지방도 737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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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의 관문 투루판, 도둑질의 흔적 뿐…
2006-05-11 18:34 | VIEW : 626
 
계곡 옆 절벽에 굴을 파 만든 베제클릭 천불동

100여 년 전 서양탐험대 싹쓸이 … 투루판엔 승려 현장이 설법하던 사원 그대로 남아
기차가 투루판(吐魯蕃) 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동도 트지 않아 캄캄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내릴 때를 놓쳐서 다음 역까지 가기 십상이라고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서둘렀다. 투루판 겨울 날씨는 생각보다 매서웠다.

둔황이 서역의 관문이라면 투루판은 진정한 서역이다. 행정구역으로도 간쑤성(甘肅省)에서 이제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로 들어선 것이다. 역 앞에 준비된 버스를 타고 식당을 찾았다. 투루판은 총면적의 80%인 4만km2가 해수면보다 낮다. 가장 낮은 곳은 한가운데에 있는 아이딩호는 수면이 해발 -154m다. 어둠 속에서 버스가 계속 내리막길을 달리는데, 마치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식당 입구에 들어서자 서역의 향취가 짙게 풍겼다.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벽에는 낙타를 탄 대상과 민속춤을 추는 무희의 모습을 태피스트리로 짜서 걸어두었다. 둔황에서 밤새도록 서쪽으로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아침식사를 식당에서 하는 것인지,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인지 식당에는 손님이 많았다. 널찍한 식당 여기저기에서 신기해하는 눈빛이 우리에게 집중됐다.

본격적인 서역 행보 시작 … 투루판 면적의 80% 해수면보다 낮아

△투루판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주민들
투루판 사람들은 둔황 사람보다 코가 높고 눈이 움푹 들어갔다. 노인들 얼굴의 주름조차 이 지역 고유의 애환이 서린 듯 우리네 노인들과 달라 보였다. 정방형의 이슬람식 모자를 쓰고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는 두 할아버지의 모습이 이국적이다.
여기저기로 한눈파는 사이 가이드(황미선)가 일정을 설명해주었다.

“오전에는 고창고성과 아스타나 고분을 둘러보고 점심식사 후에는 교하고성이랑 카레즈를 볼 예정입니다.”
황미선 씨는 우루무치에 사는 조선족 여성이다. 그의 말투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경상도 사투리가 심했다. 버스를 다시 타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실크로드 여행은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보다 길을 밟아가는 데 의미가 있다. 그 길은 장건, 법현, 현장, 신라의 혜초가 지난 길이고 무수한 대상들이 왕래한 길이다.

따지고 보면 ‘누구누구가 과거에 지나간 길’이야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유독 실크로드를 지나간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는 건 무엇 때문일까. 험난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하고 미지의 세계와 소통하는 통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길이지 그 시절에야 지금처럼 포장도로는커녕 제대로 된 이정표조차 없었을 터.

요즘 유행하는 오지탐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실크로드는 그렇게 오지였고, 그래서 또 의문은 꼬리를 문다. ‘도대체 그 위험한 곳을 왜 그렇게 열심히 다녔을까.’
장건은 기원전 139년에 한 무제의 명을 받고 서쪽으로 떠났다. 흉노를 치기 위해 월지와 동맹을 맺으려는 무제의 계획에 궁정 관리였던 장건이 자원해 나섰다. 하지만 가는 길에 흉노에게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흉노는 적절히 예우했고, 장건은 결혼해서 자식까지 두었으나 축제날을 틈타 도망해 월지에 도착했다. 월지는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 흉노 정벌에 관심이 없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던 장건은 다시 흉노에게 체포됐다. 하지만 두 번째는 아내까지 데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장건은 그 후 두 차례나 더 서역을 다녀왔다. 실크로드 이야기는 바로 장건에서 시작한다. 그의 보고로 서역 문물이 알려졌고, 그의 발자취로 비단길이 열렸다. 무제는 그를 위대한 여행가라고 불렀다.

그나마 장건은 조금 이해가 된다. 법현이나 현장, 혜초는 장건처럼 군사적인 목적에서 길을 떠난 것도 아니었다. 2세기 이후 인도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 불교를 전파하는 승려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고, 중국의 구법승들은 불교 경전을 수집하고 성지를 순례하려고 이 길을 통해 인도로 갔다. 붓다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겠다고 그 험한 길을 나선 모습은 요즘으로 치면 돛단배로 태평양을 건너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격이 아닌가. 실크로드는 노정이 험난한 만큼 그 길을 지난 사람들의 강한 정신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중개무역 융성했던 오아시스 도시들 툭하면 침략당해
그런데 ‘길’을 여행한다는 생각에서 내가 간과한 것은 그 중간 중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아시스 도시들은 실크로드라는 길이 뚫리기 전부터 그곳에 존재했었다. 그들은 실크로드의 교역에 힘입어 발전했다. 대상들에게 쉴 장소를 제공하고, 중개무역을 하면서 성장하고 소국가를 형성했다. 하지만 무역의 요충지를 장악하려는 흉노를 비롯한 유목민족과 중국의 침입도 자주 받았다.

산맥의 만년설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마르거나 전쟁에서 패배하면 사람은 떠나고 도시는 모래에 파묻혔다. 그래서 실크로드 주위에는 옛 국가들의 흔적이 유적지라는 이름을 내걸고 과거의 영광을 대변한다. 우리 여행단보다 약 100년 앞서서 이곳을 찾은 건 서양의 탐사단들이었다. 그들은 보물찾기를 하듯 경쟁적으로 타클라마칸사막에서 유물을 발굴해 갔다.


독일 탐사대 르콕 일행이 머물던 투루판 지역의 산악지대

투루판은 실크로드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들려주는 곳이었다.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로, 이곳에서는 7000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수렵과 채집생활을 했다. 토착민인 차사인은 중국 전한 시대(기원전 221~기원후 25)부터 차사전국을 세우고 그 도읍을 교하고성으로 정했다. 그 후 흉노족 출신이 고창고성을 수도로 고창국을 세워 투루판 분지를 정치적으로 통일했다.

6세기 초에는 국씨를 중심으로 한족 출신 왕들이 다스리는 국씨 고창국이 들어서서 640년 당에 멸망할 때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 9세기 중엽에는 북쪽 초원에서 옮겨온 위구르의 영토가 되었고, 13세기 초에 이르러 몽골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이런 역사 속에서 투루판은 현장이 들러서 설법을 한 사원과 폐허가 된 도시, 독일 탐사대 르콕 일행이 남긴 칼자국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벽화 도둑 맞은 자리엔 사진이 대신 걸려 있어
고창고성은 투루판 시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져서 화염산의 발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입구에 서니 흙으로 지었다가 황폐화된 도시의 흔적이 눈앞에 넓게 펼쳐졌다. 당나귀가 끄는 관광객용 마차는 빛바랜 차양을 뒷좌석 위에 붙이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지의 규모와 구도는 당나라 때 완성된 것이고, 도시 안의 유적 대부분은 위구르 고창국이 남긴 것이다. 르콕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고대 도시의 곳곳을 갈아 경작지로 쓰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다른 곳에는 남아 있지 않은 마니교의 유물을 발견하는 등 개가를 올렸다. 필사본, 벽화, 천에 그린 걸개그림, 각종 직물 따위의 아름답고 찬란한 유물도 대거 발굴했다.

도시는 생각보다 넓어 마차로도 한참을 달려 사원 터에 도착했다. 현장이 불교 경전을 구하러 인도로 가다가 들러서 국왕의 간청으로 한 달간 설법을 한 곳이다. 당시 국왕은 현장 앞에 엎드려 자신을 밟고 단에 올라가 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불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베제클릭 천불동 역시 고창고성에 이어서 르콕 일행에게 약탈을 당한 곳이다. 계곡 옆의 절벽에 굴을 파서 쉽게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들었는데도 용케 찾아냈다. 르콕이 들어갔을 때 갑자기 모래가 쏟아지며 벽화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관광객들에게 공개되는 굴마다 들어가 보았지만 남은 벽화는 거의 없었다.

둔황의 석굴 사원들은 여전히 지역민들에게 성스러운 장소였으므로 벽화를 함부로 떼내지 못했지만 유물 도둑들이 이곳 벽화를 모조리 가져간 것이다. 도둑들은 벽화의 외곽 둘레에 깊은 칼자국을 낸 뒤 뒤로 톱을 집어넣어서 벽에서 떼어냈다. 벽화가 떼 내어진 자리에는 베를린인도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유물 사진이 걸려 있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처량하고 민망했다. 조금 남은 벽화들마저 중국 문화혁명 때 진흙 칠을 해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진흙을 물로 지우다가 완전히 훼손시킨 것도 있었다. 천불동이 위치한 계곡은 물이 흐르고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그러나 동굴이 심하게 훼손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동굴 앞의 난간 밑으로 르콕이 머물던 폐허가 된 집만이 눈에 들어왔다.


나뭇잎 모양의 강섬 위에 만들어진 교하고성

투루판 시 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은 나뭇잎 모양의 강섬 위에 만들어진 도시다. 서울의 여의도처럼 흐르는 물이 교하 고성에 이르러서는 양쪽으로 비껴 지나 다시 합쳐진다. 이 도시는 흙벽돌을 쌓아 올리지 않고 개미굴처럼 바닥을 파 내려가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벽만 남기고 흙을 파낸 뒤 지붕을 얹었다는 이야기다. 자세히 보니 정말로 벽에 지층 모양의 무늬가 그대로 보였다. 교하고성의 건물 지붕과 강 바깥 땅의 높이를 비교해 봐도 똑같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 바라보니 눈 쌓인 톈산산맥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교하고성은 고창고성보다 훨씬 옛 모양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데도 과거에 도시였다는 실감이 안 났다. 5100km2에 이르는 큰 절인 대불사(大佛寺) 입구에 들어섰다. 그제야 사람들이 살았던 기운이 다가온다. 건물 뒤에서 누구라도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옛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행복과 번영을 열심히 빌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흙이 되어 우리들 발밑에 흩어지고, 그들의 도시는 폐허가 돼도 우리는 다시 사원을 짓고 열심히 머리를 숙인다.

지하 수로의 구조를 보여주는 카레즈박물관을 들른 뒤 기차역으로 갔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대기실의 플라스틱 의자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일부는 바닥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중교통 수단은 기차다. 너나 할 것 없이 옷소매가 까맣게 때에 절었다. 어른들은 대부분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감거나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날이 지난 지 거의 20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휴가를 마치고 직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과 우리의 실크로드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기차에 오르니 이틀째라 적응이 돼 내 집처럼 편안했다. 피곤이 몰려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기사제공= 주간동아 글·문건영 변호사 사진·서해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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